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7화 (17/220)

17.

나는 그러자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던 내 미소에도 에일은 반갑다는 듯이 얼른 반응해 왔다.

“어려운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봐요. 제가 좀 더 경력이 있으니까. 말레드레드보다 훨씬 능숙하게…….”

“모였습니까.”

그때,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갑옷을 입은 성기사였고,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가 성기사 펠일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잘 부탁합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인사로 자신의 성정을 알리고 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그는 실전에 능한 전사였다. 검을 돌리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에일이 ‘저 사람, 용병 출신이었대요.’ 하고 작게 속삭여 온다.

펠은 우리에게 전투 시 어떻게 마물을 몰아갈지에 대한 이야기와 어떻게 보조를 해 줬으면 좋을지 의견을 내며 거침없이 그것을 동작으로 보여 주었다.

“하아, 하아…….”

시범을 보이고 훈련하고. 몇 번 반복하지도 않았는데 나와 에일은 벌써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펠은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체력을 좀 더 길러 놔야 할 겁니다.”

“시, 실전에서는…….”

에일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이렇게까지 체력이 소모될 일이 없거든요!”

“아직.”

펠은 단호하게 강조했다.

“없었을 뿐입니다. 언제든 마물이 우리의 진영을 흩뜨리며 소환사를 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기사가 있는 거잖아요.”

에일의 말에 펠은 더욱 인상을 썼다. 에일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 같았다.

“성기사는 마물을 상대하는 사람이지 소환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윽……!”

에일은 반항 가득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표정은 심기가 불편해진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펠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마물은 성기사에게만 달려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신을 믿는 모든 존재의 말살이며 인간계의 파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성력을 다루는 소환사도 마물을 단독으로 상대할 줄 알아야 그 사악한 것들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마물은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아요! 그냥 자신의 앞에 있는 자를 상대하려고 한다고요!”

“우리가 마물만 상대합니까.”

펠은 낮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 끔찍한 것을 경험한 사람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가 겪었던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그 두려움과 공포가 느껴졌던 것이다.

“마물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척 강하고요. 보통 소환사부터 제거하려 듭니다.”

그는 지금 마족을 말하고 있었다. 마물을 조종하는 마족들은 개개인의 역량이 마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으며 전략을 짜는 면에서도 마물보다 훨씬 뛰어났다. 마족 여럿과 전투를 벌이면 살아남는 일이 요원해질 정도로 보통 피해가 크게 야기되곤 했다.

“그러니 마물이든 마족이든,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으…….”

에일은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으나, 그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은 걸 알기에 더 말대답을 하지 않았다. 펠은 그런 그를 무뚝뚝하게 쳐다보고는 들고 있던 대검을 등 뒤로 찔러 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는 에일과 나 모두를 번갈아 보았다.

“내일부터 훈련의 강도를 더 높일 겁니다.”

그는 가차 없이 말했다.

“각오하고 오세요.”

펠이 떠나가자 에일이 바로 인상을 구기며 그를 욕했다.

“아니, 자기가 우리의 상관이야, 뭐야? 용병이라서 그런지 아주 제멋대로에 무식한 티를 내는데…….”

에일은 분노하며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노예 출신이라는 소문이 아주 잘 들어맞는 거 같죠?”

“……체력을 길러서 나쁠 건 없을 거 같아요.”

나의 대꾸에 에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를 옹호할지는 몰랐다는 얼굴이다.

“어, 어…… 그가 상관처럼 구는 게 괜찮다는 거예요?”

“살아남으려면 그와 호흡을 맞춰야 하잖아요. 실제 전투에서도 성기사들이 지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에게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하, 하지만 말레드레드…….”

무언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듯한 그를 보며 나는 일부러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잘해 봐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윽…….”

에일은 내 반응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말레드레드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성적인 신호를 보내오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처럼 새로운 팀을 짠 성기사와 소환사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 무리에서 아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종이에 아론의 이름이 있었던가? 순간 의아함이 들어서 밖으로 나섰다. 에일이 따라오려 했으나 아는 소환사가 말을 걸자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상하다. 왜 없지.’

아론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다. 벽보에 이름이 쓰일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그럴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론은 황제에게 밉보이는, 이른바 신분의 덕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현재는 뛰어난 성기사로서만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나는 왜 그가 이번 팀 변동에서 빠졌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래서 보고를 하러 갔을 때 카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뭐? 왜 성기사 아론나이드의 이름이 없냐고?”

카란의 얼굴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그의 무심한 눈빛엔 평소와 달리 의구심이 가득했다.

“자네도 아론나이드와 한 팀이 되고 싶어서 그러나?”

“예?”

“아니, 이번에 팀을 구성하는데 말이야. 얼마나 말들이 많은지. 아론나이드와 같은 팀으로 배정해 달라는 요청들이 어마어마했지. 소환사들은 물론이고 애초에 같은 팀이 되는 게 불가능한 성기사들까지.”

“…….”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나이트가 될 거라 보아서인가. 미리부터 잘 보이려고 한단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자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이 가느다란 눈초리로 시선을 보내왔다.

“자네도 그런 쪽인가? 미리 친분을 쌓아 출세를 가늠해 보려는?”

“전 그냥…….”

아론과의 관계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돌려서 말했다.

“궁금해서요. 워낙 인기 있는 분인지라…….”

“흠. 호기심이란 말이지? 뭐. 이미 여럿에게 같은 질문을 받긴 했지.”

카란은 불편한 시선을 접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가 왜 이번에 누구와도 한 팀이 되지 않았는지는 나도 몰라. 상부의 지시였다고만 하니까. 그저 상부도 아니고, 아주 높은 곳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더군.”

나는 깊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높은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에, 가장 번화하고 호화로운 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곳에는 금빛 왕관을 쓴 여인이 있었고, 그 영광의 관을 쓴 여인이 제국을 호령하는 사령탑이었다.

바로 제국의 황제 아드리아. 아론의 이모가 되는 사람이 말이다.

카란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그 빛나는 성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다른 건 몰라도 아론나이드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말이야.”

“…….”

“이제 답이 됐나? 아니면 그의 숙소까지 찾아가 진위를 확인해 보겠나.”

나는 그가 조금 짓궂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청에 시달렸던 탓일까. 성격이 나빠진 것도 같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후자가 끌리네요. 숙소까지 찾아가 진위를 확인해 볼게요.”

“뭐…….”

그가 굳어져 반응하기 전에 나는 몸을 돌렸다. 황당해하고 어이없어하는 게 느껴졌지만, 애초에 짓궂은 질문을 한 것은 그였기 때문에 나름 적당하게 잘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정말’ 아론에게 가 볼 참이었다. 그를 만나 고맙다는 이야기, 몸은 괜찮냐는 이야기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의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지나가는 성기사들이 떠드는 게 들려왔다.

“저것 봐. 아침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늘었어.”

“아론나이드가 꼼짝도 못하고 있어서 그런가? 다들 저리 걱정하는 걸 보면.”

“말도 마. 마물이 수십 마리가 나타나서 몰려들었대. 지원이 어렵고 소환 영역도 만들기 까다로운 산에서 전투를 했던지라 아론나이드가 선두에서 무척 고생했다고 하나 봐.”

“수십 마리? 맙소사. 살아남은 것만 해도 굉장한데.”

“그렇지. 그러한 마물을 상대하려면 신성력은 당연히 바닥이 날 수밖에 없을 거야. 누가 새벽에 아론나이드를 잠깐 마주쳤는데, 안색이 창백했다고 하더군. 죽어 가는 것처럼 말이야. 아마 일주일은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숨이 막혀 왔다. 아론의 상태가 나 때문이란 자책감이 들었다. 마물을 밤새 상대한 데다 치료를 위해 갖고 있던 신성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그가 어찌 멀쩡할 수 있었을까. 죽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심각한 상태란 의미였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다.

그가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고 손에선 식은땀이 났다. 몸 관리는 성기사의 필수 요건인데. 어째서 그는 내 상처에 그 중요한 신성력을 쏟아부은 걸까.

‘제가 보호하고 싶습니다.’

황금빛 눈동자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 말레드레드를 지킬 만큼 강해졌습니다.’

나는 그의 맹세를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가 누워 있을 천막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만약 저곳에 그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죽음을 앞둔 것이라면, 그래서 곧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느낌에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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