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2화 (22/220)

22.

펠은 그렇게 경고하고는 오늘의 일정을 말했다.

“오늘은 야외 훈련을 할까 합니다.”

“야외 훈련?”

에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야외는 먼지도 많이 날리고 집중하기도 어려워요!”

“우리는 야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물과 싸우는 전사들이죠.”

펠이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에일이 조금 움찔했다.

“제 말은…….”

“어리광 좀 그만 부리세요.”

펠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에일은 그의 말에 얼굴이 굳어져 입술이 틀어졌다. 분노한 게 분명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펠의 얼굴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서늘한 기운이 에일에게 향했고, 에일은 마침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당신 같이 무례하고 비천한 자와 일하고 싶지 않아요!”

“좋을 대로 하세요.”

펠은 여유로울 정도로 무심하게 답했다.

에일은 그를 서슬 퍼렇게 노려보았다가 몸을 돌려 홱 멀어졌다. 순간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펠은 그가 떠나고 나서 내게 짤막하게 말했다.

“함께 떠나셔도 됩니다.”

“왜요?”

내가 쳐다보자 펠이 멈칫했다.

“두 분이 친한 줄…….”

“그저 동료인걸요.”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펠은 잠깐 나를 보았다가 내 표정이 평온하다는 걸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야외 훈련 괜찮으십니까?”

“네.”

펠과 나는 그렇게 야외 훈련에 임했다. 그가 알려 주는 것은 역시나 실전에 유용한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신성력의 모양을 변형시켜 마물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태까지 그것은 성기사의 고유한 전법이며, 소환사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인 줄 알고 있어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펠이 위급할 때 신성력을 한데 모아 쓸 수 있다고 말해 주어 시도해 보게 되었다.

물론 펠은 주의할 점을 덧붙였다.

“소환사는 영역을 그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런 변형적인 기술은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나 쓰이는 것이죠. 성기사의 그것과는 달리 공격력이 매우 낮아서 주의를 환기시켜 도망가는 정도일 겁니다.”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훨씬 좋은데요.”

나는 신성력이 손안에 구름처럼 모여드는 걸 보며 감탄했다. 그것은 찬란한 빛이었지만 한편으론 불안정한 형태라서 번갯불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내부가 번쩍였다. 겉으로만 보면 화창한 날씨인데 안으로 보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흉흉한 하늘 같다고 할까.

이중적인 모습이 나를 보는 듯해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을 응시했다. 곧 충고가 날아왔다.

“신성력 소모가 크니 오래 유지는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펠의 말에 나는 얼른 집중력을 흩뜨렸다. 지팡이를 쥔 손이 안 그래도 아려 오고 있었다. 등 뒤론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와 옷을 축축하게 적셨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입가로 흘러 쓰라리면서 짭짜름한 맛을 느끼게 했다.

‘조금만 힘을 더 썼으면 의식을 잃었겠어.’

나는 소모의 수위를 가늠해 보고는 어지러운 머리를 잠시 앞으로 수그렸다. 펠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검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까지. 라는 의미였다.

나는 한차례 숨을 돌리고 카란에게 향했다.

“펠과 무슨 문제가 있나?”

“네?”

카란은 다짜고짜 물었다. 내 의아한 눈빛에 그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에일이 아까 다녀갔어. 절대 그와는 한 팀으로 일할 수 없다면서.”

카란은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눈빛엔 불편함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자네와는, 반대로 아주 좋다는 거야. 계속, 꼭, 같은 팀을 하고 싶다고 열렬히 말하면서.”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뒷말은 의도적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카란은 얼굴에서 내 속내를 읽겠다는 듯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말레드레드, 자네는 어떻지?”

“괜찮습니다.”

“누가? 에일이?”

“성기사 펠이요.”

“흠.”

카란의 눈이 약간 커졌다. 내가 말하는 바가 조금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자네는 소환사들과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저번 작전에서 소환사의 실수를 덮어 주는 걸 보고 그렇게 느꼈네.”

나는 멈칫했다. 내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카란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성기사들의 보고도 나중에 취합되네. 성기사들은 아주 솔직하게 소환사 3이 겁에 질려 임무에서 도망쳤다고 적었지.”

“……상황이 무섭긴 했습니다.”

“그래. 나도 경험이 없지 않아. 전투란 게 어떤 건지. 어떻게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고 행동을 바꿔 놓는지, 아주 잘 알지.”

카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의 이마엔 못 보던 주름이 들어섰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소환사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늘 깨닫게 돼. 우리의 실수가 다수의 죽음이나 광범위한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

“뭐, 지금 소환사 3에 대해 뒷말을 하는 건 아니고. 아무튼 에일이 워낙 강력하게 나와서 말이야. 자네가 힘들다고 한다면 바꾸는 것도 건의해 보겠네.”

“……저는.”

나는 소환사로서의 내 입장과 생사를 오가는 전사로서의 입장을 모두 고려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자네는 평화주의자군.”

카란은 오묘하게 눈을 빛냈다.

“아니면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방관주의자이든가.”

카란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쪽이지?”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말없이 있자 카란은 ‘곤란한 질문인가? 대답은 안 해도 되네. 사실 별로 상관없으니까.’라며 역시나 세심하게 반응하고는 작전에 대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저녁에는 요새 문제가 되고 있는, 마물이 잦게 출몰하는 지역에 대한 대규모 소거 작전이 있을 거라 했다. 많은 팀이 협동해서 수행하는 작전인데, 나 역시 같은 팀인 펠, 에일과 함께할 거라 했다.

에일의 건의는 상부에 논의를 거쳐야 결정되는 사항이라서, 당분간은 불편해도 셋이서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하게 대답했다. 카란은 그런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그럼 나가 봐. 하고 평소처럼 말해 왔다.

나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대규모 소거 작전을 앞둔 거라면 심신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기력을 좀 회복할 생각으로 따로 마련된 목욕 시설로 향했고, 그곳에서 막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론과 마주쳤다.

아론은 혼자가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었는데,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도 침착하게 빛나는 고지식한 눈만은 내게로 향했다.

찰나였지만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싸늘하게 식는, 상반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조되는 감정이었고, 해석하기 어려운 느낌이었기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차라리 치열한 욕정만이 떠올랐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론은 내가 말했던 ‘가벼운 관계’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눈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 오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야 할지 알 수 없게.

‘조만간 그만둬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덤덤하게 했다. 아니, 덤덤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심을 하며 어금니를 꽉 물고 주먹을 꼭 쥐었다는 건 목욕 시설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아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말자.’

나는 시설로 들어가기 전, 건물 중앙에 설치된 거울을 응시했다.

[스스로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라.]

이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제국어가 거울 위쪽 상단에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은 사제로서의 됨됨이를 늘 살피란 의미로 적혀 있었지만, 사람들은 목욕 후 제 모습이 멀쩡한지 살피며, 머리를 빗거나 옷깃을 정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나는 어떤 모습이지.’

훈련이 끝난 나는 약간 지쳐 보이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우아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크고 둥근 눈동자는 신비롭게 끔벅였고, 파르르, 눈썹이 떨릴 때마다 자연스러운 청초함이 한 떨기 꽃처럼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 속엔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나의 숨겨진 욕망이었으며 내가 실제로 느끼고 싶어 하는 ‘진짜’ 감정들이었다.

그 감정들을 바라보던 나는 그림자 속에 아론의 금빛 눈이 어른거리자 흠칫해서 거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큰 전투를 앞두고 목욕으로 마음을 안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자들은 없었다. 늘 북적이던 목욕 시설은 텅 비어 있었고, 나는 혼자서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서 가리개를 내렸다.

작은 나무 욕조 통에 아무도 쓰지 않은 깨끗한 물이 보인다. 여유로운 목욕 시간을 즐길 때였다.

‘아, 좋다.’

뜨거운 물의 온도가 근육을 이완시킨다. 나는 열기가 주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돌고 있는 혈관을 따라서 전달되었고, 나는 뜨거워지면서 동시에 상쾌해지는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펠과의 훈련이 고단했던지, 나는 어느 순간 잠이 들고 말았다.

***

“오늘은 묘한 곳에서 잠들었나 보군.”

눈을 떴을 때, 나는 넓고 넓은 바다의 수면 위에 있었다. 사실 그곳이 바다라고 생각했던 건, 욕조의 한 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폭포수처럼 물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은 자줏빛이었고, 화산에선 용암이 붉은 폭죽처럼 터져 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마계. 나는 탁 트인 야외 욕조에 있었다. 마왕은 내 뒤에 있었는데, 내가 이곳에 나타난 게 조금 의외란 표정이었다.

“그대를 불러들이는 건 때때로 내 예상대로 되지 않아.”

마왕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미묘하게 틀어지지. 그대가 신의 사제란 걸 증명하듯이 내가 원하는 소환 장소, 시간과 어긋나서 오곤 해.”

그러나 그의 눈만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웃는 것과 달리 그 현상이 실제론 무척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마왕. 그는 마계의 절대적인 군주로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할 만한 존재였다.

마왕은 한 손으로 내가 있는 욕조의 물을 나른하게 휘저었다. 그의 옷이 젖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있는 곳까지 수면 위로 파동을 만들었다.

“잘 지냈나?”

마왕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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