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2화 (12/220)

12.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샌가 그의 몸을 따라서 침대에서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침대 아래로 머리가 떨어질 지경이 되었는데, 그는 오히려 그 상태를 더 심화시켜서 내 허벅지를 골반에 걸치고, 양다리를 붙잡아 몸을 거꾸로 세운 채로 관계를 계속했다.

“아‥‥‥.”

몸의 피가 모두 머리로 쏠리는 기분. 나는 힘이 빠졌고, 눈앞이 흐려졌다. 뜨겁고 축축한 열기가 내 몸을 녹아내리게 하고 있었고, 그의 성기가 내 몸을 제멋대로 휘젓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그의 아래에서 허물어진 육체였다.

“으…….”

그러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마왕이 가늘어진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체력을 좀 더 키우는 게 좋겠군.”

당신이 고른 체위 때문이라고 말대꾸하고 싶다. 힘이 빠져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보면서 마왕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와 성기사를 모두 상대하려면 말이야.”

그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타올랐다.

“단 하룻밤에.”

멈칫. 나는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룻밤에. 그 단어가 왠지 강조된 거 같다고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잘못 느낀 것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고, 마왕은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뭐지?”

“아뇨, 이런 이중적인 관계가 싫다는 거 같아서…….”

“이상한 말을 하는군.”

마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나는 그대의 모든 것을 알고 유희를 권했어. 그대가 더욱 흥분하길 바라면서.”

“…….”

“그러니, 내 의도를 의심하지 말도록.”

마왕은 여전히 매혹적으로, 그리고 암담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원할 때까지 그대는 나를 가져야 하니까.”

원할 때까지. 그 말은 아직도 그가 나에게 질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안도했다. 그의 존재가 여전히 불편하고 두려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와 관계하는 것이 어른들 몰래 금기의 장난을 저지르는 것처럼 즐겁고 재밌었기 때문에, 이 관계가 당분간은 이어지길 바랐다.

나는 솔직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고, 마왕은 그런 나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보았다.

“기운이 다시 돌아온 거 같은데. 계속하지.”

마왕이 다시 몸을 움직이자, 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침이 다가와요.”

완곡한 거절의 의미였다. 아론이 나갔을 때가 새벽이었으니 곧 있으면 아침 훈련 시간이었다. 나는 밤새 두 남자를 통해 욕망을 마음껏 채운 상태였는데, 여기서 더 채우려 하다가는 소환사의 일까지 그르치게 될 판이었다.

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지금 고작 일을 해야 한다고 지하 세계의 왕을 거절하는 건가?”

“전 지상 세계에서 속했으니까요.”

“그 말은, 내가 지상 세계까지 서둘러 점령해야 한다는 걸 뜻하나?”

“아, 아뇨…….”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대꾸해 올 줄 몰랐던 것이다. 설사 내가 욕망을 갈구해 마왕과 관계하는 사제라고 하더라도, 마왕이 우리 세계를 점령하는 걸 바랄 정도로 정신 나간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신을 모시는 사제였고, 마물과 싸우는 소환사였다. 신성국에 소속된 전사로서 일하고 싶었다.

‘어쩌면 노후까지.’

잠깐 카란을 떠올려 본 나는 그의 자상을 생각해 냈고, 마족과의 전투까지 연상해 버렸다.

결국 내 생각의 종점은 마계의 지배자인 마왕에게 다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나의 평안함이나 노후를 망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근원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마음으로 마왕을 딱딱하게 쳐다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로 받아쳐 왔다. 왠지 능글맞은 미소였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

“지금 제게 농담한 거예요?”

“그대의 반응이 재밌으니까.”

“…….”

“무엇보다.”

붉은 눈이 빛난다. 그가 갑자기 손을 뻗자 나는 움찔했다.

“이렇게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해 오는 존재가 많지 않거든.”

“……!”

“신기해서 자꾸 찔러 보게 되지.”

마왕이 팔을 뻗자 눈을 찔끔 감았다. 때리나 싶어서 그런 것인데, 뜻밖에도 그는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긴 손가락으로 솜털을 떠밀듯이 섬세하게. 찔러 본다는 말과 사뭇 다른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대는 대범해. 이렇게 날 두려워하면서도.”

마왕이 뺨을 만지자 절로 떨림이 찾아온다. 핏빛 눈동자 아래 평정을 찾을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사 신성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제 의견을 말하는 데는 거침없지.”

“…….”

“이중적인 반응이야. 무서워하지만 실제론 꿈속에서 만나고 있는 허상처럼 나를 담담하게 대하니까.”

나는 정확히 나를 꿰뚫어 보는 그의 말에 흠칫했다. 마왕은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는 듯이 캐물었다.

“내가 실재하는 이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그런 건가? 내 존재를 두려워하면서, 내게 대담하게 구는 것은?”

틀린 의견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부르는 시간은 늘 밤이었고, 잠들면 꿈을 꾸듯이 이곳으로 이동했으니까.

“……제가 뭘 실수했나요?”

나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마왕의 이런 태도가 내게 분노해서 이런 것이라면 내 목숨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니.”

다행히 마왕은 내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를 올린 채로 소리 없이 웃었을 뿐이다.

“그저 그대가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는 거 같아서.”

“네?”

“내가 그대의 밤만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이야.”

마왕은 흠칫한 내 뺨에서 손을 떼고 가까이 다가왔다. 정교하고 오롯하게 빚어진 이목구비. 인간의 것과 다른 적색 눈동자가 나를 관통하자 숨기고 싶던 내면까지 모두 간파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왕은 내 귓가에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런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고 말해 주고 싶군.”

마왕은 천천히 내 이름을 불렀다.

“말레드레드.”

나는 왠지 굳어 버렸다. 그는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관계를 맺었든 간에 자신을 여름밤의 꿈처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거라고, 그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다. 나는 이 관계를 얕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몽상처럼, 한때 즐겼다가 잊고 말 순간의 꿈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게 이 관계를 속 편하게 즐길 방법이었다. 마왕은 그런 나의 안일함을 간파했다는 듯이 비웃었다.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안색이 파리해졌군.”

굳어 버린 내 얼굴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번에도 웃고 있었다. 성격 나쁜 그가 취할 만한 태도였으나, 나는 속이 편치 않았다. 그가 내 생각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불편했고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통찰력으로 무언가 협박을 하는 게 아닌가, 인간계의 내 입지를 곤란하게 하는 게 아닌가, 두려웠지만 마왕은 더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흥이 다했으니 돌려보내 주지.”

마왕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다음엔 좀 더 뇌리에 남을 관계를 맺으면 되니까.”

그가 허리를 뒤로 물리자 상상을 초월한 감각이 덮쳐 왔다.

“아…….”

나는 얼빠진 탄성을 내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 사이로 많은 양의 정액이 흘러내려 가는 게 느껴졌다.

마왕은 여러 번 사정했고, 그때마다 내 안에다가 거침없이 체액들을 쏟아 냈다. 따라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정액이 음부와 허벅지, 다리와 침대를 적셨는데, 그 탓에 하체가 끈적거리는 늪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마왕은 짤막하게 작별의 말을 했다. 나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채로 엉거주춤하게 그를 바라보았고, 곧 어둠이 내 시야를 점령하는 것을 느꼈다.

마왕은 끝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각인시키려는 이처럼.

나는 그에 저항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들었을 때, 익숙한 침대가 보였다.

‘……피곤해.’

내 육신은 체력적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몸을 닦고서, 나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한 시간만 눈을 붙여야지, 생각했고, 금세 수마가 덮쳐 왔다.

“……!”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드레드!”

아직도 머릿속이 멍하다. 나는 귓가에 앵앵거리는 소음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말레드레드! 자네 안에 있나!”

벌떡.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옷 위에 커다란 망토를 걸치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굳어진 얼굴의 카란이 보였다.

“자네, 뭘 했기에 훈련에도 참석하지 않고 부름에도 뒤늦게 응하나? 무슨 연유로…… 응?”

훈계하려던 그는 내 옷차림과 얼굴을 보더니 이마에 주름이 파이도록 인상을 더 찡그렸다.

“자고 있었나?”

“……죄송합니다.”

“어제 했던 전투가 고됐던 것도 아니고. 마물은 약한 수준이었잖아.”

카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은 두 남자와의 정사로 몸이 지쳤던 탓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럴싸한 변명이 당장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자 카란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혹시 내 말 때문인가?”

“그게 무슨……?”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카란은 지팡이를 꼭 쥔 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젊은 혈기가 넘쳐 무모하면 오래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

“아.”

나는 그제야 어제 했던 그의 충고가 떠올랐고,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늦잠을 잔 거예요. 소환 영역을 늦게까지 그리다가…….”

“그렇군. 다행이야.”

나도 모르게 움칫 놀랐다. 그가 무슨 의미로 다행이라고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네?”

“아니. 난 자네가 내 말을 너무 각별하게 받아들였나 해서. 그게 아니었다니 다행이란 말이지.”

카란은 안도했다는 듯이 설명했다.

그의 입장에선 늘 모범적이었던 내가 갑자기 훈련을 빠져 버리니 무슨 이유 때문인가 고민했을 것이고, 고민 끝에 자신의 충고 때문인가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란은 섬세한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말이 수하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봐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 그는, 외모에선 느낄 수 없는 여리고 깊은 속내가 있었다.

카란은 제법 솔직하게 말한다며 말을 이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었어. 실전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소환사에게. 간혹 그런 이야기에 금세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리는 녀석들이 있거든. 자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워낙 새로 들어온 사제들이 많다 보니 걱정했네.”

그의 우려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마물 소탕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의 최전선을 의미했고, 실제로 죽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종종 누군가의 충고에도 겁을 먹고 그만두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카란은 한층 안정되고 진정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소환 영역을 그리는 데 너무 몰두하지 마. 그러다가 상상도 못한 곳으로 끌려가는 수가 있어.”

나는 멈칫하며 그를 바라봤다. 충고하는 게 분명한데도 마치 취조당하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원래 있었던 장소로 돌아오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기지.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같이 싸웠던 소환사 중엔 시체도 거둘 수 없는 자들도 있었어. 어디로 사라진 건지도 모르고.”

“…….”

“마계라고 생각은 하지만 어찌 됐든 행방을 알 수 없으니까. 추측과 의심만 난무할 뿐이지. 자네는 각별히 조심해야 해. 소환 영역을 그리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이건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선배로서 하는 충고니 새겨듣게나.”

“……감사합니다.”

나는 급하게 뛰는 심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다행히 내 변화와 애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카란은 다시 평소의 무심한 얼굴이 되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럼 충고는 이만하고. 오늘 빠진 훈련은 오후까지 두 배 늘려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내 고분고분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란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