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는 결국 어안이 벙벙해져 그에게 맞받아칠 생각도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신념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것. 그것은 성욕일까. 아니면 소환사 말레드레드일까.
나는 어딘가 가려워져 오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론의 뒤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펠이 와.”
긴장한 내 목소리에 아론은 그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그는 유능한 성기사입니다. 전투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게 나랑 펠을 떨어뜨리지 않은 이유야? 그럼 에일은…….”
“그자는.”
아론은 감정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냥 소환사일 뿐입니다. 말레드레드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하하. 너무 냉혹하게 말해서 도리어 에일이 불쌍해질 정도다. 아론은 에일에 대한 건 생각하지 말라는 듯, 말을 돌렸다.
“소거가 끝나면 내일은 훈련도 쉬게 됩니다.”
아론은 정중하면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어딘가로 놀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응?”
나는 굳어졌다. 그런 요청을 할 줄이야. 흡사 연인 사이처럼 다정다감하게 의사를 물어오는 그에게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싶어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난번에 육체관계 그 이상을 원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걸 실천하려는 걸까? 어쩐지 마음이 어지럽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린다.
분명하게, 그러나 상처를 주지 않고 그를 거절할 말을 찾고 있던 나는 펠이 다가오자 생각을 멈췄다.
“아론나이드.”
펠은 평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딱딱하다고 느낀 눈가가 꿈틀거리는 걸 보자, 나는 펠이 아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작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활약하시는 모습, 늘 감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펠은 아론을 경애하고 있었다. 그의 눈가가 꿈틀거리는 것은 너무 기뻐서 그런 것이란 걸 알게 되자 조금 허망해졌다. 동시에 남녀를 가리지 않는 아론의 인기가 새삼스럽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발의 성기사는 그런 펠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살짝 목례하고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돌아섰다. 아론이 떠나고 나서도 펠의 시선은 한동안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 뜨겁고 치열한 감정이 숨겨져 있는 걸까.
스멀스멀 걱정이 치솟는데 펠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멈칫했다.
“아.”
그는 민망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너무 빤히 쳐다봤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윽고 펠이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어서요.”
“네?”
“그러니까, 진정한 신의 기사라는 말입니다.”
“아.”
나는 그가 왜 아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아론의 신성력, 실력, 그리고 신실함이 그에게 남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용병이었다가 사제가 된 펠은 신을 향한 마음도 남달랐을 것인데, 그래서인지 아론을 보는 시선은 신을 향한 것처럼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예전에 절 구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위협적인 마족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 마족의 검이 제 목에 닿아 있었죠. 아론나이드는 기꺼이 마족에게 바짝 접근해 그의 검을 부서뜨리고 죽음의 위기에서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랬군요.”
“놀라운 점은,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어떤 감사도 바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저 제 일이어서 한다는 듯이요.”
펠은 감명받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의 존재는 저런 성기사를 통해서 입증되지 않나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건대 어떤 호응도 필요 없어 보였다. 이미 그는 아론을 신의 기사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제 자리에 선 금발 기사를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론처럼 임무에 임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순 있었다.
소거 작전은 아론의 지시 아래 개시됐다. 아론이 팔을 내리자 성기사들은 훈련이라도 된 것처럼 검을 아래로 뻗었다. 그러자 검신에서 빛이 빠져나와 땅으로 깜박이며 스며들었다.
그러자 대지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름 없는 숲에선 괴상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스러운 짐승의 비명 같기도 하고 낮게 나는 새의 울음소리도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이내 웅- 하는 거대한 굉음으로 변해 이상한 빛을 숲 위쪽으로 토해 냈다.
“차원의 문이다!”
누군가 외쳤다. 이상한 빛은 어둡고 암울했다.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마물들은 끝이 없었고 누군가 ‘침략인가.’ 하고 절망적으로 외칠 정도로 마기도 들쭉날쭉 사나웠다.
나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앞쪽에서 펠이 나를 돌아보며 ‘겁먹지 마세요. 집중하고 앞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라며 조언을 주고 있었으나 이렇게 많은 마물을 상대해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자연스레 몸이 떨렸다.
곧 성기사들의 눈부신 신성력이 여기저기서 번쩍였다. 원 진영으로 숲을 둘러싼 성기사들이 저마다의 신성력으로 마물들을 몰아가자 중앙에 몰린 마물들이 숲을 망가뜨리면서 분노를 토해 냈다.
“소환 영역으로 몰아갑니다!”
아론의 지시는 짤막했다. 그래서 더 귀에 쏙 들어왔다.
아론은 성기사들의 공격 방향이 일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대검을 놀려 땅을 쳤고, 그 길대로 신성력이 빛나며 마치 눈 부신 태양의 도로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불길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펠의 감탄은 잘 들려왔다.
나는 성기사들이 아론의 지시대로 마물들을 몰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물들은 번쩍거리는 신성력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것도 아론의 노림수일까.’
원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마물이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다. 좁혀 들어가고 있는 신성력을 피해서 저들끼리 뭉쳤고 저들끼리 공격했다. 사나운 공격력을 풀 데가 없어서 저들끼리 치고받는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영리하게 마물을 파괴하며 소환 영역으로 몰아가고 있자, 성기사들의 입에서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성력이 느슨해지면 안 됩니다!”
이기고 있다는 생각에 방심했기 때문일까. 성기사들이 내뿜는 신성력의 일부가 약해진 느낌도 들었을 때, 마물 하나가 변칙적으로 신성력에 몸을 돌진시켰다. 거대한 회색 몸체는 신성력과 정면으로 충돌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그 탓에 신성력이 흐려지며 균열이 발생했다.
“아, 안 돼!”
마물들은 이때다 싶어 그쪽으로 돌진했다. 이미 균열이 일어나고 있던 신성력의 띠는 마기가 쏠려 버리자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그쪽을 담당하는 성기사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뒤쪽의 성기사가 보조하세요! 나머지는 여전히 몰이를 계속해야 합니다!”
아론은 그렇게 외치고는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게 뒤쪽에서 보조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 차례군요.”
펠이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팡이에 신성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펠이 조금 전에 중앙에서 가져다준 팔찌를 손에 찬 채, 주문을 외우며 신성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목 뒤에 땀이 맺힐 정도로 고단한 작업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펠의 칭찬을 들었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신성력이 지팡이를 타고서 한 지점에 쏘아지자 펠은 그것들에 자신의 신성력을 실어서 중앙으로 날리고 있었다. 그러자 신성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마물들은 그 신성력의 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말 신의 재림 같군요…….”
펠이 감탄하자 나는 그제야 아론을 바라봤다.
아론은 탈출한 마물들을 향해서 가차 없이 대검을 놀리고 있었다. 그의 대검에 맺혀 있는 강한 신성력이 검이 내려쳐질 때마다 뭉텅이로 빠져나와 마물들을 조각내었고, 마물들은 대항도 해 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졌다.
자비 없는 그는 악의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신의 사제였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기사였다. 단신의 힘으로 몰아치는 기세가 얼마나 굉장한지 마물조차 아론을 두려워해 피하려 했다. 아론은 그런 마물들을 주위 기사들과 협력해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다.
“좋아요, 소환 영역으로 거의 다 갔군요.”
펠이 소환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지팡이 쥔 손을 내렸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바닥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펠은 진정시키려고 팔목을 잡고 있는 나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신성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끈기는 전혀 부족하지 않군요.”
“네?”
“그러니까, 에일이 말한 것과 달리 말레드레드는 매우 쓸모 있는 소환사라는 겁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 왔다. 그가 덤덤하게 한 칭찬에 에일에게 상했던 마음을 위로받고 있었다.
쓸모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소환사로서 여전히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백작가의 사생아로서가 아니라 소환사로서 살아갈 의미가 있다고.
나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무뚝뚝한 그라서 칭찬이 더욱 값지게 들려왔다. 나는 진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펠이 잠깐 나를 보며 입가를 끌어 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웠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아론이 만든 태양의 길을 따라서 억지로 몰려가는 마물들은 고통스러움에 끔찍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이 소환 영역으로 돌아간다면 마계에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걸까. 마물의 창조주라고 했던 그에게는 어떤 영향이 미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의미 없이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마물들의 위쪽으로 거대한 어둠의 거울이 나타나자 흠칫하고 말았다.
“강력한 마기다!”
“마물보다 상급 존재야!”
누군가 던진 날카로운 인지는 내 불안을 증폭시켰다. 설마 그는 아니겠지? 마왕은 아닐 거야, 두려워져 표정이 굳어 있는데 다행히도 거울에서 튀어나온 것은 가느다란 팔로, 여성의 신체가 분명했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팔은 이상할 정도로 요염했고, 우아한 동작만으로도 시선을 현혹시켰다. 넋을 빼고 쳐다보고 있으니 그 손에서 뻗어 나온 거미줄 같은 기운들이 마물들에게 옮겨 갔다.
아론이 선명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기를 보충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