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사제님, 사제님.’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던 호칭이 귓가에 울린다. 나는 그들이 던지는 시선 속에서 살았다는 진한 기쁨과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사제들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그들을 지켜 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족, 이웃 모두가 신의 축복 아래 평온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
어찌해야 할까.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이 가장 우선이었다. 내 안위가 나의 가장 큰 고려 사항이었으며 사제로 일할 때도 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도모하려고 했다.
내가 다른 이들과 협동했던 것은 협동이 생존에 있어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약했던 나는 홀로 마물을 처치할 수 없어 다른 사제들과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렇기에 같이 살아남아 함께 마물을 무찌르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일어나야 할까? 사제로서 내 소임을 다해야 할까?
나는 지팡이를 꾹 쥐었다. 나를 향하던 무수한 눈빛.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눈으로 보내오는 감정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살고자, 살아남고자, 남을 믿고 따르는 눈빛을 어찌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살고자, 살아남고자 백작가에서 여기까지 견뎌 왔는데 말이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떨리는 다리를 바닥으로 내리누르면서 복부에 힘을 주자 상체가 조금씩 일으켜진다. 나는 목 뒤로 흘러내리는 피를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마물은 마을로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물을 뒤쫓는 다리에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기운과 의욕이 실려 있었다.
내가 힘겹게 마물을 따라잡았을 때였다. 신성력으로 만든 빛의 공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내 상태를 반영한 신성력의 뭉침은 금방 마물에게 발각되었고, 마물은 내 쪽으로 몸을 휙 돌려서 눈을 치켜뜨며 돌진해 왔다.
나는 마물에게 아직 놓지 않은 부로나 주머니를 휙 던졌다. 그러자 작은 열매들이 날아가 마물의 붉은 눈알에 박혀 들어갔고, 마물은 고통에 차서 몸을 바닥에 둥글리기 시작했다.
“이야압-!”
그때였다. 커다란 검이 위쪽으로 번쩍 빛을 뿜더니 마물 위로 떨어졌다. 뒤를 이어서 다른 검들도 신성력으로 마물을 동강 내기 시작했다. 연달아 신성한 주문이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차원의 문을 만들어 낸다. 나는 순간 얼이 빠져서 그것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말레드레드!”
비키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는 엉망이 된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나를 부축해 왔다.
“괜찮아요? 저 마물을 여태 홀로 상대하고 있었다니…….”
비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안쓰럽기도 고맙기도 하다는 그 눈빛을 보면서 나는 잘 흘러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온 거예요……?”
“네! 촌장님께서 허겁지겁 달려와 외치셨거든요! 다들 깜짝 놀랐죠. 무기를 챙기고, 갑옷을 껴입고, 빨리 달려온다고 달려왔는데, 말레드레드가 그만…….”
그녀는 붉게 물든 내 사제복을 보며 경악과 슬픔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심하지 않은 상처라고 짧게 대꾸했다. 그리고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마물을 응시했다.
“일단 저것을 없애는 게 중요해요…….”
“그렇죠! 보니까 저대로 가면 마을로 곧장 갈 텐데, 큰 피해가 따라오겠죠? 안 그래도 촌장님께서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계세요!”
비키는 말을 전하면서도 내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내 목 뒤의 상처가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머리 리본을 풀어서 상처에 둘러 주었다. 약간 쓰린 느낌이 났지만 상처를 감싸주자 확실히 좋아지는 기분이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비키는 별거 아니란 듯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고생한걸요. 분명 마을을 구하려고 한 거겠죠……. 진실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말레드레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전 정말 슬펐을 거예요.”
비키는 애틋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이내 성기사와 사제들이 마물을 소환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보세요! 이제 소탕이 거의 다 됐어요!”
마물은 몸이 잘려서도 최후의 저항을 하듯 성기사와 소환사에게 잘린 몸통을 굴렸다. 성기사들은 그것을 피하면서 소환사들이 만든 영역으로 몰아갔고, 결국 붉은 눈알들은 모조리 차원의 문으로 빨려 들어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와! 이겼다!”
비키의 환호성을 들으며 나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이 수가 적었기에 망정이지 많았으면 정말 곤란했을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서로 인사를 하고 있던 사제들은 비키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안됐다는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저런, 심하게 다쳤네요.”
“어떻게 해요, 그 예쁜 얼굴이 다쳐서.”
“어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그러게요. 저 정도라면 시찰도 못할 텐데.”
“본대에 연락하는 게 좋겠죠?”
비키는 그들의 말을 하나씩 곱씹듯이 꼼꼼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요! 치료하는 사제가 없으니까 빨리 지원을 보내 달라고 해야겠죠? 아니, 어쩌면 말레드레드만이라도 당장 본대로 돌려보내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말레드레드 생각은 어때요?”
하지만 나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굳어 있던 찰나였다.
“왜 그래요?”
비키는 내가 대답하지 않은 채로 얼어붙어 있자 내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곳에는 마물이 있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붉은 눈을 기이하게 깜박거리면서. 마치 군단이 온 것처럼 수백 개의 붉은 눈알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겁을 먹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으아악!”
성기사와 소환사 모두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십여 마리의 마물이 무섭게 다가오자 나는 비키에게 외쳤다.
“어서, 마을로 달려가서 알려요!”
“아아…….”
비키는 마기를 뿜으면서 몰려오는 마물의 무리에 넋이 나간 듯했다. 공포와 경악으로 질린 눈동자가 얼른 침착해지지 않자 나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찰싹, 쳤다.
“비키!”
“어, 어? 마, 말레드레드?”
이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비키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말했다.
“사람들이요.”
나는 죽음에 대한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한 명도, 하나의 무고한 생명도 살려 두지 않을 마물의 횡포한 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키에게 모든 힘을 다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살려야 하잖아요, 마물로부터.”
“아, 그, 그렇죠! 그래야죠! 어서 갈게요!”
비키는 거의 울먹이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어린 눈가가 공포에 질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순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관리로서의 사명을 느꼈기 때문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것이 큰 위기이며 실수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느낀 건 분명하다. 귀족의 체면이나 관리로서의 체통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죽어라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신성력으로 선을 그어서, 그 너머로 못 오게 방어해요!”
나는 성기사들에게 외쳤다. 경험은 많지 않지만 선두에 서 본 일이 많았던 나는 성기사들이 수가 많은 마물들을 소탕할 때 으레 했던 전술을 떠올려 말했지만 겁에 질린 성기사들은 다가오는 마물들에게 허둥지둥 검을 휘두르기 바빴다.
“으악!”
“조, 조심해!”
상황은 금세 안 좋아졌다. 아군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실력도 충분치 않았다.
‘후퇴하는 게 나을까. 어쩌면 도망가는 것이…….’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저 흉악한 것들을 상대로 몇 초도 버틸 수 없었다.
나는 지팡이를 다시 세웠다. 힘이 풀린 팔이 느껴졌지만 손에서 아까 사용한 부로나의 희미한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들어 와 몸 전체에 묘한 활력을 주고 있었다. 마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고, 네가 가진 것을 활용하라고 말해 주듯이.
“저항선을 만들어요!”
나는 머리에서 스치는 생각을 말했다.
“신성력을 바닥에 쏟아부어요! 넘어올 수 없도록요!”
촉수로 공격하는 마물이 아닌 만큼, 다가올 수 없다면 공격할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시범을 보이듯 마물이 아닌 땅에다가 신성력을 쏘았고, 마물들은 그 신성해진 땅을 밟지 못하고 화를 내듯 괴성을 질렀다.
내 모습을 보고서 얼른 다른 소환사들이 합세했고, 마물들을 겨우겨우 상대하던 성기사들도 따라 했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순 없어요!”
성기사 하나가 마물에게 스친 팔을 부여잡은 채로, 벅찬 듯이 외쳤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단 막았다가 다른 곳으로 유인한다거나 하지 않으면 전멸은 뻔했으니까.
“말레드레드!”
그때, 마을로 갔다고 생각한 비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뒤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선두에는 신성국의 성스러운 깃발이 요란하게 휘날리고 있었고, 기사들은 하나 같이 빛나는 대검을 높이 든 상태였다.
“지, 지원군이다!”
팔을 다친 성기사가 감격해서 외쳤다. 비키는 ‘중앙에서 오셨어요!’ 하고 크게 덧붙였고, 우리는 곧 마물들을 매섭게 상대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기사단으로만 구성된 부대. 그들에게 마물들은 소환 영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갈기갈기 찢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대검에 맺힌 신성력이 마물을 향해 쏟아질 때마다 마물들은 극악한 비명을 질렀고, 눈알을 혼란스럽게 껌벅였다. 수십 개로 잘려도 죽지 않는 마물들은, 성기사들의 끈질긴 공격에 마침내 넝마로 변해 죽어 갔고, 성기사들은 굳어 버린 눈알에도 검을 쑤셔 넣어 온전한 상태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다.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선두에 선 기사단의 단장은 투구 속에서 사무적인 눈빛을 빛냈다. 나이가 상당히 있어 보이는 그는, 성기사들이 마물을 신성력으로 태워 버리는 것을 잠깐 바라보고는 우리 시찰단을 향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