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8화 (18/220)

18.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펠과 함께하는 강도 높은 훈련은 계속되었다. 나는 아론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훈련에 집중했다.

펠은 마물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무기와 변칙적인 공격을 꽤나 상세하게 이야기하며 일일이 시범을 보여 주었고, 우리는 때때로 그의 수하가 된 것처럼 지시를 따르거나, 지팡이를 잡고 그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그는 용병 출신답게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전투에 능했다. 에일은 그의 가르침이 뼈대가 없고 즉흥적이라고 내내 불만이었지만 나는 그가 알려 주는 것들이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열심히 임했다.

실제로 그날 오후에 있었던 작전에서, 펠의 지시를 따라서 마물을 수월하게 소환 영역으로 날려 버렸고, 큰 부상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함께 식사해요.”

에일은 승리에 잔뜩 도취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망설였으나 한 번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그가 활짝 웃었다.

그는 몹시 기뻐하며 곧바로 다른 소환사들도 불러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자들은 내 쪽을 슬쩍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에일에게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조금 불편해졌을 때 에일이 돌아왔다. 그는 바로 주점으로 가자고 했다.

“펠은…….”

나는 멀어지는 성기사를 발견하고 말을 꺼냈으나 에일은 단호했다.

“그는 성기사잖아요. 우리랑 어울릴 수 없어요.”

배척의 눈빛은 냉정했다. 나는 그 말은 팀을 꾸린 취지에 어긋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른 소환사들이 몰려오자 목 아래로 질문을 내리누를 수밖에 없었다.

주점은 멀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농장을 개조해 만든 듯한 넓고 허름한 2층 건물은 1층은 주점으로, 2층은 여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많진 않은지 여관으로 올라가는 바깥 계단은 한산해 보였으나 1층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넘쳐 났다.

평복을 입은 소환사와 성기사.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커다란 나무잔을 연신 부딪치며 쾌활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 주변에는 그들을 힐끔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외부의 손님들을 반가워하는 듯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대부분 신성국의 사제를 동경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몇몇은 술에 찌들어 침묵과 정적을 갉아먹는 외부인을 혐오한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했다.

에일은 주정뱅이 하나가 자신을 주시하자 매우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주인에게 말해 그를 기어이 나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반인 하나를 쫓아낸 그는 만족스럽단 듯이 테이블을 잡아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요. 보리 맥주를 먹을 건데, 뒷맛이 아주 깔끔해요. 맘에 들 거예요.”

그는 묻지도 않고 주문을 했고 음식을 시켰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다른 소환사들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주도해 가는 상황이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술을 잘 즐기지 않는 나는 에일이 시킨 술의 양이 부담스러웠으나 어차피 입만 대고 말 것이라 생각하며 잠자코 앉았다.

“말레드레드는 어디서 왔죠? 귀족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물잔을 홀짝이고 있는데 누군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물어왔다. 단번에 여러 개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공격에 반응하는 짐승처럼 미소 지었다.

“노르타에서요. 정식 귀족은 아니고요.”

“정식 귀족이 아니에요?”

에일이 바로 반응했다. 아쉽다는 눈빛이 강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가문의 성을 받지 못해서요. 신분으로 치면 평민이나 다름없죠.”

“저런…….”

누군가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했다. 지난날 내가 느꼈던 애매한 신분의 고충을 안다는 듯이 동정하는 눈길을 보내면서.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소환사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으니까.”

그러자 질문했던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환사가 어디 되기 쉬운가요? 귀족이라도 신성력이 없으면 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귀족들은 물려받을 성이 있고 영지가 있잖아. 신성력 따윈 없어도 잘 살 수 있지.”

에일이 정색하며 끼어들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는 멈칫했다가 다시 우아하게 존댓말을 했다.

“제 말은, 귀족이면 나쁠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건 당연하죠.”

“논의할 게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에일의 말에 다른 소환사들이 덩달아 동조해 왔다. 나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귀족이란 신분이 해가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한때 무척이나 백작가의 정식 후손이기를 바랐던 만큼, 나에게도 귀족이란 지위는 이상향처럼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만 에일의 정색이 신경 쓰였을 뿐이다. 귀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그의 태도가. 마치 소환사로서의 너는 의미가 없고 귀족일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일은 동료들의 반응에 더 힘을 얻은 듯이 말했다.

“귀족이 될 수만 있다면 되어야 해요. 아무리 평민들과 귀족들의 차이가 없는 이곳이라 할지라도……. 암암리에 대접이 다르잖아요. 신분이 고귀한 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안전하게, 빨리 가게 돼요. 그게 ‘사실’이잖아요.”

에일은 사실이란 단어를 유난히 강조하고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사제로 유명해지면 어떤 출신이든 작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평민 출신의 거상이 작위를 받으려면 재산의 상당 부분을 국가에 귀속시켜야 하는 만큼, 지위란 건 얻는 것 자체가 힘든 거예요.”

에일은 모두를 가르치듯 오만한 시선을 깜박였다.

“평민 성기사가 나이트가 되면 백작의 지위를 얻는다고 하지만, ‘나이트’ 자체가 되기가 밤하늘에 별 따기인걸요. 그만큼 귀족의 지위는 특별하죠.”

그는 은근히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물론 그런 특별한 것도 쉽게 얻는 방법이 있어요. 귀족인 사람과 결혼하는 거요.”

“아아. 그게 가장 좋네요!”

“맞아요. 그것만큼 최고의 방법이 없죠! 배우자 덕에 바로 귀족이 될 수 있으니까.”

그들의 맞장구는 어딘가 인위적이었다. 마치 고용주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쳐야 하는 가련한 시종들의 처지처럼, 그들은 에일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에일이 주점으로 오기 전에 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될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을 치켜세우라고 한 거겠지?

내게 눈을 빛내오는 에일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추리는 거의 정확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건조하지만 무례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진하지도 않은 미소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일은 내 반응이 시큰둥해 보이자 초조해졌는지 아예 노골적으로 말했다.

“혹시, 말레드레드. 귀족의 지위를 얻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말해요. 전 말레드레드가 공을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듯이 회의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일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전 수도 가문 출신이잖아요. 말레드레드가 알면 깜짝 놀랄 사람들을 안다고요.”

다른 소환사들이 역시 재빠르게 맞장구쳐 왔다.

“맞아요. 에일은 수도의 유명한 보노아 가문이에요!”

“보노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죠. 소환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영지에서 비단옷을 입고 와인을 먹고 있었을지 몰라요!”

다른 소환사들이 과장된 어조와 손동작으로 그를 치켜세웠다.

에일은 더욱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가슴은 암컷에게 구애하는 수컷처럼 내밀어져 있었는데,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이 불편했다.

아마도 에일에게 성적인 감정이 없어서일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나 고민되었다.

내 입장에선 에일이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온다는 게 신선했지만 한편으론 귀찮았고 불편했다. 에일에겐 동료로서의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들지 않았다.

다만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잘 협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가 내게 악의를 품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의 말에 적당히 호응해야지,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그런 연유로 머뭇거리자 에일이 그 태도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관심이 있다면 언제 한번 저택에 놀러 올래요? 유명한 귀족들도 소개해 주고, 우리 저택도 구경시켜 줄게요.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보석함도 보여 줄 수 있어요. 아주 값지고 아름다운 세공품들로…….”

에일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 귀로 흘리며 듣던 나는 문득 시끄러웠던 주점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막 주점에 들어선 남자가 보였다.

그는 키가 컸고, 압도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살짝 여윈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완벽한 외모에 해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고결하고도 신실한 분위기가 더욱 돋보이도록 창백한 미를 더해 주고 했다.

깊게 들어간 눈. 침착하게 가라앉은 금안은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나는 숨을 멈췄다.

“……아론나이드.”

누군가 넋 나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섬세하게 조형시켜 만든 듯한 그의 외양과 치명적일 만큼 금욕적인 분위기는 주점 안의 사람들을 모두 홀려놓은 게 분명했다.

하기야. 나도 그러하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반했다는 감정에서 그러한 게 아니었다. 내 가슴은 무섭도록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에게 진 빚이 있는데, 그걸 모른 척했다가 당사자를 만나 가슴이 찔린 것처럼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 전에 방 안을 훑던 아론나이드의 시선과 마주쳤고, 괜스레 흠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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