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45화 (45/220)

45.

“그럼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되시는 건가요?”

비키가 질문했다.

“그건 차후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딱딱한 답변에 비키는 머뭇거리며 의견을 말했다.

“그게…… 이곳을 비롯해 지나쳐 온 마을마다 겁먹고 있어서요. 마물들이 근래 이상할 정도로 출몰해서 위험하다 보니, 아무래도 다들 두려워하고 있다고 할까요? 기사단이 머물러 주면 다들 확실하게 안심할 거예요!”

“간단히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나타난 마물은 제거하겠으나, 여긴 작은 마을이라서요.”

기사단장은 냉정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도시를 지키는 병력이지, 작은 마을에 머물러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한가한 사제들이 아닙니다.”

기사단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한가한 사제들?”

시찰단 중 하나가 울컥해서 반응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무시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서로의 역할이 다른데. 마을을 시찰하는 것과 마물을 소탕하는 것이 어떻게 같이 취급되겠습니까. 완전히 다른 일이고 다른 무게입니다.”

기사단장은 딱 잘라 말하고는 움찔한 비키를 쳐다보았다.

“번복하지 않을 겁니다. 시찰단을 데리고 돌아가세요.”

사내는 냉정히 쏘아붙이고는 수하 성기사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를 보며 비키는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중앙에서 관리직으로 파견된 그녀는, 지방의 시찰단에게 보내는 중앙 기사단의 비웃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왜 저렇게 사람이 건방진 거죠?”

비키는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아니, 우리가, 시찰단이,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는데요? 그러던 중에 마물들과 싸우기도 했다고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다는 건 똑같은데! 우리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듯이 말해 버리다니요!”

비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해요! 상부에 건의하겠어요!”

분하다는 듯이 외치는 비키를 보면서 시찰단은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키는 그에 힘을 얻은 듯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도 사제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데, 단지 기사단처럼 마물을 잡지 않는다고 차별받는 건 너무 억울해요! 지금까지 얼마나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요?”

비키는 흥분한 어조로 강하게 외쳤다.

“건의뿐만이 아니에요! 가문에도 알려서 이번 일을 수도 전체가 알도록 만들겠어요! 이대로 수긍하며 돌아가는 건 너무 열 받으니까요!”

“비키, 어디서든 의욕이 넘치는구나.”

때마침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투구 속에서도 느껴질 만큼 부드러운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비키는 그의 연한 녹색 눈을 보는 순간 반가워하며 외쳤다.

“숙부!”

“일하는 중이니까 라드라고 불러야지.”

타박하는 목소리조차 온화한 남자였다. 나는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드러나는 머리칼도 눈빛처럼 연한 녹색이었다. 목 뒤로 떨어지는 짧은 머리칼이 매우 잘 다듬어진 느낌이 드는 남자는 침착한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는 꽤 견실해 보이는 기사였다.

그는 멀어지고 있는 기사단장을 잠깐 보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경에서 중요한 작전에 임하다가 갑자기 여기로 불려왔거든. 그래서 심기가 좋지 않아.”

그는 씩씩거리는 조카를 납득시키려는 듯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 자신의 부대가 지원 나가게 될 줄 생각 못 했거든. 이 부대 소속인 나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까.”

“하지만, 숙부.”

비키가 얼른 호칭을 고쳐 불렀다.

“아니, 라드 님.”

“동료를 부르듯이, 그냥 ‘님’자 없이 불러도 돼.”

그는 온화하게 수정해 주었다. 비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선 재빨리 의견을 피력했다.

“설사 자신이 원치 않게 불려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제들을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저희가 시찰하는 건 사제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걸요. 마냥 노는 일도 아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제국민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데!”

비키는 제법 매서워진 어조로 덧붙였다.

“한가한 사제들이라고 말한 건 정말 너무 했어요! 저흰 시찰만 한 것도 아니라고요. 마을을 돌다가 마물을 만나서 이 인원으로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요? 지원 없이 말이에요!”

격해져 내뱉는 음성에는 왠지 모를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시찰단을 이끄는 관리로서, 그동안의 고생이나 고난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감정에 복받치고 만 것일까?

비키가 울먹거리며 눈가를 적셔 가자 라드라 불린 사내는 몹시 당황했다.

“이런, 비키.”

그는 대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비키의 어깨를 얼른 다독였다.

“진정하도록 해. 시찰단을 무시해서 나온 말이 아니니까. 단지 시기가 안 좋았을 뿐이야. 중요한 작전으로 긴장한 상태였는데, 지방으로 갑자기 밀려나게 됐으니까. 누가 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좌천되는 건가 긴장했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 부대는 어제까지.”

성기사는 신중해져서 목소리를 낮췄다.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마, 마족이요?”

비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성기사는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강력한 마족을 상대하느라 황성에서 나이트가 나와 진두지휘했을 정도였어. 아무튼. 상부의 명만 아니었다면 느닷없이 여기로 와서 마물을 상대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성기사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우리를 이쪽으로 급파하라고 한 건가 싶어. 우리 부대는 마물 퇴치로써 제법 유명했으니까. 내 추측은 황성의 그분인데…….”

“그분이요? 아드리아 폐하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목소리가 너무 크구나, 비키.”

성기사는 조용히 하란 듯이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었다.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는 사내는 자신의 조카를 귀여워하는 영락없는 삼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자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기엔 장소가 그다지 좋지 못해서 말이야. 아무리 느긋한 나라도 이런 곳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꺼내기엔 망설여진단다. 그분은 우리의 빛이자 우리를 엘크리찬의 성전으로 인도할 유일한 분이니까.”

라드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조금 더 경애를 담아 좋은 장소에서 그분의 이름을 언급해야 해.”

잠깐이지만 라드의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엿볼 수 있었다. 중앙의 기사라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로 황제를 존경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집중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목 뒤에 임시로 감아 놓은 리본이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아파 왔고, 머리도 어지러워졌으며 갑옷도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찌 됐든 기사단장이 꼼짝 못 하고 이곳에 온 걸 보니, 여기가 뭔가 의미가 있는 지역이라는 거겠지. 앞으로 위험한 격전지가 될 거라든지, 아니면 꼭 보호해야 할 사람이 있다든지…….”

말을 하던 라드가 멈칫했다. 그는 눈이 반쯤 감겨서 몸을 돌리려는 나를 본 상태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말을 잃은 듯이 잠시 머뭇거렸다.

“괜찮으세요? 상처가 상당히 깊은 것 같은데.”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날 보며 물어왔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먼저 치료를 받으러 가 보겠다고 말하려 했다. 비키가 팔짝 뛰면서 반응해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 맞다! 말레드레드! 마물과 홀로 싸우느라 중상을 입었어요!”

비키는 ‘마물’과 ‘홀로’를 강조하면서 라드에게 말했다.

“숙부! 아니, 라드! 이런 큰 부대라면 치료사 사제도 따라다니겠죠? 말레드레드가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서요!”

“그, 그래.”

라드는 비키의 열성적인 태도에 조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나를 보며 손을 뻗었다.

“부축해 드릴까요?”

“……아뇨.”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제안이 고맙다는 뜻으로 미소만 지었고, 라드는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고는 알겠다며 앞장섰다. 나는 그를 따라가기로 했고, 비키는 본대에 전서구를 보내 본다며 사라졌다.

나는 잠깐 라드와 어색한 동행을 했고, 마을로 도착해서는 촌장의 눈물 섞인 걱정과 감사를 받았다. 그리고 기사단을 따라다니는 사제들의 천막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신성력이 발휘됩니다.”

치료하는 사제는 정중한 목소리로 손끝에서 빛을 뿜어냈다. 하얀 빛이 따스하게 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살갗에 난 상처와 목 뒤의 아픔이 사라져 갔다. 나는 눈을 두세 번 깜박였고, 오래지 않아 치료가 끝났으니 가도 좋다는 사제의 말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드가 다가온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라드는 자신도 고개를 까닥였다. 곧 그가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촌장님께서.”

라드는 저 멀리 성기사단 부대를 따라다니며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맞추려고 애쓰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성기사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애틋했다.

“무척이나 걱정하시더군요. 자신을 보내놓고, 마물을 혼자 상대했을 거라고. 덕분에 마을 사람들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는데, 정작 그대는 많이 다쳤을 거라면서요.”

그는 살짝 감동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환사 혼자서 마물을 상대하기 녹록지 않았을 텐데요.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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