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론은 재빨리 현상을 파악하고는 우리 쪽을 보며 명령했다.
“보조 인력은 모두 공격하세요!”
아론의 검은 분명하게 거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사악한 것을 향해서!”
아론이 본보기를 보이듯이 검을 휘두르자, 그의 검에서 커다란 기둥 하나가 뻗어 나왔다. 빛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바로 거울을 내리쳤고 손이 사라지며 순식간에 거울이 깨지고 말았다.
“조심해!”
펠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가 소리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마기가 보강된 마물이 성기사와 소환사 한 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듯 얼어붙어 있었고, 그나마 막판에 정신을 차려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마물이 더 빨랐다.
“아악!”
성기사와 소환사는 마물의 물고기 같은 꼬리에 밀려서 바닥으로 쓰러진 상태였다. 밀쳐진 그들을 향해서 또다시 꼬리가 올라가자 성기사 펠이 자리를 벗어나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큭!”
펠이 신음을 터트렸다. 넓적한 마물의 꼬리는 신성력이 맺힌 펠의 검에도 완전히 잘리지 않은 채 사악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펠이 내 쪽을 보며 외쳤다.
“어, 어서……! 신성력으로 아가미를!”
그런 모습의 마물과 싸워본 적이 있는지, 펠이 급소를 이야기했다. 나는 서둘러 지팡이를 쥐고 그쪽으로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한데 모아서 마물의 눈 아래에 달린 아가미를 공격하는 것이다.
“읏…….”
신성력은 불안하게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집중해서 마물을 공격하려 했지만 마물이 불길하게 내뿜는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자꾸만 머리가 멍해지며 눈이 감겨 왔다. 숨결에서 상대방을 마비시키는 독을 뿜어내는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요!”
펠이 외쳤다. 그 역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완전히 구기고 있었다.
나는 두어 번의 공격을 날리고 지팡이로 한껏 신성력을 그러모아 마물의 아가미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내 공격이 귀찮다는 듯이 마물이 지느러미를 펄럭였고, 나는 그를 피했지만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조심해요!”
아차 싶었을 때, 다시 지느러미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파앗!
그때, 내 가슴에서 검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아까 내 유두에 달려 있던 방울이 사라지며 보였던 형태와 비슷했다.
아니. 완전히 똑같았다.
‘……설마.’
나는 얼어붙었다. 갑자기 나타난 뱀 같은 검은 기운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 가슴 주변에 숨어 있다가 위기가 감지되자 나타난 것처럼 날아오는 지느러미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검은 기운은 위협적인 지느러미를 난도질해 버리고, 그대로 마물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마물은 자신의 목에 갑자기 예상 못 한 검은 기운이 파고들자 발광하기 시작했다.
피잉.
그때였다. 한 줄기의 찬란한 빛이 마물을 가르며 나타난 것은. 그것은 정확히 마물을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반으로 갈랐고, 그것은 형체가 무너진다 싶더니 곧 작은 기포처럼 변해서 바닥으로 흩어졌다.
나는 공격을 한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론이었다. 그는 방금 휘두른 긴 대검을 사선으로 내린 상태였다.
짧은 순간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아론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의 진심 어린 태도와 나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맹세가 전달됐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가 몹시도 고마웠고, 한편으론 두려워졌다.
언젠가 나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 그렇게 되면 저 절대적이고 다정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지. 나는 벌써부터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으윽…….”
그때, 펠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려 그에게 달려갔다. 무릎이 후들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펠은 마물의 사체라고 할 수 있는 기포에 뒤덮여 있었고, 그 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성 때문에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건 대체…….”
펠은 기절하기 전에 물었다. 경악한 눈이었다.
“뭡니까…….”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채로 그가 쓰러질 때까지 보고 있었을 뿐이다.
‘내 힘이 아니야.’
알 수 없는 공포로 손이 떨려 왔다. 나는 이런 제 발이 저린 모습을 누가 볼까 봐 얼른 주먹을 뒤로 감추고는 저편을 바라보았다.
사제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사제들이 펠의 상태를 확인하고 들것에 실어 그를 데려갈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론이 보인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티끌 없는 순백의 성기사였기 때문에.
***
펠은 그대로 치료 시설로 옮겨졌다. 나는 청소를 위해 숲에 남았고 곧 에일이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정말 다행이에요! 마물을 말끔히 처리한 거 봤죠? 이번 소환 영역을 그리는 데 제 힘이 주요하게 쓰였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에일은 싱글벙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나는 조용히 마물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에일이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파요, 말레드레드? 안색이 약간 창백한 거 같은데.”
에일은 주위가 어둑해져서 조금 확신이 없다는 어조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펠이 다른 이들을 지키려다 다쳐서요. 걱정돼요.”
“정말 착하네요, 말레드레드. 성기사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 주고.”
나는 약간 질렸다는 듯이 에일을 바라보았다. 성기사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성기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가 문제였다.
“……성기사도 같은 사제인데요.”
“아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는 우리와는 다르잖아요. 나서서 싸우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죠. 그는 용병으로 오래 일했으니 이런 위기 속에서 회복하는 방법을 잘 알 거예요. 용병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의 신분을 떠올리면 정말 성공한 삶 아니겠어요? 언제 노예나 용병 따위가 신성력 치료를 받아 보겠어요?”
나는 그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왠지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넘어갔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일부러 건져 올린 마물의 시체를 그의 신발 쪽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으아악! 말레드레드! 뭐하는 거예요!”
“손에 힘이 풀려서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호들갑을 떠는 그에게 말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잖아요? 마물을 청소하는 데 당연하고도 영광스러운 경험이 많은 자니까.”
“마, 말레드레드!”
비꼬는 내 대꾸에 에일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에게 환한, 그러나 차가움이 서린 것이 명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일이 흠칫했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하세요. 전 아직 보조를 받아야 하는, 신성력이 약한 소환사니까.”
“그게 무슨 말…….”
“이런 전투, 아니, 청소에 참여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해서.”
나는 그에게 청소 도구를 주며 말했다.
“사실 이만 가 볼까 합니다.”
나는 우아하게 그를 피해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에일이 내가 준 청소 도구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 손목을 잡아 왔다.
“말레드레드! 그렇게 말하고 가 버리면 안 되죠! 제게, 아니,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죠! 내가 어떤 신분인데! 말레드레드에게 과분한 호의를 베풀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후환이 좋지 못하다는 걸 명심…….”
에일의 졸렬하고도 협박에 가까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에일의 팔을 사납게 후려쳤다. 그 덕분에 나는 자유로워졌다.
“악! 누, 누가…….”
에일은 커다란 소리를 빽 지르면서 옆을 노려보았다. 공격을 당한 곳이 무척 아픈지 이를 앙다물며 눈물을 머금었다.
“아, 아론나이드!”
뜻밖에도 금발의 성기사가 우리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에일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고, 아론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내게 먼저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에.”
존댓말이 조금 어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론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청소가 마무리됐으니 본대로 돌아가 보고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론의 눈동자는 깊었고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분노한다는 듯이 날카로웠다. 나는 에일을 한 번 쳐다보고 그의 굴욕적이고 민망한 표정을 머릿속에 각인한 뒤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아론이 에일에게 정색하며 말하는 게 들려왔다.
“다시 한번 동료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아…….”
“상부에 반드시 보고할 겁니다.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동료들에게 반듯하게 예의를 갖춰 대하세요.”
“그게…….”
“알겠습니까?”
“아니, 전, 그냥…….”
“말이 너무 어렵다면 다시 쉬운 말로 해 줄 수 있습니다.”
“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듯이 싸늘하게 혼내는 아론의 태도에 나는 살짝 미소를 베어 물었다. 에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카란에게 보고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씻고 잠들기 전에 나는 손끝으로 신성력을 일으켜 보았다. 가슴의 온기를 느끼고 그 느낌을 확장시키면 먼 곳에서 신성한 빛이 내려와 성스럽게 손끝에서 빛난다. 그 빛은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고 내가 아직 유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표였다.
나는 곧 손끝에 번지는 신성한 빛을 재차 확인했고 불안했던 심정을 이완시켰다.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가슴 앞에 검은 기운이 나타났기 때문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마기에 물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신성력을 가슴께로 가져가자, 다행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검은 기운은 나타나지도, 무엇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무엇. 그가 설마 일부러?’
나는 흑발의 사내가 마지막으로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그 무엇도 함부로 손댈 수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