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아론의 말 없는 응시가 이어진다. 왜 여기에 있냔 듯이.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마치 너를 찾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같아서 더욱 속이 불편해졌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싶어 먼저 눈을 피했다.
“저분이 여기엔 웬일일까요?”
소환사 하나가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에일은 멍하니 아론을 바라보다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아마 동료들 때문이겠죠.”
때마침 성기사 한 무리가 아론나이드를 불렀고, 아론은 그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주점의 여성은 모두 그를 황홀하게 쳐다보았고 용기 있는 여성은 그의 앞을 지나치는 척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아론나이드는 그 어떤 것에도 온기 있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성기사들에게 다가갔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환사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이곳에 오다니, 뜻밖이네요. 다른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린다고 하던데.”
“그래요? 난 그가 모두하고 사이좋게 지낸다고 알고 있었는데.”
소환사 둘의 의견은 대조되었다. 나는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의 바르고 정중한 아론은 모든 이에게 친절했지만, 그렇다고 친밀하다 싶을 정도로 누군가와 어울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그와 어울리는 유일한 상대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생활 전반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나도 짐작만 할 뿐이다.
에일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는 저래 봬도 꽤나 신분을 따질 거예요. 태생이 워낙 고귀하니, 일반 사람들하고 어울리기가 어디 쉽겠어요? 어느 정도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이를 찾겠죠.”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노예 출신의 성기사들과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누군가 갸웃거리며 반문하자 에일이 심기가 불편한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다른 소환사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멀쩡하네요. 그 많은 마물을 상대하고도 저런 상태를 유지하다니. 정말 대단해요.”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중앙으로 못 가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에일의 어조는 이제 완전히 조롱조였다. 아마도 신분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한 자가 도착하니,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귀족 신분에 유독 자부심을 느끼던 사람이니 말이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술은 왜 안 나오죠?”
목이 탄다. 아론을 보았기 때문일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뭔가 잘못한 듯한 기분에 빠진 것은.
뭐가 됐든 에일은 내가 다른 여성들과 달리 아론에게 넋이 빠져 있지 않자 기쁘단 듯이 반응해 왔다.
“제가 가서 받아올게요!”
잠시 후 에일은 작고 둥근 나무통에 보리 맥주를 가득 담아왔다. 맥주는 자칫하면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톡 쏘면서도 씁쓸한 향을 피워 냈다. 왠지 머릿속이 흐려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에 나는 기쁘게 잔을 들었다.
에일은 내 잔에 맥주를 따라 부어 주고는, 다른 이들에게도 일일이 나눠 주었다.
“좋아요, 그럼 우리의 연대와 팀의 승리를 축복하면서!”
“와!”
“그리고 앞으로 말레드레드와 함께할 날을 기대하면서!”
“오!”
찬사와 호응은 기막히게 이루어졌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잔을 부딪쳤고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물들이 근래에 많이 출몰한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마기가 강해서 놀랐던 이야기, 전투에서 알아 두면 좋은 사소한 비결들이 오고 갔다. 딱히 귀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으나 소환사 하나의 이야기는 기억에 남았다.
“근래 마물들이 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요. 그 말은 마계가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걸까요?”
나는 마계란 단어를 듣자 화산이 보이던 암울한 하늘이 떠올랐고, 오만하게 눈을 빛내던 흑발의 남자 또한 떠올랐다.
“얼른 마왕이 죽어 이 싸움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멈칫. 나는 한 소환사가 그냥 지나치듯 한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만 먹으려는 분위기를 보이자 에일이 의아해하며 몸을 기울였다.
“왜 그래요? 속이 불편해요?”
“아뇨. 많이 먹은 거 같아서요.”
나는 가까워져 오는 그가 불편해서 살짝 몸을 뒤로 뺐다. 그럼에도 에일은 빨개진 볼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했다.
“힘들면 제게 기대요.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걱정하지 말고요.”
술이 오른 탓일까. 벌게진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눈빛에는 욕망이 두드러져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어깨를 잡으려고 하자 잠깐 굳어졌는데, 때마침 누군가 나무통을 바닥으로 거세게 던지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윽, 조심해야지!”
나는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성기사들이 놀라서 원인이 된 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나이드, 자네 취했나?”
금발의 사내는 말 없이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술잔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그는 곧 무릎을 굽혀 그것을 주웠다. 그러자 놀라 달려온 주인이 자신이 하겠다며 서둘러 엉망이 된 바닥을 치웠다.
나는 그쪽을 보다가 아론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모두 아론을 보고 있었는데, 에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 기다리고 있을게요!”
보통 여자가 술을 먹던 중에 바람을 쐰다고 나가면 화장실에 간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그를 떨쳐 버리려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바람을 쐬고 싶었던 맘도 있어서 일부러 주점 입구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숲에 둘러싸인 주점은 생생한 나무 냄새에 잠겨 있었다.
술을 깰 겸 한적한 걸음으로 걷던 나는 갑자기 나무에서 튀어나온 술꾼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게슴츠레하게 나를 보더니 휘청거리는 몸으로 손을 뻗어 왔다.
“크학!”
나는 그 손길을 피하면서 신성력을 뿜어냈고 갑자기 일어난 환한 빛에 술꾼은 눈을 가리며 저 멀리 도망쳤다.
“여자 유령이다!”
라고 외치면서.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이 기억이 그에게 각인되어 여자들에게 무례하게 손을 뻗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왠지 한기가 드는 기분에 슬슬 들어가려던 나는 건물 벽에 붙어 있는 긴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론이었다.
“바보 같은 자군요.”
그는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명한 금안에 비치는 감정은 살기였다. 나는 그의 기운을 느꼈던 걸까. 나를 오싹하게 만든 한기는 그가 내 쪽을 보자 사라졌다.
어느새 금안에는 술꾼을 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령이 어디 있다고.”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까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꽂힌 시선은 비할 데 없이 진지했고 속절없이 일렁였다. 나를 칭찬하기엔 저 자신의 외모가 너무나도 눈부신 그가 나를 향해 쏟아 내는 시선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애절하고 애틋하다.
마치 이 세계에 그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인데, 그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듯이.
아론은 엄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이 그의 눈을 멀게 한 모양입니다. 다행이에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술이 아니었다면 말레드레드를 탐한 그 눈을 제가 멀게 했을 텐데.”
“아론.”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치졸함과 죄책감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눈부신 존재이면서도 나만을 바라본다는 것에 유치할 정도로 우월감이 든 것이었고, 그게 스스로가 졸렬하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져, 결국엔 날 그렇게 바라보는 그의 마음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감정 변화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벅찼다. 그가 그것의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하자 괜히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날 치료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마음과는 달리 어쩐지 날이 선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아론은 잠깐 나를 보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고급 우단처럼 반짝였다.
“답답해서요. 침대에만 있기는.”
“아.”
“왜 그러십니까.”
“아니. 네가 날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거든.”
머뭇거리며 한 대답에 아론이 살짝 미소 지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건…….”
“제가 날마다 말레드레드의 침실로 찾아들어서요?”
“……!”
나는 그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향기가, 남자의 강렬한 체취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니면, 제가 말레드레드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흥분하기 때문에요?”
나는 말문이 막혀 그를 쳐다보았다. 아론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나는 그에게 기껏해야 나를 찾아서 여기에 왔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 대답을 듣게 되면, 무사해서 다행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다. 무리한 치료도 자제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이기적인 태도로 그에 대해 심란했던 심정을 감추려고 했던 나는 뜻밖의 질문에 오히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봐야 했다.
“맞아요. 저 말레드레드를 만나러 왔어요.”
아론의 한 손이 천천히 내 볼에 다가왔다. 그러나 닿지 않고, 손은 뺨 근처에서 멈췄다. 언제든지 만질 수 있지만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 듯이, 그 섬세한 감정을 고스란히 비쳐내는 눈빛은 강렬했다.
“침대에서 말레드레드만을 떠올렸으니까요.”
“……!”
“쉬고 있어도, 눈을 감아도 여전히 말레드레드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론.”
“그래서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왜 여기 있냐고 추궁하실 겁니까.”
아론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제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시겠습니까. 늘 해 왔던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