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러자 내 팔에 입맞춤을 하던 아론이 멈칫했다. 아론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차가워진 눈빛은 왠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반복해서 말해 주는 건, 제가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서예요?”
아론은 은근하게 허리를 내리눌러서 성기가 더 안쪽을 찌르도록 만들었다.
“읏…….”
아론은 눈빛은 여태 보지 못했던 진한 소유욕으로 어두워진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말레드레드의 마음을 바꾸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예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흐읏.”
나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그를 보았다. 아론은 일부러 허리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면서 내 안을 쑤셔대는 성기에 어리숙한 문장을 내뱉고 말았다.
“나, 난, 아읏, 네가, 흣, 내게 특별한 마음을 품었, 아, 까 봐…… 아……!”
“진지하지 않은 관계를 원하셨잖아요. 저는.”
아론은 내 안에 다시 꼿꼿해진 성기를 깊숙하게 박으면서 속삭였다.
“말레드레드의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어요. 우리는 가벼운 관계에요. 그러니.”
아론은 양손으로 흔들리는 내 손을 맞잡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완전히 밀착된 우리의 교접 부위는 연신 체액을 토해 내며 찌걱대는 야한 소리를 쏟아 내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아, 아론……!”
질벽의 예민한 부위를 연신 찔러대는 그의 치밀함에 나는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만큼 흐려져 있었다.
“말레드레드와 이 가벼운 관계를 이어 갈 거예요. 아주 오랫동안.”
“아……!”
“제가 없는 밤을 생각할 수도 없게요.”
나는 완전히 그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의 어깨를 꽉 잡은 채로, 그가 찌른 부위에 야한 환성을 터트리면서.
“약속할게요, 말레드레드.”
“아, 아……!”
“제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고.”
그의 말이 뇌리에 박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마음속에 슬그머니 일어났던 경계심을 던져 버리고 그에게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맡기고 있었다.
그의 아래에서 그를 받아들이며 뜨겁게 신음하는 것은 나를 거대한 불덩어리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를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껴안으며 자신 또한 불덩어리가 되었다.
뜨겁고 치열하게. 우리의 불같은 정사는 그렇게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을 때, 나는 꿈을 꿨다. 성관계로 아론의 건재함을 분명하게 깨달은 날 꾼 꿈은 당연히 아론에 대한 것이었다.
아론은 울고 있었다. 또래에게 맞았는지 잔뜩 부어오른 볼이 그를 안쓰럽게 보이게 했다.
나는 핀잔주듯이 말했다. 바보 같이 얻어맞지 말고 함께 때려 주라고. 동일한 신분이라면 크게 문제 될 거 없을 거라고.
‘하지만 말레드레드는요?’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던 아론은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때리면 나중에 말레드레드까지 괴롭힐까 봐…….’
한마디로 나까지 맞는 경우가 생길까 봐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 톡 쏘는 어조의 대꾸에 아론은 움츠러든 기색을 보였다.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아론은 한참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강해지면 말레드레드도 다치지 않게 보호할 수 있겠죠?’
나는 그러지 않겠냐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큰 의미를 담지 않은 대꾸였는데, 아론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침묵에 잠겼던 것이 기억난다.
‘그 뒤로 내가 그 덩치 큰 후작가의 녀석에게 맞는 일이 있었던가?’
나는 사건 전후 관계를 생각해 보고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론은 어린 시절, 또래에게 자주 맞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걱정해 대항하는 걸 조심스러워했다는 것은 이제야 기억이 났으며, 더불어 그가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 싸움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내가 우연찮게 맞은 걸 보고 크게 충격받아서 한동안 괴로워했던 것도 기억났다.
마치 기억의 꼬리가 다른 꼬리를 물어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내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충격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 세계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그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련의 깨달음을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그와 내가 더욱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추억은 추억일 뿐.’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아론이 사라지고 나서 한동안 괴로워했던 것도 잊었고, 가문을 나와 수녀원에서 절망했던 것도 다 잊었다.
나는 불편한 감정들을 깊숙이 내리누르면서 현재에 집중했다.
어쩐지 몸이 나른했고 기운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얽매고 있는 온기가 답답할 정도로 뜨거워서, 불편함에 몸을 꿈지럭거렸다.
“깨어나셨습니까.”
살짝 잠긴 듯한,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태초의 모습으로 난잡하게 했던 행위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나는 제 발을 밟은 짐승처럼 눈을 반짝 떴다.
“깨지 않으셔서 많이 피곤한가, 했습니다.”
어느새 그는 정중하고 격식 있는 미남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투도 예의 바르게 변한 그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면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넘겨주었다.
그의 눈빛에 흐르는 기색이 너무나 다정해서, 나는 한순간 그에게 내 모든 걸 맡겨 버리고 내 안의 모든 감정까지 털어 내고 싶은 이상한 기분에까지 사로잡혔다.
그때, 아론이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 있으면 아침 훈련이 시작될 터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당연히 참가해야지.”
“하루쯤 쉴 수도 있습니다.”
“훈련을? 설마.”
그럴 수 없다고 착실하게 대답하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성기사의 모범인 네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말레드레드와 있으니 하루쯤 쉬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론은 이내 멈칫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덧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범을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요.”
“네가 완벽한 건 사실인걸. 모두 널 동경하고 있어.”
그렇게 대꾸한 나는 입가를 올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네가 이런 말을 한 걸 알면 다들 놀랄걸.”
나는 가볍게 웃음을 던지며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아론은 나를 껴안고 있던 팔을 순순히 풀어 주었다. 안락하고 포근했던 그의 품에서 벗어나자 아쉬우면서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침대를 덮은 거친 천으로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같은 날, 같은 이유로 빠지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나는 그게 중요한 이유란 듯이 강조했다.
“같은 주점에 있었으니까.”
말을 덧붙이고 이제 간단히 씻을 수 있는 세면실로 들어가려는데, 아론이 반응해 왔다.
“전 남들에게 알려져도 상관없는데요.”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진심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멈칫했다.
“난…….”
아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지도 모른다.
“상관있어.”
“어떤 면에서요?”
“모든 면에서. 너랑 난 지위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지. 생각과 가치관까지……. 너와 만난 건 무척 기쁜 일이지만, 우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이런 침대 위에서만 이뤄져야 해.”
나는 분명하게 말하려고 했다.
“너랑 자는 건 즐겁고 행복해. 되도록 오래 이어 가고 싶지만…….”
아론의 눈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내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겠다는 듯이.
“만약 그 이상을 원한다면 안 돼.”
“너무.”
아론이 다가왔다. 그는 내 몸을 감싼 천이 늘어진 것을 단단하게 얽어 주었다. 그리곤 내 눈을 바르게 응시하며 말했다.
“단정 짓지 마세요. 저뿐만 아니라.”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불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론이 말했다.
“말레드레드도 그 이상을 원할 수 있으니까요.”
“아론.”
“우리 관계를 미리 결정짓고 싶지 않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평소에 그가 만인을 향해 짓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담고 있는 감정이 너무 무거워 어둡게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쉽게 무너뜨리거나 설득시킬 수 없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담긴 듯한.
나는 무언가를 잘못 먹어 목이 막힌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말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을 기분. 애초에 이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 게 현명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으나, 곧 그의 담백한 태도에 그런 생각은 떠내려가듯 희미해졌다.
“가서 마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론은 배려 깊게 말하고 미련 없이 나갔다.
나는 몸을 닦으면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 이상을 원한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누의 말간 거품이 살에 덕지덕지 붙은 체액들을 밀어냈다. 내 안을 채웠던 그의 정액들은 그 뒤에도 한동안 흘러나왔다.
이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완전히 정착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
“말레드레드!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훈련소로 가자 에일이 달려왔다. 그의 얼굴엔 성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리가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일 정도의 사이였던가. 나는 멈칫했지만 곧 애처로운 미소를 보였다.
“속이 안 좋아서요. 먼저 숙소로 돌아왔어요.”
“숙소요? 아아,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 한참을 찾았잖아요!”
“미안해요.”
나는 순순하게 사과했다. 말도 없이 사라진 건 잘못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가 화장실에 간다면서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내 사과에 에일은 한숨을 쉬면서 충고했다.
“다음엔 그렇게 사라지지 말아요. 여긴 수도도 아니라서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단 말이에요!”
수도라고 딱히 안전하다 생각되진 않았고, 무엇보다 그날은 그의 스킨십이 불편해 사라져 버린 것이었지만 에일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은 내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기분이 풀어졌는지 제법 다정한 투로 말했다.
“몸이 안 좋으면 제게 말해요. 보살펴 줄게요.”
그러면서 손을 은근슬쩍 내 어깨로 뻗어 오자 나는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뺐다.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고, 그런 에일을 보면서 가까이 다가온 펠이 미간을 좁혔다.
“그 동작은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어, 그게…….”
“공격을 하려면 정확하게 목표로 날아가야 합니다. 전투 중에 하는 쓸데없는 동작은 위험을 키울 뿐입니다.”
“윽…….”
에일은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연습 중이 아니었고, 한낱 위로해 주려던 동작에 불과했지만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변명해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모른 척했고, 결국 에일은 제 팔을 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무덤덤한 나와 나를 힐끔거리는 에일을 번갈아 보며 펠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훈련에 집중하세요. 마물이 강해지고 있는 만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