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개를 든 그가 나를 바라보자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를 동경했던 소년의 눈동자가 어느새 선망에 들떠서 나만을 바라보는데, 어찌 묘하면서도 흡족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 좋아요.”
나는 멈칫했다.
“이렇게 곁에 있을 수 있어서.”
황금빛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그윽해져 있었다.
“늘 보고 싶었거든요.”
왠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마치 그 시절에 아론을 포기하고 잊어버린 나와는 달리 그는 늘 나를 생각해 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벼운 관계라는 단어를 상기해 주려다가 멈칫했다. 나를 배려해 준 그에게 지금 이 순간 냉정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쓸어 주었다. 그는 그 손길을 세밀하게 느끼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론, 그런데 정말 내가 예전하고 똑같아?”
나는 그에게 내가 조금도 변치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그가 첫 만남에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면서 내 모든 것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다. 멋모르는 소녀에서 스스로를 자각한 여인이 되었으니, 분명 달라졌을 거라고.
내 질문에 아론은 눈을 떠 부드럽게 웃었다.
“예전처럼 달콤하고 상냥해요.”
경직된 말투가 한결 풀린 그는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다.
“두려움에 주저하지 않고요.”
“조금 전에 마물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었는데?”
“다른 소환사들이 실수할 때마다 말없이 도와주었잖아요. 티 내지 않고.”
“그건…….”
굳이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들을 돕지 않으면 내가 당할 확률이 크기 때문에 뭔가를 했을 뿐이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선의로 그런 게 아니야. 협동 전투니까.”
“협동 전투라도, 자기 사욕만 챙기는 자가 더 많아요.”
아론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나쁜 기억을 떠올린 걸까. 나는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이 커졌고, 곧 온기를 느꼈는지 살포시 눈을 감았으며,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길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져 있었다.
나는 그의 뜨거운 눈빛에 마음이 이상해지는 걸 느끼면서 서둘러 그렇구나, 대답했다.
“잠깐. 근데 그걸 알 정도면 날 쭉 지켜봤다는 거네?”
“네. 실은 말레드레드가 있는 곳으로 우연히 배정된 게 아니에요.”
“뭐?”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강하게 꿰뚫었다.
“폐하께 이쪽으로 보내 달라 했어요. 만나고 싶었거든요.”
“……그렇구나.”
나는 이 정도로만 반응할 수 있었다. 위험했다. 왠지 건드리면 더 커지는 가공할 마물을 맞닥뜨린 것처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아론은 나를 처음처럼, 강렬하게 응시했다.
“이제 늘 만날 거예요.”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거미줄처럼 나를 옥죄어 왔다.
부담스러움을 느끼기 전에, 그가 다시 내 입술에 키스해 왔다. 이내 아직까지 내 안에 머물렀던 그의 성기가 묵직하게 커지는 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감미로운 동작으로, 아론은 내 안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친밀한 관계는 시작되었다. 아론은 내가 있는 본대에 있으려 했고, 전투가 끝나면 내 숙소를 찾아와 밤을 보냈다.
“읏, 아론, 아……!”
그의 실력도 나날이 일취월장, 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채로 절정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맞이했다. 체력이 좋은 사내는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쉽게 만족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와의 행위는 늘 상냥하고 정중했고, 그건 내 어딘가의 허전함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 무렵, 나에게는 두 번째 남자가 다가왔다.
두 번째 남자에 대해 말하기 전, 내가 가진 능력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소환사로, 우리 세상에 쏟아져 나온 마물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마물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데는 소환 영역을 그리는 재주와 차원의 문을 여는 신성력이 필요하다. 전자보다 중요한 건 후자로, 신성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물을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보낼 수 있다.
나는 특이하게도 신성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으나 소환 영역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서 마물을 마계로 정확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소환 영역을 잘 그리지 못하면 마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마물을 떨어뜨려 버리기 때문에 2차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내 약점을 알고 강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소환 영역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신성력이 약하더라도 정확한 소환 영역을 그리게 되면 마물 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고, 단체로, 같은 소환사와 협동했기 때문에 신성력은 언제든 보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소환 영역을 그리는 연습을 했다. 감독관이 무척이나 잘한다고 칭찬해 올 정도였다.
나는 숙소로 돌아갔고,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눈을 떠 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었다.
‘여긴 어디지?’
마계라 의심하게 된 건 저 멀리 보이는 화산 덕분이었다. 암울한 자줏빛의 하늘. 그 하늘로 치솟았다 붉은 비처럼 흩어져 내리는 용암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더구나 지금 내가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을 보고 있는 곳은 널찍한 테라스였고, 뒤쪽으론 벽과 천장이 회화처럼 아름답게 조각된 방이 존재했다. 나는 얼이 빠져서 방 가운데로 걸어갔다.
‘방어구가…….’
나는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절망했다. 자고 있던 그대로 얇은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예전에 잠을 자다가 힘의 비정상적인 방출로 마계에 갔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어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게 흔한 경우도 아니었고, 내 신성력은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내가 마계로 왔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마계에 있으면 결국엔 죽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계에 있다는 것을 최대한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우선 방을 나섰다. 고적하게 펼쳐진 대리석 복도는 폭설이 내린 하얀 눈밭을 연상시켰다.
나는 뻣뻣한 걸음을 떼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걷는 동안엔 오로지 내 발걸음 소리만이 비어 있는 공간을 괴롭혔다.
‘이곳은.’
커다란 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웅장한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문은 견고해 보였고 두꺼워 보였다. 내 힘으로 열릴까 싶었는데, 손을 뻗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거대한 공간에는 금빛으로 된 왕좌가 있었다. 왕좌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알몸으로 엎드린 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맨 끝, 왕좌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눈은 피처럼 붉었고, 머리카락은 밤처럼 어두웠다. 아름다운 남자였지만, 한편으론 괴기스러운 남자였다.
‘……마왕!’
기겁할 찰나, 천장에서 무언가 나를 덮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재수 없는 것!”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술 냄새가 풍겨 온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너도 네 엄마와 똑같아!”
젊은 백작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유리잔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울면서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겠지!”
그녀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흐흐, 거렸다. 나는 그녀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정떨어지게 질질 짜면서!”
그 말에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등으로 뺨을 훔치려는데 내 손에 쥐어진 것이 보인다. 목이 잘린 인형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던 금발 인형을 첫째 비안나가 망가뜨린 것이다.
사생아인 나를 싫어하던 이복 언니는 이 같은 짓을 종종 해 왔다. 나는 그때마다 울었고 슬퍼했다. 백작 부인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말없이 쏘아 보았을 뿐이다.
품위와 예절, 교양을 중시하는 그녀는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는데, 그건 그녀가 자신의 눈에 담긴 무언의 비난을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늘 말보다 더한 폭력을 쏟아 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재수 없는 것! 울지 마! 너 같은 건 앞으로 평생!”
나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곧 내 옆으로 그녀가 던진 유리잔이 날아왔다.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나서 깨졌고, 나는 얼굴에 흐르는 피를 느끼며 그걸 손으로 닦았다. 피는 입술로도 스며들었다. 눈물과 섞인 그것은 짜고 비린 맛이었다. 왠지 지독하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맛.
그 뒤로 나는 울지 않았다. 아무리 심하게 비안나에게 당해도, 조슈아에게 골탕 먹어도.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 안도하며 그 안에서 만족을 찾기로 결심했다.
백작 부인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아쉽게도 성인이 된 나는 남자들을 퍽 좋아했고, 맘에 든 상대에게 다리를 벌리는 것도 기꺼이 했다. 그게 나였다. 나는 나를 인정했다.
울지 않은 건, 우는 게 싫어서 그랬을 뿐이다. 짜고 비린 맛이 연상되어 싫었을 뿐.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또 다른 기억에 휩쓸려 갔다.
나는 풀숲에서 울고 있는 금발의 소년을 보았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금발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좋아하던 인형도 꼭 저런 빛깔이었는데.
나는 품속에 있던 쿠키를 내밀었다. 몰래 가져와 아껴먹으려던 것이었지만, 우는 게 거슬렸으니까.
“먹어.”
내 말에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그는 쿠키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이 없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애처롭다.
나는 그가 받지 않자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안 먹으려면 말아. 다른 사람 줄 테니까.”
“잠깐, 잠깐만요.”
소년은 바보처럼 말을 반복했다. 이내 내게서 얼른 쿠키를 받아 챙긴 소년은 또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마치 이런 건 처음 받는다는 듯이 얼이 빠져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달래듯 말했다.
“먹어 봐. 달콤해. 기운 날 거야.”
“…….”
“걱정 마. 독이 든 건 아니니까.”
나는 그래도 꿈쩍 않는 소년을 보며 자존심이 상했다. 큰맘 먹고 준 것이었다. 괜히 마음을 내어 주었던가.
나는 상처 입은 얼굴로 그걸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자 소년이 위협을 느꼈는지 얼른 쿠키를 한 입 깨물었다.
그리곤 다시 한 입, 한 입. 또 한 입…….
소년은 울음을 멈춘 채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맛있어요.”
“그래?”
“……네.”
“잘됐네.”
소년은 젖은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지저분한 얼굴과 달리 아름다운 금빛 눈이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묘한 기억이군.]
그때, 어디선가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