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 말은 내가 마물에게서 상처 입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을까.
전투를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마왕이다. 그는 그 이후 쾌락을 위한 것처럼 방울을 내 유두에 달았다.
하지만 그게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실은 마물이 공격하는 것을 대비해 내 몸에 달아 놓은 것이라면?
‘그가 날 지키려고 했다고? 설마.’
나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훨씬 그럴싸한 추측이 있었다.
‘내가 사제들 사이에서 곤란해지는 것을 바랐을 거야.’
경악했던 펠의 표정을 떠올리자 나는 그만 속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마왕과의 관계가 이쪽 세계에 영향을 미치질 않게 바랐다.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마왕과의 관계를 시작했고, 마왕이 관계의 목적이 유희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듯 내 몸만을 탐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마기를 내게 붙여서 보내다니.’
나는 짜증이 확 일어났다. 그가 내 소환사로서의 삶을 위협한다면 함께하기 힘들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계는 꿈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마왕과의 관계를 끝내야 하나, 고민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들고 말았다.
“……주무십니까.”
어떤 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누군가 숙소 밖에서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나는 그게 꿈결이라고 치부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목소리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기척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날 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잠들어 아침까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늦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난 걸 깨닫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옷을 벗어 던진 나는 배급된 옷을 황급하게 몸에 꿰었다. 옷을 입으면서 선반의 방어구를 찾아 까치발을 든 채 위를 더듬거렸다.
툭.
“앗……!”
마음이 급해서인지 방어구를 밀치고 말았다. 나는 가슴 갑옷이 내 얼굴로 떨어지자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누군가 내 천막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말레드레드, 괜찮은……!”
“……아론?”
그가 들어올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론은 나를 살피더니 곧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파악했다.
“하하…….”
아론은 웃고 있었다. 소리를 내서 쾌활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생소해서 나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고 말았다.
청량한 웃음. 주변까지 시원해 보이게 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잊을 수 없는 봄날의 어느 생명력 넘치는 광경처럼.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론은 내 머리에 올려져 있는 가슴 방어구를 다정하게 치워 주며 말했다.
“말레드레드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는데.”
천막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황금빛 햇살, 그 빛을 받으며 사내 하나가 눈부시게 존재했다. 그자의 눈빛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처럼 아름다운 황금빛이었고, 그의 피부 역시 금빛으로 빛나는 맑은 분홍색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혈색 좋고 건강한 얼굴로, 그는 천막의 어둠을 몰아내는 근사한 목소리를 냈다.
“앞으론 해야겠습니다. 너무나 귀여우니까요.”
기쁜 듯 휘어진 그의 눈가를 보니 왠지 스스로가 민망해진다.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돌린 나는 벽에 매달린 거울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어제 뒤척거리며 잠들었던 탓에 머리는 산발로 부스스했고, 성급하게 끼워 넣은 옷은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더군다나 손에 든 방어구와 지팡이까지, 방금 일어나 정신이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아론은 맑고 우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모습으로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나는…….”
나는 아론의 말끔한 모습을 보며 멈칫했다. 그는 오늘따라 평복을 입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단정한 상의와 하의는 더욱 그의 미모를 부각시키며 그의 건장한 몸에 맞춘 듯이 잘 어울렸는데, 나는 그걸 보는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오늘 훈련 안 하지?”
“쉬는 날입니다.”
아론은 빙긋 웃으며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보았다가 내가 가진 물건들을 천천히 내주었다.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서 그것들을 다시 선반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기 시작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내 정리를 다 끝낸 아론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됐습니다.”
“고마워.”
그의 말에 얼른 인사했다. 그는 나를 잔잔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어째야 하나 싶은데 그가 말했다.
“괜찮은 음식점이 있는데, 가 보지 않겠습니까.”
“음식점?”
“아침 식사를 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하지만…….”
나는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아론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그런 걸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었으니 나의 이런 태도가 까다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아론과 공식적인 연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공표된다는 것이 사뭇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쉬는 날 함께 돌아다니면 우리가 연인 사이라고 오해할 거야.”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그가 신경 쓰여 더 합리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런 사이라고 오해받으면 당장 곤란해질 거야. 작전마다 우리를 떼어 놓을 수도 있고.”
“하긴, 그렇겠군요.”
아론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다른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죠?”
“뭐?”
“바람도 쐴 겸 해서요. 날씨가 아주 화창합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이성이 안 돼, 라고 외치는 걸 들었지만 그의 미소 때문에, 그리고 그의 다정한 눈길 때문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론은 말을 하나 빌려 왔다. 나는 사제들의 눈에 띌까 봐 걱정했지만 아론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숙소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정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우리가 나간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겁니다.”
아론의 자신감이 느껴져서 나는 긴말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아론은 내가 말 등에 오르자 부드러운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노련하게 말을 몰았다.
***
어느덧 대지는 봄과 여름의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서 드문드문 피어난 꽃들은 탁 트인 평원에 이르자 엄청난 꽃의 군락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었다.
길을 따라서 피어난 분홍 꽃, 방울방울 매달린 푸른 꽃과 흰 꽃, 풀처럼 길게 늘어진 노란 꽃들이 앞다투어 시선을 사로잡으며 향기로운 냄새를 피워 냈다.
아론이 앞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평원을 지나 둔덕을 넘으면 베리스라는 작은 도시가 나타납니다.”
“들어본 적 있어.”
나는 꽃향기에 흠뻑 취한 채로 말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사제들은 그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굉장히 한적하거든요. 꽃과 덩굴을 팔아 소박하게 생활하는 곳이라서, 외부인이 놀 수 있는 주점이나 잡화점이 없습니다.”
“잘 아네.”
“중앙의 보급품을 받기 위해서 그곳에 마차를 몰고 간 적이 있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더군요.”
아론은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울리는 말의 발굽은 서두르고 있지도, 흥분하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저녁에 했던 마물과의 전투가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시간, 오랜만이야.”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니. 훈련소에 있을 때도, 수녀원에서 지낼 때도 이런 느긋한 광경을 즐겨본 적이 없어.”
“……말레드레드.”
아론이 위로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자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는 억지로 그것을 눌렀다.
“너무 좋은데, 한편으론 걱정돼.”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까 봐.”
아론이 말을 멈췄다. 그는 내 쪽을 돌아보며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난 네가 뭔가 다른 걸 바라는 건가 싶어서 불안해.”
“제가 원하는 건.”
아론은 격정을 애써 누른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늘 같습니다. 말레드레드 그 하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네 그 태도가 신경 쓰인다고. 난 너를 그만큼 원하지 않으니까!”
“……!”
내 말에 아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커진 눈은 곧 슬픔과 서러움, 애틋함을 담았고, 애잔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세월이 쌓여 있는 눈이었다. 어느 한순간에 나올 수 없는 진한 감정들의 묶음에서 나는 기이한 슬픔과 고통을 느껴 버렸다.
나를 그리워했던 모든 시간. 그는 어쩌면 오랫동안 나보다 더 말레드레드를 찾아 헤맨 게 아니었을까? 내가 울보 아론을 찾아 한때 모든 곳을 배회했던 것처럼, 그 역시 시간 속에서 그랬는지 모른다. 나를 찾아서, 선망의 말레드레드를 찾아서.
내가 어떤 확신을 받기 전에 아론은 눈을 감추듯 꼭 감아 버렸다.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뛰었고 손발이 저려 왔다.
그가 상처받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괜한 희망을 주는 것은 후에 더 큰 불행을 낳을 것이며 어중간한 내 태도로 인해서 아론이 상처받는다면, 나는 그때 가서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비밀. 내 은밀하고 타락한 욕정 상대가 마왕인 것을 그가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선을 긋듯이 냉혹하게 말했다.
“너도 알았잖아. 내가 이런 사람인 거. 처음부터 가벼운 관계만이 될 거라고 말했으니까.”
“…….”
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을 뿐이다. 그 눈은 불편했고, 강렬했다. 나는 더욱 매몰차게 말했다.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어. 난 말을 돌리진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혹시 불편하면 나를 숙소에 내려 줘도 돼.”
“불편하지 않습니다.”
아론은 잠깐 멈췄다가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레드레드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 리가 없잖습니까.”
정말?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멈췄다. 그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