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31화 (31/220)

31.

“마왕이시여! 인간들의 저항이 날이 가면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인간계로 흥분해서 떠났던 마물들이 소환 영역으로 돌아와 다시 우리 대지에 쌓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아십니까? 벌써 시체의 산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 목소리는 강하고 굵었다. 곧 누군가 받아쳤다.

“인간들이 강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약해진 겁니다! 이상하게 우리의 힘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날카롭고 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다음 말을 빠르게 이어 나갔다.

“우리의 힘을 강화하려면, 다른 생명의 힘을 뺏거나 새로운 힘을 우리에게 종속시켜야 합니다! 인간들의 목숨을 대거 취하거나 그들과의 계약을 강화하거나 하는 방법으로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굵은 목소리가 반론했다. 날카로운 목소리도 지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시체의 산을 치우고만 있자는 겁니까!”

그때 앞의 두 목소리와는 다른, 요염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리지 않은 성숙하게 영근 목소리.

“나는.”

곧 들려오는 마왕의 낮은 목소리.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이 재미없는 토론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왕이시여!”

“위대한 존재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바를 말해 주셔야 저희가 그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굵은 목소리와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자가 외쳤지만 마왕은 말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다독인 자는 뜻밖에도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자였다.

“이만 가도록 하지요. 왕께서는 하실 일이 있으신 듯 보이니.”

이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어째야 하나 두려워졌다. 혹시라도 그들이 이곳으로 다시 나오는 건 아닐까 싶어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지팡이도 없고, 이렇다 할 방어구도 입지 않았다. 이곳은 마계, 그들의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죽고 말 거라며 허겁지겁 원래 있었던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곳에 도착해 있는 인영을 보며 기겁했다.

“아악!”

내 놀란 모습에 마왕이 입가를 올렸다.

“내 방에서 나를 보고 소리 지르다니.”

마왕은 눈을 가늘였다.

“도둑이 주인을 보고 놀란 격이 아닌가.”

“어, 어떻게…….”

“나는 마왕이고, 이곳은 내 성이지. 내가 설마 단순히 걸어서만 이동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문밖에 서 있던 그대의 기척을 못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거나.”

나는 그의 다리 주변에 검은 기운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밤하늘처럼 아름다웠고 한편으론 폭풍우처럼 거칠었다. 그 기운이 마왕을 감싸자 어느 순간 그가 내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읏.”

마왕이 내 턱을 잡아 바짝 끌어당기자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대,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데. 이유가 뭐지?”

“마, 마물 전투에!”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상태로 그를 노려보았다.

“검은 기운을 숨겨서 보낸 거, 당신이 그런 거예요?”

“이미 답을 확신하면서 묻는 이유가 뭐지?”

그는 이런 내 태도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나에게는 삶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에게는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는 그 느긋한 모양새가 화를 치밀게 했다.

“우리 관계는 이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나는 치솟는 짜증을 이성적인 목소리로 내리누르고 싶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서고 곱지 않은 목소리가 나갔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죠? 용납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면?”

마왕은 내 턱을 더욱 끌어당겼다.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면?”

“아, 아읏…….”

어느새 그의 한 손이 내 옷 속으로 파고들어 내 봉긋한 살을 의미심장하게 쥐고 있었다.

“어쩔 셈이지?”

“……읏, 그, 그만.”

분홍빛의 예민한 곳을 쓸어대는 야릇한 손길에 나는 그를 밀어 버리고자 두 손을 힘껏 떨쳐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두 손목을 한 손으로 낚아채 위로 아무렇지 않게 올려 버렸다. 마치 작살에 꿰인 고기처럼 나를 잡아 벽에 밀치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읏.”

눈가를 왈칵 찡그리자 마왕의 시선이 내 눈으로 향했다. 그는 내 괴로워하는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의 힘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살펴보는 이처럼.

“용납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전에, 그대는 누구에게 화났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뭐라고요?”

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내 분노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니. 누가 뭐래도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러 나를 곤란스럽게 한 자는 그가 아니던가.

내가 어이없어하자 마왕이 말했다.

“그대는 내가 마기를 숨겨 보낸 거로 화를 내고 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나와의 관계를 허락한 것은 그대 아닌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그대가, 내 행동을 전혀 예상했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말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된다고?”

붉은 눈이 빛났다.

“마왕에게 용납이라는 단어를 쓰고도 살아 있는 인간이 누가 있지? 나와 몸을 섞고 있는 그대밖에는 없을 테지. 마족이라 할지라도 내게 용납이란 함부로 단어를 쓸 수 없어. 나는 마계의 왕이며 그대가 믿는 신의 유일한 맞수니까.”

“……!”

“이런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마왕에게 용납이란 말을 감히 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나는 말문이 막혀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의 차갑고 가시 같은 말은 머릿속을 찔러 왔다.

“그러니 생각해 보도록. 그대가 화가 난 대상이 진정 나인지, 아니면 그런 결과가 올 것을 알고도 쾌락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자신인지.”

나는 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 안의 시커먼 욕망들이 검은 진액이 되어 나를 뒤덮는 기분이었다.

“잔인하겠지만 냉정하게 분석해야 해.”

마왕의 숨결이 뺨에 닿았다. 낮고 은근한 목소리와 함께.

“그래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서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

“……저는.”

마왕의 눈이 나를 향했다. 떨고 있는 나를 향한 그 시선은 화가 나 있지도, 흥분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요하고 침착하다. 마치 나란 여인이 어디에 서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나는 그 모든 현상을 꿰뚫는 듯한 눈이 싫어서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소환사예요. 신성국의 사제……. 그런 저에게 이 유희는 신선했고요. 너무 좋았어요.”

사실이었다. 그가 내 은밀한 욕망을 알아채고 그것을 발굴하듯이 나를 이리저리 탐해 오는 게 무척이나 짜릿하고 기뻤다.

“하지만 이것이 제 소환사로서의 자리를 위협한다면.”

나는 눈을 떴다. 붉은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은 내 모든 것을 간파할 것처럼 예리했으며 한편으론 나를 완전히 파괴할 만큼 강력했다. 나는 그 눈을 보며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내 욕망을 내보인 것처럼, 내 속마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이어 나갈 자신이 없어요.”

“너무 단정 짓는군.”

나는 멈칫했다. 왠지 마왕의 말이 누군가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아론.’

그가 이 뒤에 한 말이 무엇이었더라? 그도 나도 육체관계 이상을 원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었던가?

나는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천천히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서 내 턱을 잡았다. 야수가 움직이듯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입술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들어 올리면서.

“이제 시작인데. 성급한 판단은 일러.”

그의 다른 손이 내 목을 쥐어 왔다. 마치 가닥가닥 친 거미줄에 붙잡힌 먹이처럼 나는 그에게 턱과 목을 잡혀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마왕이 말했다.

“나는 지하 세계의 군주고, 여전히 내 유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지만.”

마왕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났다.

“그대를 존중해 줄 순 있다.”

“네? 으, 읏…….”

턱과 목을 옥죄는 손이 교모하다. 그것들은 은근히 내 살을 매만지며 거기서부터 열감이 피어오르도록 문지르고 있었다.

“그대가 그대의 세계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듯하니.”

마치 나를 위해서 기꺼이 배려하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눈가를 흐리며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물었다.

“존중이라니, 그게 어떤 의미예요?”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빛의 세계. 그 유리성처럼 연약하고 눈부신 세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야.”

마왕은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이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온화한 말투와는 달리 붉은 눈은 암담하고 위험했다. 마치 촉발하기 전의 불꽃이 처음엔 서서히 타오르는 것처럼. 나는 그 불꽃에 어느 순간 잠식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졌다.

“유리성…….”

나는 그의 표현 중 하나를 중얼거렸다. 마왕은 슬쩍 웃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비유가 아니냐며. 나는 그의 표현에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당장 확인이 필요했다.

“건드리지 않겠다는 건, 앞으론 마기를 숨겨 보내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래. 아주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의 세상에 관여하지 않겠다. 마기도, 이상한 방울도 함께 보내는 일이 없을 거야.”

나는 순간 멍해졌다.

“아, 아주 필요한 경우라 하면…….”

“내 목숨을 위협받거나 내 세계를 위협받는 경우가 그에 해당하겠지.”

마왕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이 정말 나를 존중해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그걸 바라며 소리친 거지만 그가 선뜻 수긍하고 나오니 어쩐지 당혹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누굴 못 믿는 성격이었나.’

나는 마왕을 바라봤다. 아마도 상대가 사악하고 잔인하다고 소문난 이라서 그럴 것이다. 내가 복잡한 눈으로 보고 있자 마왕은 짤막하게 말했다.

“이제 대화도 슬슬 지루해지는군. 본래 우리의 목적을 달성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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