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36화 (36/220)

36.

나는 아찔해하며 테라스가 절로 열리는 걸 보았다.

저 멀리 검게 치솟은 산이 보인다. 마왕은 내 허벅지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설명했다.

“마르우르의 산이지. 저 산에는 늘 저런 아름다운 화염이 치솟고 있어. 생명이란 굉장해서 저런 곳에서도 살아가는 녀석들이 있다.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독특한 생김새의 마물과 마족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흐읏, 아, 앗……!”

“보이나? 보랏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환상적인 잿더미가. 그 가루를 맞으면 나의 축복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는 마족들도 있어. 이 세계는 나와 일체를 이루니까.”

“아흥, 읏, 으……!”

나는 그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자신의 마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것이 내 안을 푹푹 찔러대는 감각에 눈앞이 흐려져서 오로지 쾌락만 떠올렸지만 그는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설명을 끝낸 그가 내 귀에 나직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대와 함께 보니 이 광경도 이상하게 더 유쾌하게 다가오는군.”

“…….”

“신기한 일이야.”

마왕은 은근하게 속삭이며 내 귓불을 뒤에서부터 빨아왔다.

“으, 으읏…….”

나는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배 속을 찔러오는 그의 성기도, 내 귀를 빨아대는 그의 입술도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하듯이 내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

나는 오래지 않아 절정에 달해 몸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벌써 지치면 안 되지.”

마왕은 한 손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나는 그 길고 단단한 손가락에 잡혀 있는 분홍빛 살을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마왕이 자극적으로 만지고 있는데도 왠지 힘이 나지 않았다.

“조금 쉬었다가 할까.”

보내 준다는 말이 왜 이리 안 나오는 걸까. 나는 그를 힘겨운 눈으로 바라봤다. 마왕은 고개를 아래로 비틀어 나와 눈을 맞췄다.

“왜? 가야 하는 시간인가.”

나는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시찰을 나가게 된다. 선두에 서는 만큼 기력이 없는 얼굴은 사람들의 의아한 관심을 사게 될 터였다.

마왕은 내 얼굴에 떠오른 걱정을 읽었는지 순순히 내 안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아읏…….”

나는 성기를 따라서 가득 채워져 있던 체액들이 빠지는 소리도 들었다. 꿈틀거리며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나를 보면서, 마왕은 무언가를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아주 부드럽고 예쁜 천이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보자 마왕은 그 천으로 몸을 닦으라 했다. 내가 굳어 있자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직접 닦아 줄까?”

“아뇨.”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젓고는 젖어 있는 허벅지와 다리를 집중적으로 닦았다. 마왕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비싼 천인 거 같은데.”

나는 체액으로 더럽혀진 천이 염려되어 말했다. 마왕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덧붙이면서.

“그대보다 값어치 있진 않아.”

“……!”

“그럼 내일도 보자고.”

마왕은 평소처럼 웃었다. 음험하고 기괴하게. 그럼에도 나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나는 다행히 그가 덮었던 천은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나 빨아 오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 진짜 문제가 되는 건, 그런 값비싼 천을 사람들이 보았을 때 어디서 구했느냐고 묻는 거겠지.’

나는 마왕을 떠올렸다. 그가 나를 탐하던 방식과, 내 귓가에 속삭이던 내용과, 내 부탁을 순순히 들어준 행동을. 그것은 그가 온순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나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

자고 일어난 후, 나는 서둘러 대기하는 장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미 그곳에는 두 명의 소환사가 나와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성기사들도 보였다. 인원이 몇이나 모여서 갈까 궁금해졌는데,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연갈색 머리칼을 반 묶음으로 틀어 올려 진주알이 엮인 핀을 머리 가장자리에 우아하게 두르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예쁜 인상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약간 상기된 볼을 하고 우리를 마주 보는 그녀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했고,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듯 긴장이 서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잠시 날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허둥지둥 손에 든 종이를 살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말레드레드예요. 소환사고요.”

내 말에 그녀는 야무지게 깃털 펜으로 내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녀는 재빨리 나를 훑었다.

“이미 복장은 갖추고 오셨으니 따로 입으실 건 없고……. 어, 선두에 서시기 때문에 기를 들어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녀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깃발이 무게가 있어서 그러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물었다.

“온종일 들어야 하나요?”

“아뇨. 마을에 도착해서 광장을 돌 때까지만 들고 있으면 돼요.”

“그럼 괜찮을 듯합니다.”

“좋아요. 만약 무거우면 말해 주세요. 다른 분에게 돌아가며 들게 할 테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아뇨, 제가 당연히 신경 써야 하는 일인걸요…….”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어쩐지 중앙의 고리타분한 관료 같지 않았다. 아직 싱그럽고, 풋풋한 사교계의 아가씨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열 명 정도의 소환사와 성기사들이 모이자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황성에서 온 비키 일레그레라고 합니다. 편하게 비키라고 부르세요. 전 이 일을 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위대한 황제 폐하와 성스러운 신의 지도 아래 맡은 임무를 가문의 명예를 걸고 성실하게 해 나갈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환사와 성기사들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의욕 넘치는 그녀는 사제의 이름과 복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여섯 명이 더 모이자 다 왔다며 우리가 탈 마차로 직접 안내했다.

“말레드레드.”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카란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로 절뚝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얼른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잔소리 같겠지만, 충고는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는 사제들을 지도하는 젊은 관리를 보며 불안하게 눈초리를 가늘였다.

“역시 중앙은 이곳을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고 판단하고 있군.”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이곳은 마물이 출몰하는 최전선이 아니었으며 수도에서도 떨어져 있어 마물이 위협할 만한 사람의 수도 많지 않았다.

꾸준히 관리가 필요한 지역으로 본대가 와 있는 만큼,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란이 굳이 그 말을 한 게 관심을 끌었다.

그는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요새 마물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출몰 주기도 짧아졌지만, 마기 역시 예전보다 많이 품고 있지. 그런 때에 이 근방에 마족이 나타나 마기를 보충하는 일까지 벌어졌어.”

소환사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 듯,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 요즘이라면, 자네가 가는 마을에도 얼마든지 강력한 마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거야.”

“주의할게요.”

“그래. 자네는 지금 행진을 위한 동료들과 가는 거니까.”

카란은 불안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반반한 외양과 훌륭한 자태였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선 얼마나 유용할지 회의적이라는 얼굴이었다.

“겉모습만으론 마물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

“저번에 못다 한 말은 이만하도록 하지.”

카란은 그렇게 할 말만 하고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떠나갔다.

“말레드레드의 상관이에요?”

마차는 세 명과 네 명이 마주 보고 앉았다. 비키는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카란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양인지 스스럼없이 물어왔다.

나는 제법 다정하게 구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빤한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그녀가 쑥스러움이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궁금해서요. 저렇게 다정하게 배웅 나온 상관을 보지 못한 터라…….”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 주셨어요.”

나는 솔직하게 밝혔다. 카란의 경고는 나를 걱정해서라기보다 시찰단이 마물의 습격에 전멸하게 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소환사로 오래 싸워 왔고, 그 때문에 육체적 능력도 잃은 그는 지금 행진을 나가면 위험하리란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듯싶었다.

‘물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굳이 나와서 이야기했다는 건…….’

그럼에도 내가 다칠까 봐 조금은 걱정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카란의 마음 씀씀이를 떠올리고 비키를 바라봤다. 그녀가 우리를 지휘하는 만큼 그의 충고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요새 마물들이 강해져서 자주 출몰하니, 시찰하는 곳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하더군요.”

“와아. 정말 전사다운 충고네요! 예전에 마물을 잡았던 분이셨나 봐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비키는 살포시 웃었다.

“전 사실 마물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어서요. 아직도 소환사나 사제라는 말보다 동화책에 나오는 전사라는 단어가 익숙하고요.”

나는 그 말에서 이번 시찰이 그녀에게 버겁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이번 일 때문에 주위에서 염려를 들었음을 이야기했다.

“가문에서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해서, 들떠서 뛰어들었는데, 들어오자마자 이곳에 홀로 발령이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가족과 사교계의 친구들도 무척이나 걱정했어요.”

나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일레그레 가문은 대대로 성기사를 배출했던 가문이 아니었나요?”

“저희 가문을 아시는군요!”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수도 가문에 식견이 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른 물어왔다.

“귀족이시죠?”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자 그녀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이내 작은 새가 조잘거리듯 설명했다.

“맞아요. 저희 조부도 성기사였고, 저희 숙부도 성기사이셨죠. 저는 성기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마물이나 임무는 모르고 자랐어요. 무섭고 험한 일이라고, 다들 제게는 그런 일들을 멀리하라고만 했거든요. 숙부를 자주 뵈었지만 신성력은 본 적이 없을 정도예요.”

나는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어디서부터 연유했는지 알아차렸다. 온실 속의 귀한 꽃처럼 자라났을 것이다. 가문은 그녀에게 세계를 비트는 마물이 있다는 것도, 그들이 폐허로 만드는 도시가 있다는 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어요?”

“저요? 물론 괜찮죠! 이번 일은 아주 쉬운 거라고 했어요! 잘생긴 성기사와 소환사들을 데리고 마을을 도는 행진, 아, 아니, 시찰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녀는 의욕으로 가득 차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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