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화 (8/220)

8.

“그, 그렇, 아읏, 지 않아……!”

반항심이 솟구쳤다. 내가 유혹과 음욕에 약하고, 그걸 바라는 여자인 건 맞지만 이런 거친 행위를 난데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수더분한 건 아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맞서려고 했다.

그때, 내 눈앞에 무언가 반짝였다. 그가 불러낸 거울이었다.

“네 모습을 봐.”

마왕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거울에는 어떤 여자 하나가 있었다. 평소에 남들이 부러워하던 정결한 은빛 머릿결은 잔뜩 헝클어져 알몸 위로 이리저리 흘러내렸고, 오른쪽 머리칼 한 줌은 아예 그의 손에 잡혀 아프도록 당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흐렸으며, 입술은 벌어져 맑은 액체로 번들거렸다. 그녀의 가슴은 사납게 잡혀 어쩐지 아파 보였고, 질척거리는 허리 아래는 남자에게 깔려 있어 난잡한 성교 중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나였다. 나는 그야말로 창백하게 얼어붙어 엉망이 된 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둠처럼 스며들었다.

“어떤 제약이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신분이나 지위, 관습이나 사상, 그 어떤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아.”

“……아.”

나는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누가 뒤통수를 친 것처럼 충격이 덮쳐 왔다.

우아하고 정숙한 소환사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가. 그래서 더욱 내 일에 몰두하려 했고, 더 괜찮은 평가를 받으려 애썼다. 아름답게 빛나는 신성력으로 나를 치장해서 내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그게 외적으로 사람들에게 비치고 싶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실은 저 모습이 내가 보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니.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눈으로 보는 현실과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상이 다르다고 느껴 어지럼증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껏 나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던 나와 내면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평생 만날 수 없는 시소의 양 끝처럼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고.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나는 그런 고정 관념을 깨뜨렸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저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아랫배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좋았다. 남들에게 음란한 여자로, 자유롭게 관계하고 신음하는 여자로 보인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던 것이다.

‘비록 내 세상에선 실제로 그런 여자가 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마계가 아니던가. 내가 어떤 존재로 있든 간에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존재들이 널려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한 안정감과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나의 민낯은 사실 저토록 음탕했으며 그와의 거친 행위에도 충분한 만족을 느끼며 엉덩이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괴로워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행위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발그레해져 있었다.

이제야 진정한 쾌락을 찾았다는 듯이.

“내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는가.”

마왕이 눈을 빛내며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번쩍이는 핏빛 눈을 본 순간,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설사 이곳에서 자유롭게 행동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빌미로 나중에 그에게 이용당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졌다.

마족은 늘 인간을 괴롭힐 생각만 했다. 그게 마계의 존재 이유였다. 마물이 쉬지 않고 제국을 공격해 오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따라서 그에게 몸을 비롯해 정신까지 장악당해 그의 수족으로 이용되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심이 든 건 당연했다.

나는 거울을 외면하려 얼굴을 돌렸다. 내 내면이 파악됐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으려 작은 저항을 한 것이다. 그러자 마왕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봤다.

“앙탈을 부리는 건가.”

마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가 이내 입가를 올렸다.

“귀엽군.”

“……!”

“더욱 귀엽고 음란하게 만들어 주지.”

“뭘…… 자, 잠깐, 읏…….”

그는 안쪽에 성기를 박은 상태로 내 허벅지를 양손으로 각각 잡았다. 그리고 내 몸을 들어 다리가 거울을 향해 좌우로 벌어지도록 자세를 바꿨다.

“아!”

나는 절망했다. 바뀐 자세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지나치게 음란했다. 거대한 성기가 젖어 있는 음부로 쑤셔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 생생히 비쳤다.

마왕은 일부러 그 상태로 내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성교를 계속했고, 나는 쑤셨다가 빠져나가는 그 강렬한 통증과 쾌감에 자지러지듯이 신음했다.

이미 이성은 흐려졌으며 경계심은 사라진 상태였다. 오로지 머릿속에 자극, 쾌감, 자극, 쾌감만이 전부였다.

“이래도 앙탈을 부리겠는가.”

“아니, 아읏, 흣……!”

“나야 상관없어. 어차피 계속할 테니까.”

“흐읏, 아!”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뜨거운 탄성을 쏘아냈다. 마왕의 굵은 성기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가 빠져나갈 때면 체액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굵고 울퉁불퉁한 위협적인 성기가 하얀 피부를 지나서 붉은 속살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지나치게 야했고, 난잡했다. 거기에는 음욕에 절어서 울부짖는 여인만이 있었을 뿐, 마왕을 적대시해야 하는 신실한 사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좋아.”

길고 긴 성교가 끝나고, 나는 그야말로 그의 정액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드는 나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지.”

나는 순간 안도했다. 내 얼굴에 번진 감정을 보았는지, 마왕의 눈에 묘한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마치 그런 반응은 이르다는 듯이.

“나와의 육체관계가 좋았다고 인정한다면.”

“……제가 언제 아니라고 했던가요.”

나의 목소리는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진실이라는 듯 덤덤했다. 마왕은 웃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몸이 붕 떴다. 나는 어둠이 내 몸 주변으로 달라붙는 걸 느꼈다. 마왕의 손에 똑같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음에도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야.”

“무슨…….”

“또 보지.”

마왕의 말에 흠칫한 순간, 아찔한 충격이 덮쳐 왔다. 그에게 무슨 말이냐고 더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기절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숙소의 하얗고 깨끗한 내 침대 위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한 건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어째서…….”

다시 보이는 마계의 광경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왕은 이번에 테라스가 있는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태연하게 쳐다보았다.

“그대를 다시 불러들이는 건 쉬운 일이야. 불안정한 기운을 가진 데다 소환 영역을 그리는 재능이 뛰어나니까.”

나는 그를 보았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고 두려운 눈으로 묻고 있었다. 마왕이 제안했다.

“어때, 한동안 나와 황홀한 시간을 보내 보지 않겠는가.”

“……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건가요?”

“아니.”

“저희 세상이 공격당하는 건가요?”

“이건 그대의 세상하곤 상관없어.”

마왕은 내 망설임의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속삭였다.

“단지 유희일 뿐이야.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마왕은 짤막하게 덧붙였다.

“우린 서로 잘 맞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

“원치 않는다면 돌려보내 주지.”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평생 빛의 그늘 아래 스스로를 숨기고 살 텐가?”

“……!”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마왕의 평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악하고 잔인해 대적할 수 없는 존재.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까.”

나는 그에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존재라는 평가가 덧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함께하겠어요.”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욕정에 약했으며 이런 유희를 늘 갈구해 왔으니까. 이 금단의 관계가 너무 달아 놓칠 수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마왕이니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게 금방 질리겠거니 속단한 것도 있었다. 그는 언제든 자극적인 것을 찾을 수 있는 남자였으며 그게 마땅한 존재였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남자로 마왕을 선택한 것이다. 아론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내 적수의 아래에서 신음하기로 했다.

훗날 이게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한 채.

***

마물 소탕은 처리까지 늘 고역스럽다. 나는 장화에 튄 마물의 사체 조각을 제거하고 있었다. 마물의 표피는 그대로 두면 접촉한 것을 부식시켰기 때문에 섬세한 처리 작업이 필수였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나는 전신이 뻐근해져 오는 걸 느꼈다. 마물과 싸우느라 경직됐던 몸이 이제야 풀린 걸까. 어쩌면 어제 늦은 시간까지 마왕의 성에서 머물렀던 탓일지도 몰랐다.

어제는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는데, 마주친 순간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지독하게 몸을 겹쳐 왔으며 성기를 삽입해 나를 금세 지치게 했다.

‘봐. 내 것을 빨아들이는 그대의 음란한 속살을. 정말 축복받아 마땅하지.’

마왕의 말이 묘하게 종교적인 색채를 띤 건 나를 괴롭힐 의도에서였을까. 어쩌면 내가 배덕한 상황에서 더욱 흥분하는 체질인 걸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를 떠올리자 나는 뜨거워지는 몸을 느꼈다. 오로지 쾌감만이 전부였던 밤. 그곳엔 도덕적이고 신실해야 하는 말레드레드도, 마물 소탕 후 청소를 해야 하는 말레드레드도 없었다.

오로지 순간의 쾌락에만 희열하던 한 여인이 있었을 뿐.

픽.

나는 손의 신성력이 사멸하자 움찔했다.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다시 긴장하자 하얀 신성력이 손끝에서 빠져나와 장화로 흘러갔다.

“와, 굉장해!”

나는 감탄이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무리의 성기사가 있었다.

그들은 마계로 돌려보내는 데 실패한 마물을 처리하려 신성력을 한껏 끌어모은 상태였다. 거대한 대검에는 신성력이 요란하게 번쩍였고, 그 주변으론 얕은 회오리까지 생성됐다.

“역시 아론나이드!”

나는 그들 가운데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금발 머리가 신성력에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빛으로 표현되는 신성력을 거대하게 내뿜어 바람을 일으킬 존재는 그밖에 없을 것이다.

젊은데도 강한 신성력을 가진 것으로 찬사를 받은 그는 주위의 호기심과 관심에도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용하면서도 제 할 일을 성실히 하는 젊은 성기사. 능력 좋고 성품 좋은 그를 벌써부터 따르는 사제들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저것 봐!”

곧 신성력을 한껏 머금은 그의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졌다. 동시에 다른 기사들의 검도 아래로 향했다. 신성력이 연달아 폭발했다.

그 환하고 찬란한 빛의 연출을 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빛을 선도하는 그 아름다운 금발의 사내에게 뜨거운 욕망을 느꼈다. 마치 나란 존재는 그런 모순덩어리라는 듯이.

사람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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