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빛의 세계. 그는 내가 마주한 세계를 유리성처럼 연약하고 눈부시다 했다. 마치 잘못 건드리면 한순간에 깨져 버릴 값비싼 장난감처럼 무의미하다고 본 것일까. 아니면 신을 모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 그런 비유를 한 것일까.
‘전자이든 후자이든 상관없어.’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켜 준다면.
실제로 나는 조금 전, 길고 난잡한 정사를 끝낸 몸이 무척이나 말끔하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론이 없으니 당분간 마음 편하게 만나도 되겠지.’
마음 편하게. 왜 그 단어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금발의 사내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전에 얼른 씻고 나왔다. 잠이 드는 건 금방이었다.
***
새벽녘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상을 알리는 청아한 나팔소리가 아득하게 퍼지면 어스름에서 끌려 나오듯이 눈을 뜨게 된다. 아침 햇살이 따스한 빛을 천막에 던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더 쉬면 좋았을 텐데요.”
훈련소로 가는 길에 레너드를 만났다. 그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레너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음, 왠지 잠을 못 자서요.”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묻고 있는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혹시 그가 힘의 비정상적인 분출로 마계로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 것이다.
내 망설이는 듯한 질문에 레너드는 별거 아니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소음 때문에요. 같은 훈련소를 나온 성기사의 숙소가 제 숙소와 아주 근접하게 붙어 있는데, 그 숙소에서 이상한 소리가 밤새 흘러나오더라고요.”
레너드는 약간 짜증이 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침대를 옮기는지 계속 덜컥거리는 소리가 나고, 힘든 훈련이라도 하는지 헐떡이는 소리가 끝없이 들려와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아.”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나하고는 달리 레너드는 심각하게 말을 이어 왔다.
“평소엔 훈련도 잘 안 하는 녀석이 왜 밤에 그럴까요? 아무래도 주의를 줘야겠어요. 작작 좀 하라고요. 밤에 그러지 말고 환한 대낮에 사람 다 보는 데서 하라고요.”
“음…….”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조언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와 사이가 안 좋아질 거예요.”
“네?”
“그러니까, 그는 훈련을 하는 게 아니란 거예요.”
레너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사를 가려는 걸까요? 어디 다른 숙소로?”
“제 말은, 그 일은 발라 잎사귀와 관련이 있다는 거죠.”
“네? 그거랑 이게 무슨 연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레너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것이다. 나는 그의 주근깨 위로 붉은 기운이 확 올라오는 것이 신기했다.
“이제야 알았군요.”
“아아아, 정확히 알았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볼을 긁적이며 마구 부끄러워하던 청년은 흠칫하며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상한 말로 괜히 말레드레드까지 불편하게 했네요.”
“괜찮아요.”
“아, 아니에요. 제가 예의가 없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숙녀에게 하는 게 아닌데.”
“숙녀이기 전에 이곳의 선배인걸요.”
나는 미소 지었다. 다정하면서도 분명한 미소를.
“모르고 물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일은 왕왕 일어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돼요.”
남녀의 밤일에 관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쓸데없는 싸움이나 오해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내 충고에 레너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럴게요! 사실 들어본 적은 있는데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서…….”
내가 빤히 바라보자 레너드는 더욱 당황했다.
“아, 아니, 제 말은, 제가 관음증이 있는 것처럼 훔쳐봤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요, 그, 그러니까, 그런 일을 처음 맞닥뜨렸다는 의미에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변명하는 그의 모양새가 너무나 절실하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깔깔거리며 웃자 레너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한여름의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고, 나는 괜스레 웃었던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상냥하게 조언했다.
“너무 시끄러우면 밤에 노래를 불러 봐요. 그럼 상대도 알아차리고 조심해 줄 거예요.”
“정말 좋은 방법이에요! 굳이 어색하게 대면할 필요도 없겠어요!”
레너드는 맘에 든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나는 그런 그가 편했다. 사소하고도 평범한 대화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와 사이좋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훈련소까지 걸어갔다.
“성기사와 사이가 좋네요.”
‘스스로가 어떤 모습인지 돌아봐라’라고 쓰여 있는 거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에일이 얼굴을 들이민다. 그의 눈은 독이 오른 뱀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그를 무시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같은 팀인 채로 훈련해야 하는 만큼 적의는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대꾸했다.
“네. 함께 싸워본 적이 있어서요.”
“그렇게 성기사들만 신경 쓰고 다니면 나중에 좋은 꼴은 못 볼 거예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미소 지은 채였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비뚤어져 있었다. 아무리 얌전한 척하려는 나라도, 참을 수 있는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에게 지난날의 원망이 남아 있었으므로 말이 곱지 않게 나갔다.
“왜요, 직접 나쁜 꼴이라도 보여 주시게요?”
“마, 말레드레드!”
“직접 해코지라도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 해서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무슨 말이죠?”
인상을 완전 구겨 가며 대꾸하려던 에일이 갑자기 끼어든 성기사에 멈칫했다.
“누가 말레드레드에게 해코지를 한다고요?”
옆에서 자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레너드였다. 그는 귀가 번뜩 뜨인 사람처럼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큰 목소리에 살짝 떨어져 있던 자크와 렐까지 반응했다.
“뭐? 누가 누굴 해코지해?”
“동료를 해코지하는 정신 나간 녀석이 여기 있다고?”
자크와 렐이 제법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다가오자 에일은 윽! 하고 낮은 신음성을 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가 버렸다.
레너드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같은 팀인 거 같은데.”
나는 에일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정말 어쩌자는 것일까. 저번 소거 작전 이후로 나에게도 적대심을 가진 게 분명한데. 나는 펠도 없고 에일도 등을 돌린 팀에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레너드와 자크, 렐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카란에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팀을 바꿔 달라고 해요.”
자크가 조언했다.
“거지 같은 녀석하곤 훈련을 못 하겠다고.”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전에 렐이 거들었다.
“막 억지 부리면 들어줄 거예요. 예전부터 카란은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유명했거든요.”
“맞아.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녀석이었지.”
자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왔다. 그는 갸웃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별명이 뭐였더라? ‘비 오는 날 꽃이 떨어진 걸 보며 울고 있는 곰’이었던가?”
“아니야. 분명 ‘비 오는 날 젖은 강아지를 보며 슬퍼하는 너구리’였어.”
“…….”
나는 어쩐지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곰과 너구리가 나온 시점에선.
레너드가 눈매를 좁히며 그들을 추궁해 왔다.
“지금 그거, 둘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거죠?”
그러자 두 남녀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엄연한 사실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두 선배 소환사를 보니, 나는 새삼스럽게 카란의 젊은 시절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졌다.
***
나는 훈련소를 나와 카란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는 웬일인지 자리에 없었다. 바쁜 업무의 상징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서류 뒤로 보이는 낡고 닳은 의자는 그의 고생과 헌신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는 일에 시달리는 행정관이었고,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료였으니까.
“이런, 언제 와 있었지?”
나는 지팡이를 절뚝거리며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손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펠 때문에 왔나 보군.”
나는 그를 바라봤다. 내가 미약하게나마 놀란 것을 봤는지 카란은 가늘어진 눈으로 다시 물었다.
“아닌가? 그럼 이번 특별 임무 때문에 온 거야?”
“무슨 특별 임무요?”
카란은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뒤에 두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지쳤다는 기색이 느껴지는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것 때문에 온 것도 아니군.”
카란은 상자를 가리켰다.
“특별 임무. 근처 도시에서 사제들에게 행진을 시킬 거야.”
“행진이요?”
“그래, 불안해하는 제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라는 거야. 말은 그럴싸하게 시찰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행진이나 다름없어. 사제복을 갖춰 입고서 저 상자 안의 신성국기를 높게 든 채로 웃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라는 것이니.”
카란은 기가 막힌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 상자를 전달해 준다고 중앙에서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네. 신성한 국기는 함부로 취급될 수 없다고, 얼마나 깨끗이 하라 설교와 경고를 번갈아 하던지.”
카란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가 이야기한 건, 마을 사람을 어떻게 안심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것도 아니야. 오로지 깃발에 흙먼지가 안 묻게 하라는 것뿐이었지. 중앙 관리에게 나는 멍청이가 아니니 그만 좀 닥치라고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네.”
카란은 거칠게 불만을 터트렸다.
“그 거들먹거리는 태도 하며, 허례허식에 얽매인 정신 하며. 분명 마물 전투 현장에서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는, 말만 앞서는 귀족 녀석이겠지. 향수 냄새부터 지독했으니까!”
나는 질렸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고역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생을 싸움만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마물과 싸우며 생사를 넘나든 그에게 중앙 관리의 사소하고도 하찮은 집착은 우스워 보였을 것이다.
카란이 조금 더 정치적인 인물이었으면 그러려니 하며 넘겼겠지만 아쉽게도 눈앞의 은퇴한 소환사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징글징글하군. 전투도 한 번 안 해 본 녀석에게 명령을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지겨워.”
나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카란은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멈칫하고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