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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3화 (13/220)

13.

그가 지팡이를 짚은 채로 가고 나자,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엎드려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나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차려입었다. 어깨와 가슴에 방어구를 착용하고, 앞코가 눌린 장화를 신자 답답함과 책임감이 한 쌍처럼 몰려온다.

나는 천막 한쪽에 걸린 작은 사각 거울을 바라봤다.

투박한 목제 거울 속엔 은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젊고 곱상했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는 혈색이 돌아 건강해 보였으며, 가지런한 몸매는 흰색 옷과 검은 방어구에 갇혀 훨씬 늘씬해 보였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거울 속 그녀가 따라서 눈을 움직였고 눈빛은 훨씬 또렷하게 변해 있었다. 보라색 눈에는 알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예 없다고도 볼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나는 그 눈에 현명함과 책임감을 담으려고 했다. 그게 어떤 느낌일까 고민하면서 믿음직하게 웃어 보이려고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

그러나 미소는 건조했고, 눈빛은 냉담했다. 남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얼굴이 가면 같아 보였다.

내가 정말 아론의 말처럼 하나도 변치 않았을까. 달콤하고 상냥하며 두려움에 주저하지 않는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아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그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게 아니라 아론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아론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냥 좀 아쉬웠을 뿐이다.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고 하니.

지팡이를 챙겨 들었다. 천막을 나와 훈련소로 향하자 한적해진 주변이 보인다. 내가 늦잠을 자는 사이, 대부분이 작전에 참여하느라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오후의 훈련소에도 사람이 없다. 보통 오전에 집중이 잘 되어 신성력을 끌어모으기 좋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런 이유보다 오전에 오면 성기사들과 함께 연습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신성력을 풍부하게 뿜어내는 성기사들 사이에서 연습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더 신실한 사제가 된 기분으로 진지하게 훈련에 임하게 됐으니까.

그러나 고요함이 지배하는 오후의 훈련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 시간보다 탄력이 떨어진 감독관의 지시를 받으며 훈련하는 것은 온전히 내가 어떤 상태인지에 집중하며 훈련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팡이를 노려보았다. 힘은 손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숙이 존재하는 영적인 기운에서 이끌어내는 것이다. 주문은 그저 그 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수단일 뿐, 결국엔 사제로서 신의 위대함, 신을 향한 믿음을 떠올리며 내 안의 힘을 끌어내는 게 중요했다.

“좋았어!”

감독관의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시작한 열이 전신으로 번져 나간다. 몸이 따뜻해지자, 나는 그 온기를 손끝에 집중시키려고 했다. 감독관은 내 손끝에 흰 빛이 돌자 더 강한 목소리로 격려했다.

“더 그러모아!”

그의 목소리에선 초초함이 느껴졌다.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빛을 더 끌어내서 소환 영역을 그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차원의 문이 닫혀 버려!”

그러나 내가 힘을 증폭시키기도 전에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가슴속은 차가워지고, 머릿속엔 잡념이 들어찬다. 아무리 모으려고 해도 응집되지 않는 모래알을 보듯이 내 안의 온기는 부서져 버렸고, 어느새 손끝의 흰 빛들은 흐릿한 색감으로 변해 자취를 감췄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팡이를 쥔 손이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허망함만이 가득했다.

감독관의 아쉽다는 평가가 따라왔다.

“신성력을 끌어 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군.”

감독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와 신성력의 총량이 비슷해. 연습을 하면 조금이라도 늘만한데 말이야.”

“…….”

“어쩔 수 없지.”

그는 내가 선천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듯이 말했다.

“소환 영역을 그리는 건 무척이나 뛰어나니까, 신성력은 다른 소환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나는 말 없이 서 있었다. 감독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내 기색을 살펴 왔다. 내 얼굴에 드리워진 실망의 그늘을 읽었는지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위급한 상황에선 혼자 소환 영역을 그려야 할 경우도 생겨. 만일을 대비해서 한가할 때 연습을 많이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감독관은 일부러 훈련의 양을 부담스럽게 지정해 주고는 자리를 비웠다. 나는 한참이나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지팡이를 쥐었으며, 신성력을 모았다가, 손에 맺힌 땀을 닦기를 반복했다.

“어, 아직도 여기 있었나?”

감독관이 다시 들어온 건 몇 시간 후였다. 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는 나를 보면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지? 지원 요청이 들어왔는데. 다른 소환사들은 이미 다 나가 있는 상태라 자네밖에 갈 사람이 없군.”

“어디로요?”

“멀지 않아. 이 근방 에렌모르의 숲.”

“알겠습니다.”

나는 늘어진 몸을 추슬렀다. 훈련 양을 채우느라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지원 들어온 것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감독관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타고 가면서 숨 좀 돌리게. 거의 다 처리하고 몇 마리 안 남았다고 하니까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될 거야.”

“네.”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훈련소를 나왔다. 지원이 급하게 이루어졌는지 준비된 마차는 잔뜩 흥분한 어린 마부가 몰고 있었고, 마차 안에는 다른 지원 인력인 성기사가 불안한 듯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동작을 초초하게 반복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 막 훈련소를 나왔는지 앳된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를 방해하지 않은 채 마차의 덧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밖의 풍경이 거칠게 흔들거렸다. 에렌모르 숲으로 지름길을 통해 가려면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쿵.

‘…….’

나는 아픈 머리통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 뒤로도 마차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마부가 흐악! 안 돼! 헉! 이런 새된 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마차는 돌부리를 피하지 못했고, 나는 몇 번이나 더 머리를 박아야 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창백해요.”

그건 원치 않게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내 굳어진 얼굴을 힐끔거리며 보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전 지원을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정식 작전도 참여해 본 적이 없고…….”

“훈련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거예요.”

나는 적당히 대꾸했다. 친절하게 위로하기엔 내 상태가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는 그 말에도 위안을 받았다는 듯이 반갑게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래야죠. 그 훈련을 어떻게 견뎌냈는데.”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은 얼굴은 얼핏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무척 어린 시절에 성기사 훈련을 받게 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신성력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주근깨가 잔뜩 핀 천진한 볼을 끌어 올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함께 잘해 봐요. 전 레너드예요.”

“말레드레드예요.”

나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인사를 나누자 친근함을 느꼈는지 더 물어왔다.

“소환사죠?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전 수도의 롯 가문 출신인데 혹시 알고 있는…….”

“지금 이야기할 건 아닌 거 같아요.”

냉정히 말하자 머쓱해졌는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사담이 긴장감을 낮춰 준다는 의견도 있지만 내 경우엔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차감이 좋지 않은 마차를 타서인지 말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고, 나는 마차가 멈춰서야 그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다.

“롯 가문, 들어본 적 있어요.”

“아…….”

침울해진 그에게 다시 말을 걸자 그의 눈이 커졌다. 나는 담담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잘 해치우고 돌아가면 가문에 이야기할 거리가 생길 거예요.”

“네! 모두 처리하고 가요!”

그는 내 충고가 좋았는지 다시 환하게 웃었다. 단번에 밝아진 얼굴에 속을 알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숲 위쪽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모두 처리해야죠.”

이상한 먹구름이 그곳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동시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마기가 그곳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에렌모르 숲 근방. 나는 숲이 끝나는 지점에 바로 마을이 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는 아닌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런 곳에 마물이 떨어지면 필히 전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왔나? 생각보다 빨리 왔군!”

작전을 지휘하는 성기사가 나와 레너드를 보며 외쳤다. 마부의 거칠고 난폭한 운전이 시간을 단축했다고 해야 할까. 비록 이마엔 피멍이 든 거 같지만 말이다.

“좋아, 자네는 소환사 1 자리에 들어가고, 자네는 성기사 2 자리로 가!”

가운데에 마물을 두고 성기사가 그것을 둘러싸고, 그 뒤쪽에 소환사가 간격을 두도록 배치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1자리는 성기사 바로 뒤쪽의 자리로, 소환을 주도하는 자리였다.

나는 이전의 소환사 1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한 소환사가 피 칠갑이 된 옷을 입은 채로 사제들에게 기절한 채 실려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에 지팡이를 꽉 쥐었다.

“집중해! 몇 마리 안 되는데 이상하게 강하니까!”

이상하게 강하다. 그 말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었다. 마물의 능력은 종잡을 수 없었으나 그들의 마기는 측정이 가능했기 때문에 마기가 강할수록 공격력과 생명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하게 강하다는 의미는 뿜는 마기에 비해 능력치가 매우 좋다는 것으로, 처리하기가 까다로운 마물이라는 것이다.

“큭! 또 날아온다!”

지휘하는 성기사가 소리쳤다. 암녹색 마물 한 마리에서 채찍 같은 촉수가 빠져나와 그대로 성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앞선 성기사가 신성력을 강하게 뿜어 촉수를 잘라 버리자, 보란 듯이 촉수가 두 개로 늘어났다.

“어서, 나머지 녀석들이 도망간다!”

지휘하는 기사는 뒤쪽으로 달아나려는 마물을 보면서 다른 기사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성기사들이 반으로 나누어져 그쪽으로 달려갔고, 마물들은 반짝이는 신성력에 둘러싸여 괴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소환 영역을 다 그렸나?!”

지휘하는 성기사가 외쳤다. 나는 성기사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경로 끝에 소환 영역을 집중해 그리고 있었다. 소환사 1이 만들었던 소환 영역은 사라졌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야 했는데, 소환사들이 내가 집중한 모습을 보면서 얼른 신성력을 보조해 왔다.

“크헉!”

“발광한다!”

그때, 마물들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를 뻗어 내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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