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39화 (39/220)

39.

“안 돼.”

마왕은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그녀는 내 거야.”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끝나자, 마왕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 나왔다. 빠르게 날아간 그 마기는 주변에 소환된 마물들을 덮어 버렸고, 마물들은 하나같이 괴로운 듯 몸부림치다가 사라져 버렸다. 촉수 하나 남기지 않고.

“…….”

마왕은 아무 말 없이 잔뜩 일그러진 내 눈가를 바라봤다. 그곳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마물은 싫어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쾌락에 젖고 욕망에 몰입하고 싶지만 마물과 그리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절대로.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선택한 쾌락에 빠져들고 싶었다. 까다롭고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그러한 존재여서 그러고 싶다는 거니까.

따라서 나는 참담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고 싶어요…….”

마왕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보는 눈은 고요했으며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일렁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지 않은 채로 간절하게 말했다.

“보내 주세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

창문 너머로 시찰단과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노랫소리, 악기 소리가 아련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사라진 시야엔 통나무로 엮은 평범한 천장만이 보였다. 어디에도 마왕의 성을 상징하는 사악하고 그악한 문양은 없었다.

‘다행이다.’

내 세계에 있음에 안도했다. 마물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에.

나는 잠시 몸을 수그렸다. 신을 떠올리고, 온기를 떠올린다. 그리하여 손끝에 하얀 신성력이 맺혀 들자 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울컥했다.

***

다음 날, 우리는 세 번째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이어진 환대 자리에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한 몇몇 성기사와 소환사들이 하품을 길게 내질렀다. 그러다가 앞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곤 했다.

“……해서요, 마을 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기사 부대가 오게 될 거예요. 마지막 날에 우리와 만나지 않을까 합니다.”

비키는 새벽녘에 중앙과 전서구를 주고받았던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덧창으로 숲과 초원의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 평화로운 장소에 마물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게 검게 변한 대지란 참혹할 뿐일 것이다.

“……레드! 말레드레드!”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깨닫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키였다.

“무슨 생각을 해요? 여러 번 불렀는데.”

그녀는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물어왔다. 어젯밤 마왕의 성에서 마왕과 섹스를 하다 마물에게 능욕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순수하게 할 수 없었던 나는 멋쩍게 웃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성기사 부대가 온다고요?”

“네! 제 요청만은 아니고, 이미 그런 요청이 많았다나 봐요. 이곳에 마물들이 자주 출몰해서 인근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있다고요! 그래서 기사단을 보내서 철저하게 조사해 볼 생각인가 봐요.”

그렇다는 것은 우리 본대에도 어떤 변화가 온다는 이야기일까? 성기사 부대라면 주둔하는 장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만큼 이 근처를 책임지고 있는 우리 본대가 그 장소가 될 가능성이 컸다.

카란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데, 문득 비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기사단에 누가 포함된 줄 알아요?”

“나이트요?”

“아뇨. 저희 숙부요!”

나는 활짝 웃는 그녀를 보면서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그녀는 숙부에게 나를 소개해 줄 꿈을 버리지 못한 걸까.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전 아직 누굴 정식으로 만날 생각이 없어서요.”

단호한 내 말에도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만나만 봐도 되잖아요. 혹시 알아요? 자꾸 보다 보면 연심이 생길지. 더구나 소환사와 성기사라고 하면 사제의 두 꽃이잖아요! 그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상상만 해도 즐거워요!”

그녀는 어떤 분홍빛 광경을 선망하는 듯했다. 아름답고 정숙한 은발의 소환사와 건장하고 신실한 성기사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나는 황홀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잠깐 신부 복장을 하고 있는 내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쉽게 연상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옆에 누가 서 있을지는 아예 깜깜했다.

‘어쩌면 아무도 서 있지 않을 수도 있지.’

나는 소환사 말레드레드로 평생 훈련소에서 일하며 홀로 지낼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쾌락을 위해 선택한 남자들을 만나고 즐기면서.

‘……따라다닐 거예요, 평생.’

나는 어떤 기억이 떠오름에 멈칫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편린.

나는 마왕의 성을 방문한 후유증을 여전히 겪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 마물이다-!”

기겁한 마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로부터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마차에서 내렸다. 졸고 있던 성기사와 소환사들도 따라 내렸다. 그들은 장식용처럼 보였던 무기를 꺼내 들었고 지팡이를 쳐들었다.

비키는 맨 뒤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마차의 앞을 막고 있는 회색빛 괴생명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나죠?”

“지, 진짜 마물이잖아? 끔찍해…….”

나는 얼이 빠져서 중얼거리는 그녀를 날카롭게 불렀다.

“비키!”

“아, 네, 네.”

“저번에 말했던 대로 진영을 전달해요.”

내 말에 비키는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서둘러 확인했다. 하지만 당황했는지 손길은 성급했고 서류가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나는 마물을 보았다. 그 시간에도 마물은 우리 쪽을 향해 갈퀴 같은 팔을 뻗었다. 앞선 성기사 둘이 얼른 쳐냈지만, 문제는 떨어진 조각들이 금세 또 하나의 마물로 자라났다는 점이었다.

“세 마리로 늘어났다!”

머리가 멋진 성기사가 질겁하여 외쳤다. 그들은 재빨리 신성력을 피워냈지만 마물이 뿜어내는 마기가 더 강력해서 신성력은 눌리듯 희미해졌다.

“아, 찾았다!”

비키는 재빨리 서류를 찾아내고 사제들에게 말했다.

“성기사 1, 2는 앞으로, 3은 마물의 뒤쪽으로 가요! 그리고 왼편으로 모는 거예요!”

비키는 손가락으로 그게 누구인지 지시했다.

“어, 그리고 말레드레드가 소환 영역을 그리는 동안 소환사 2, 3은 신성력을 보충해 주고, 그 뒤 소환 영역을 그리는 것에 합류해 차원의 문을 유지…….”

퍽! 마물의 입에서 시커먼 액체가 쏟아지자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비키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고, 나는 마물이 비키를 노리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재빨리 예전에 펠에게 배웠던 것을 만들었다.

불안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것은 금세 마물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고, 마물이 끔찍한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듯 달려드는 그 그악한 생명체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곧 성기사들이 비키가 말한 진영을 이룬 채 다가왔다. 그들은 자신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마물을 신성력을 올려쳐 가며 다시 범위 안으로 밀어 넣었고, 머리가 멋진 성기사가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서 소환 영역을……!”

나는 소환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소환 영역을 반도 그리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소환 영역을 그리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두면 틀림없이 잘못 열린 차원의 문으로 마물을 엉뚱한 땅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지팡이를 쥔 손으로 내부의 온기를 모조리 끌어들이고자 하면서.

환한 빛. 오로지 그 선명한 빛 하나가 나를 이끈다. 나는 그 빛의 종이었고, 온기의 전사였으며 신의 힘으로 싸우는 사제였다.

나는 곧 나를 따라서 소환 영역이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소환사들이 재빨리 나를 곁눈질하고는 내가 그리는 것을 따라서 주문을 외워 왔다. 찬란한 빛이 지팡이에서 빠져나와 소환 영역에 흡수되자 차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외쳤다.

“지금이에요!”

“이야아압-!”

성기사는 뜻밖의 큰 함성을 내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물을 검으로 쳤다. 다른 두 성기사도 각각 한 마리씩 맡아서 마물들을 소환 영역으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그것들이 모두 차원의 문에 도착해 사라져 버리자 정적이 찾아왔다.

“와…….”

숨소리만 들려오는 그 공간에서 누군가 기쁜 탄성을 터트렸다.

“이겼다! 우리가 이긴 거죠! 무찌른 거죠? 정말 대단해요!”

비키는 두 손을 쥐고 깡충깡충 뛰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소녀 같은 반응이 귀엽다 싶은데 다른 소환사와 성기사들도 서로의 손을 맞잡고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함성을 냈던 성기사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도 신경 쓰지 못한 채 비키를 보며 말했다.

“침착하게 지휘해 줘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솔직히 이런 작전을 짤 줄 몰랐는데.”

소환사가 비키를 보며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비키는 그 말에 흠칫하고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전부 말레드레드가 한 거예요.”

그러자 여섯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카란의 충고 덕분이었어요. 미리 조심하라고 해 준 덕분에 대비할 수 있었어요.”

나는 말을 이어 가며 비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키가 첫 전투를 잘 지휘해 준 덕도 크고요.”

“과찬이세요, 말레드레드.”

비키는 처음 겁먹었던 저 자신이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이번 전투의 승리를 모두의 공으로 돌린 다음, 마물이 사라진 깨끗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청소는 딱히 필요 없겠어요. 이제 다음 행선지로 갈까요?”

“네!”

비키와 사제들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마차에 올라타자 우리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전 비숍이라고 해요.”

“전 켈리예요. 작센에서 왔어요.”

“전 리비누에서 왔어요. 이름은 페드로고요.”

서로의 이름과 지역을 공유하며 첫 전투를 함께 치른 동료로서의 의미를 돈독히 했다.

나는 짧게 내 출신 지역 정도만 말했고,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이나, 수녀원에서 살았다는 이야기 등은 일체 하지 않았다.

비키는 완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다들 수도로 놀러 오세요. 아니, 제가 초대할게요! 일레그레 가문은 사제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곳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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