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9화 (29/220)

29.

제법 빠른 속도였다. 나는 내 머리가 뒤쪽으로 흩날리는 것을 느꼈다. 바람은 여전히 상쾌했고, 꽃이 물든 대지는 화사하게 스쳐 갔다. 그런데도 가슴은 서늘해져서 그런 것을 못 느끼는 양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은 그렇게 말을 10여 분 더 몰아서야 멈췄다.

“여긴…….”

둔덕을 넘기 전에 아론은 방향을 틀어 작은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졸졸 흐르는 냇가가 있었고, 그 냇가 너머엔 사냥꾼들이 임시로 지내는 듯한 허름한 나무집이 있었다.

나는 나무집 주변으로 들꽃들이 자잘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하얀 들꽃들은 수북해서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베리스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발견한 곳입니다. 흔적을 보건대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은 아닌 거 같더군요.”

아론은 요기할 만한 것을 구해 오겠다며 말을 근처 나무에 메고 사라졌다.

나는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기 시작한 걸 보며 냇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생각하는데 냇가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였다.

바람결에 조금 헝클어진 은발은 여전히 하얀 얼굴에 잘 어울렸고, 말을 타고 달리느라 혈색이 돈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돼 보였다.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였지만 눈빛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방금 전 아론에게 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싸하고 시린 느낌이 드는 것은.

나는 괜히 그 눈이 싫어서 손으로 물을 흩뜨려 버렸다.

“장작은 이미 있고, 불을 피워 이걸 데워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오래지 않아 아론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길쭉한 나무 열매가 들려 있었다. 텁텁한 흙냄새가 올라오자 나는 그것을 회의적으로 바라봤는데, 아론이 불을 피워 구워 준 나무 열매를 한 입 맛보자 깜짝 놀랐다.

“맛있잖아? 엄청 달콤해.”

“다행입니다.”

아론은 예쁘게 웃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정하고, 말쑥한 청년은 겉모습만 보면 이런 일에 무지할 거 같은데, 장작에 불을 피우는 것부터 나무 열매껍질을 칼로 벗겨 내기까지 그 어느 하나 어리숙한 동작이 없다. 지극히 노련하고 능숙하게 이런 일을 해내는 자.

나는 그가 그런 사람일 거라 상상도 못했다.

나는 구운 열매를 한 입 더 먹으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걸 잘 알아?”

“성기사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에, 외딴 섬에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별걸 다 알게 되더군요.”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외딴 섬에 떨어졌다니?”

“폐하께서 가두셨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 세상은 네게 적합한 곳이 아니라고.”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노랗게 구워진 나무 열매를 하나 더 내밀었다.

“자, 드십시오.”

“…….”

나는 굳어 버렸다. 그에게서 간신히 나무 열매를 받은 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 가두셔서 섬에 홀로 있었던 거야? 얼마나?”

“3년 정도였습니다. 마물을 잡으면서 신성력을 일으켰더니 저를 찾으러 오시더군요. 생각보다 쓸 만하다고 하시면서.”

“…….”

“섬에 머물던 때는, 그 낮과 밤을 어떻게 보내나 황제 폐하를 원망하던 순간도 있었는데.”

아론은 쓴웃음을 물었다.

“지나고 나니, 이제는 그분께서 그리 혹독히 대해 주셔서 빨리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긴장을 늦추면 잡아먹히는 그런 순간의 연속이었거든요.”

“……몰랐어. 네가 그런 시간을 견딘 줄.”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난 네가 사라진 후 좋은 곳으로 가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어. 널 다시 만났을 때 넌 더 이상 울보 아론이 아니라 펠더라는 이름을 단 황가의 핏줄이 되어 있었으니까.”

나의 놀랐다는 말투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매를 깎고 있는 그의 눈은 깊었고, 우수에 차 있었다.

“맞아요. 울보 아론. 그 나약했던 소년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습니다. 가혹하고 참혹했던 나날이었지만, 그럼에도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견뎠습니다.”

아론은 고개를 들었다. 직선으로 뻗어 오는 눈빛은 가볍지 않았다. 극도의 고난과 고통, 외로움과 그리움을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

“강해져야 지킬 수 있는 힘도 생기니까요.”

“……아론.”

“그 생각만 하며 견뎠습니다. 말레드레드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발 그만해, 이러면 부담스러워서…….”

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아론이 그런 나를 불렀다.

“말레드레드, 깊이가 다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뭐?”

“제가 원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은 이러했다는 듯이 덤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덤덤해서 더욱 애절하고 애틋한 미소를.

“꽃이 그냥 좋은데, 꽃을 향해 어찌 너도 나를 그렇게 좋아하라고 말하겠습니까.”

가슴을 건드리는 대사였다. 날이 선 가시까지 돋친 나라는 꽃을, 부드럽고 뭉클하게, 원래 제 모습대로 돌아가게 하는 고백…….

“말레드레드에게 바라는 건, 그저 저를 내치지 말란 것. 하나뿐입니다.”

“……나는.”

나는 들고 있던 나무 열매를 바라보았다. 앞쪽에서 튀어 오르는 불길에 타고 있는 것이 같은 나무 열매인지 아니면 나의 옹졸하고 매몰찬 마음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재가 되지 않도록 열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강하게 외쳤다.

“그저 즐기고 싶을 뿐이야!”

“알겠습니다. 즐기는 거면 족합니다.”

아론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에 내 옷깃이 타들어 가자 얼른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위험에서 구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버린 채로 그의 나지막한 안도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거면 됩니다.”

“…….”

“말레드레드. 정말 저는.”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나타나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버린 느낌. 그것은 낯설었고 두려웠으며 한편으로 가슴 설레는 요상하고 괴이한 일이었다.

“…….”

그가 안고 있는 곳에서부터 열기가 피어나 온몸으로 번져 나간다. 그것은 가식적인 말레드레드를 어루만지고 이기적인 말레드레드를 껴안을 수 있는 온도다. 냉정과 이기심을 무너뜨리는 온도.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기고 금욕적인 얼굴. 그런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지독하게 절대적이다.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고 자극적인 남자…….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우리는 어느새 입술을 부딪치고 있었다.

왜 키스를 이 순간에 하게 됐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부하고 떨치려던 남자가 자신의 진심을 덤덤하게 말하는 순간, 나는 급소에 찔린 것처럼 충격을 받았고 그에게 내 경계를 한 꺼풀 내려놓게 되었다고 하겠다.

“……음, 여기선……!”

정신없이 입술을 맞추며 우리는 상대의 몸에 꿀이라도 숨겨진 것처럼 서로를 더듬고 있었다. 어느새 윗옷이 반쯤 풀어헤쳐진 아론은 간신히 외쳤다.

“추울 수 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론은 어느새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들꽃 융단 위에 누워 있는 남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화사했다. 나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론은 그윽해진 눈빛으로 자신의 타액이 묻었을 내 입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

나는 홀린 듯이 말했다. 이 꽃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금빛 사내를 당장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냥 하자.”

아론은 잠시 나를 응시했고 곧 순응하듯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흐읏, 읏……!”

우리는 옷을 모두 벗지 않았다. 내 하의와 아론의 하의만 벗겨지고, 내 상의 사이로 가슴만이 노출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꽃 속에 묻혀서 내가 상위로 올라가는 체위로 관계했다.

“아, 아……!”

그의 손이 가슴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살덩이의 감촉을 즐길 때마다 나는 짜릿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좋습니까……?”

“좋아……!”

아론의 것이 내 배 속을 꽉 채우며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다. 나는 단단한 그의 복근을 짚은 채로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이든 아론의 성기는 꼿꼿하게 내 속을 쑤셔 왔고 나는 기분 좋은 자극에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흣, 으흣……!”

“말레드레드의 안이.”

아론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따뜻합니다.”

아론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보였고, 그에 따라서 그의 것이 더욱 묵직하게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읏!”

내가 소리를 치며 고개를 젖히자 아론이 얼른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왔다. 그의 손에서는 들꽃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아련하고도 아득한 그 향기는 그의 체향과 어우러져 내 코끝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의 크고 강직한 성기를 품은 채로 흔들리는 나비와도 같은 존재였고, 그라는 꽃을 향해서 속절없이 춤추는 꿀벌과 같은 생명이었다.

“아, 아앗……!”

온기와 쾌락이 빚어낸 것은 뜨거운 격정의 순간이었다. 나는 내 가슴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서 희열했고 내 안을 쑤셔대는 그의 성기에서 큰 벅참을 느꼈다.

이윽고 더 견딜 수가 없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 전체의 힘을 풀어 버렸다. 절정에 달하는 느낌이 시원하고 아릿하게 내 머리끝을 치고 있었다.

“후우…….”

아론 역시 눈가를 흐리며 쾌감의 끝을 나지막한 한숨으로 표현해 내고 있었다. 눈을 뜬 나는 그의 사정 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 아론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런 얼굴도 예쁘단 생각이 들어서.”

“……!”

아론이 크게 멈칫했다. 곧 그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 묻어났다.

“말레드레드가 절 예쁘다고 칭찬을 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왜?”

“말레드레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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