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화 (6/220)

6.

무슨 소리지? 나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울보 아론은 사라지고, 나는 그가 도망갔다고 변명한 귀족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론이 말없이 도망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무슨 말이라도 더 전해 듣고 싶었지만 귀족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쳐 가며 그를 잊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할 뿐이었다.

나는 아론이 죽어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시체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숲을 떠돌고, 산을 헤매고. 늦게까지 그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허탈감에 집으로 돌아오면, 백작 부인은 엉망인 내 모습을 보며 심하게 꾸중했다. 그리고 그런 날 밤에는 나는 망가진 인형을 꼭 쥐고 잠이 들었다. 목이 잘려 있는 불쌍한 인형을.

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글퍼졌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기억 속으로 휩쓸려 갔다.

‘더…… 손으로 주물러봐.’

어느새 나는 수녀원을 가기 전날, 욕탕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미끈한 액체가 몸으로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게 분명해졌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이중적인 모습을 원하는지.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읏, 아론……! 너무 좋아.’

이내 내 기억은 아론과 재회했던 때로 넘어갔다. 그와 함께했던 뜨거운 시간, 육체관계, 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황금빛 눈동자. 나는 완성된 남성 아래에서 신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것도 없겠군.]

그리고 그때, 나는 기억의 소용돌이에서 깨어났다. 무언가가 내 머리에서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방금까지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불쾌한 것이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입술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닦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음험한 눈으로 한 손에 검은 기운을 피워 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중요한 기억을 파헤치지. 룬은 침입자의 뇌를 망친다, 보통.”

“……룬?”

“방금 그대의 머릿속을 파헤쳤던 내 충성스러운 애완동물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낮지만 우아한 현악기처럼 깊게 파고드는 어조는 신비한 끌림이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개는 숙여졌고 몸에서는 힘이 빠졌다.

어느 순간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긴 손가락이 내 턱을 치켜 올렸다.

“신성력을 쓰는 능력자인가? 신의 냄새는 약한데. 그렇다면 소환 영역에 너무 집중한 모양이군.”

그는 한눈에 내 상태를 간파했다. 그의 뜨거운 손이 내 턱에 흐르는 액체를 매만졌다. 그는 그것을 느릿하게 입가에 넣어 빨아먹고는 중얼거렸다.

“꿈을 발판 삼아 우연히 넘어온 모양인데, 이곳에서 하루를 넘기면 죽게 된다.”

“……!”

그는 흠칫한 나를 즐기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붉은 눈이 더 암담하게 느껴졌다. 나는 숨이 턱 막혀 오는 공포심을 느꼈다. 그 눈빛에는 인간다움이 없었다. 원래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듯이 권태로움과 잔인함만이 가득했다.

“생의 끝을 맞이한다는 게 두려운가.”

질문은 칼끝처럼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아니면 자각한 욕망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죽게 되어 억울한가.”

마왕은 훔쳐본 내 기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말문이 막혀 굳어 버린 내 얼굴을 보면서 입가를 올렸다.

“어쩌면 기억 속의 인간과 다신 만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절망할 수도 있지.”

마왕은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이 됐든 죽는 건 명확해.”

그는 짓궂고 사악했다. 웃는 얼굴에서부터 그게 드러났다. 나는 초조해졌고 겁이 났다. 그가 내 죽음을 기꺼워하며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존재라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과연 이곳에서, 저 존재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절망적이었다.

“여기서 살아 나가고 싶은가?”

마왕이 그런 내 상태를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제안을 하나 하지.”

“……어떤.”

“나와 관계를 하는 거야. 신의 사제라는 것이 우습도록.”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대는 그대 안의 욕망을 해결하고, 나는 내 최강의 적수를 비웃을 수 있지.”

마왕은 신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어조로 덧붙였다.

“어때. 이것은 꽤 매력적인 제안이 아닌가.”

“……당신과 관계를 나누면,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요? 원래 있던 곳으로?”

“그래. 약속하지.”

마왕이 대답했다. 나는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우리 세계에서 들려오는 그의 악평을 떠올리면 그의 제안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고까지 느껴졌다.

마왕. 그는 실로 사악하고 잔인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일컬어진다. 그와 마주쳐 운 좋게 살아남은 성기사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잔혹하여 인간의 영혼을 한 줌도 남겨 놓지 않을 자라고 했다. 인간 존재를 말살하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도, 잠들지도 않을 존재라고.

따라서 지상에 출몰해 인간계를 고통스럽게 하는 마물과 그의 수하들까지, 하나 같이 그를 닮아 잔인했으며 지상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게 신성국의 황제와 제국민들이 마왕과 마족, 마물을 증오하는 이유였다.

“……좋아요.”

어떤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느낌이 들었든 간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설사 이게 마왕이 인간을 괴롭히는 고도의 방법이라고 해도, 나로서는 지금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더 좋은 대책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당신을 갖겠어요.”

“나를 갖는다라.”

마왕은 돌아오는 표현이 재미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내가 이렇게 선뜻,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답할지 몰랐는지 흥미로워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의 최선은 그가 약속을 지키게 돼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고, 최악은 그를 느끼다 쾌락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이었다. 최악도 완전히 손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를’ 갖겠는가?”

마왕이 강조하며 물었다. 마치 대답하게 되면 두 번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아론을 떠올렸다. 나를 향한 절대적인 눈빛과 뜨거운 몸, 열정에 찬 움직임을 상기했다.

‘이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략이자 선택. 신성국의 소환사로서 마왕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가벼운 관계임을 못 박아둔 아론과의 관계에서까지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금발 청년을 가슴 저 아래로 내리눌렀다.

“갖겠어요.”

내 분명한 대답에 마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매는 매혹적으로 휘어져 있었다.

곧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흣……!”

그의 동작은 거칠었다. 내 목을 끌어당겨 허리를 반쯤 눕힌 채로 그는 짐승처럼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뜯을 것처럼 물었다가 혀를 뻗쳐 입 안을 사납게 휘저었다. 나는 곧 숨이 막혔고 목구멍이 아파 왔다. 그래서 콜록거리자 마왕이 입술을 떼었다.

“실망이라는 표정인데.”

마왕은 비웃듯이 말했다. 나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상상했던 게 아니라서요.”

“어떤 상상을 했지? 마왕이 누구보다 달콤한 탐닉해 줄 거라고?”

마왕은 조롱하는 어조로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새 그의 손이 내 얇은 옷 아래로 들어가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아읏, 으……!”

“아니면 정중하게 쾌락을 이끌어낼 거라고?”

“살살, 흣……!”

나는 무자비하게 만져지는 가슴살에 가냘픈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마왕은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가슴에 이어 유두까지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눌러댔다.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나는 곧 묘한 느낌을 받았다. 꾹꾹 누르며 돌려대는 그의 난폭한 자극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희열을 말이다.

부끄럽게도 이런 자극이 싫지 않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며 입 밖으로 엷은 신음을 쏟아 내고 말았다. 마왕은 금세 반응해 왔다.

“그대의 몸은 싫어하지 않는군.”

“아, 읏……!”

“오히려 달아올랐다는 느낌인데.”

어느새 그의 한 손은 다리 사이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렸지만, 곧 긴 손가락이 음부를 쿡, 깊게 찔러오자 반항하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흣……!”

“말해 봐. 인간계에서 내 평판이 어떠한지. 그대 입으로 들려줘.”

짓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하필 이 순간에 묻다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음부를 능란하게 자극해 오는 손길에 곧 정신을 빼앗겼다.

“흣……!”

“어서.”

쿡, 깊게 찌르며 재촉하는 것에 나는 절로 외쳤다.

“사, 사악하고, 읏!”

“그리고?”

“잔인해, 아……!”

손가락이 안쪽을 깊게 찌르며 천천히, 그리고 강하게 질벽을 눌러댄다. 나는 몸마저 휘청거리고 말았다.

마왕은 서 있는 상태론 힘들다고 느꼈는지 그대로 나를 바닥으로 눕혔다. 딱딱한 바닥이 등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곧 마왕의 손이 안을 다시 쑤셔 오자 아랫배가 간지러워져 오며 눈앞이 흐려졌다.

“흐읏……!”

“또?”

마왕은 얄궂게도 안을 꾹 누르며 물었다.

“큿! 대적할 수 없는 존재…… 웃, 읏……!”

“사악하고 잔인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라.”

마왕은 비열하게 입가를 올렸다. 그 미소는 흐트러져 엉망이 된 눈빛을 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매혹적이었다.

원래도 두려워하던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안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인 쾌감을 안겨 주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자극이 극대화된 것처럼, 나는 그의 손길 하나에 노도와 같은 전율을 느꼈다.

“흐읏, 앗……!”

방심한 틈을 타서 손가락이 더욱 깊게 들어왔다. 이내, 마왕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명성에 걸맞은 쾌락을 제공해 주지.”

눈앞이 까매졌다. 어둠이 내 몸을 완전하게 덮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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