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 라이크 앤 다크
1.
[친애하는 말레드레드.
신의 축복을 받은 그 외모는 여전하겠지?
이곳 노르타까지 네 이야기가 들려. 정확히 네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은빛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 혈색 넘치는 살결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소환사는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까. 너무 노골적인가? 하지만 내가 다음으로 묻는 건 더 노골적일 거야.
지금 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헤르간의 사태가 너 때문이라며?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싶어. 사랑하는 나의 이복동생이자 아름다운 말레드레드. 네가 진정 빛과 어둠의 싸움을 일으킨 장본인인지 다음 편지에서 답을 주렴. 기다리고 있을게.
- 궁금함에 잠 못 이루는 오라버니 조슈아가]
나는 편지를 접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내 치부와도 같은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남들에게 말한다면 이런 식이어야 할 것이다.
***
나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두 명의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나는 소환사라고 불리는, 차원의 문을 여는 황성 소속의 사제이다. 사제라고 하니 내가 정숙하고 금욕적인, 이른바 성스러운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표본일 거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권태롭고 욕정에 약한, 소위 제멋대로 사는 인간의 정석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매우 훌륭한 외양에 다소곳한 분위기를 뿜고 있어서 대외적인 평판이 좋았다.
내 일에 대한 능력치도 나쁘지 않았고 일을 하면 성실하게 집중했기 때문에 황성에서는 소환에 관련된 것이면 나를 선두에 내세워 일을 시키려 했다. 나는 사제로서의 내 역할을 알기에 그럴 때면 더 의욕적으로 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본래의 나이고 싶은 욕구.
원래 나라는 인간은 그다지 이타적이지도, 의협심이 뛰어나지도 않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그때그때 욕망에 충실해 무리에서 튀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과 현실적인 제약과 압박들이 나에게 높은 도덕심과 헌신적인 삶의 태도를 요구했고 나는 그것들을 무시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작가의 사생아로서 그 시선에 나를 맞춰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느꼈다. 마음대로 살고 싶지만 무시당하며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던 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훌륭한 사제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 내 가슴 밑바닥에서 튀어 오르려는 욕망을 내리누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나를 초조한 욕구의 기아(飢餓) 상태로 만들었다.
나는 비뚤어지고 싶었다. 도덕적으론 어렵더라도, 성적으로라도 만끽하고 싶었다. 나는 이 돌출되어 나오려는 새빨간 욕망을 어디서 채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이라니. 좀 우스운 표현일 것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를 자각하고 나서 한동안 수녀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철저한 금남 구역으로, 오로지 신을 향한 정결한 생활만을 이어 나간다. 그 고행 같은 신실이 삶의 전부다.
변화 없는 그 정적의 시간은 그러나, 내게 더없는 답답함과 절망만을 가져왔고 나를 조금씩 안에서부터 질식시켜 갔다. 그래서 얼마 진행하지도 않는 능력 개발 시간에 더더욱 몰두했는지 모른다.
내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뛸 듯이 기뻤고, 수녀원장의 남아달라는 형식적인 애원에도 의례적인 답변조차 안 할 정도로 신이 났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을 빠져나왔고, 수녀원을 상징하는 조반나 나무를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삶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희열에 차 있었다.
황성 소속의 사제로 살아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펠더 제국의 황제는 엘크리찬을 믿는 신성국의 황제였고, 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영광스럽게 이룩한다는 열망으로 사제와 성기사들을 중하게 대접했다.
능력이 있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중용했다. 백작가의 사생아로 이도 저도 아닌 지위에서 결국엔 수녀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나에겐 더없이 좋은 황제였고 좋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나는 신성력은 그를 쓰는 사람조차 값져 보이게 했고, 우아한 외모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빛의 도구로써 완벽히 제값을 했다. 무언가를 굳이 연출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능력을 쓰는 나를 보며 한숨 쉬듯 감탄했다.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지위와 능력을 얻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시들해졌다. 나는 나를 안에서부터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러니까, 백작가에서 떠밀려 수녀원으로 가기 하루 전날. 나는 낙담과 체념에 휩싸여 하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수녀원에 가기 전 몸을 청결하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백작가의 주인 메리옹 백작은 그의 첫째이자 가장 예뻐하는 자식 비안나의 사교계 진출에 정신이 팔려 나에 대한 건 크게 관심이 없었다. 떠나기 전 신에게 충실하라는 충고를 간단히 했을 뿐이었다.
메리옹 백작은 나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성이나 재산을 물려줄 만큼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있어 처리하기 귀찮은 자식에 불과했다.
그가 아쉬워하는 게 하나 있다면, 나의 돋보이는 외모였다. 그는 그릇된 자에게 훌륭한 외양이 주어졌다는 듯이 불편한 눈으로 나를 보곤 했는데, 내가 성인이 되자 그 문제가 다시 자신을 곤란하게 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생아의 신분으론 정실로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귀족의 첩으로 보내는 건 그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라서 그는 고민 끝에 나를 수녀원에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말 많고 간섭하길 좋아하는 백작가의 둘째 조슈아가 그렇다면 나를 사막 왕국의 귀족과 결혼시켜 거액의 지참금을 챙기자고 옆에서 바람을 넣었지만,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수녀원에 보내겠다고 확정 지었다.
수녀원으로 딸을 보낸다는 건 신에게 자식을 바치는 것이기에, 그의 평판에 좋았다. 황제도 소량의 기여금을 주며 격려의 친서를 보냈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듯싶었다.
‘걱정 마라. 넌 수녀원에서 잘 지낼 거다.’
백작의 말은 언뜻 들으면 다정했다. 형식적인 인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그의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라온 백작가를 떠난다는 데에 사실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차별과 공격적인 멸시를 받았지만, 그래도 이름난 백작가의 벽돌 저택이 나의 집이었고 나의 생활 공간이었다. 사생아가 버려지기도 하는 이 시대에 내가 배를 곯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백작이 나를 챙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식이라는 그나마 남은 혈육의 정 때문이었을까. 가끔 나를 쳐다보던 쓰린 눈빛을 기억한다.
내 외모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엄마를 추억해 본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를 떠올려 보았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를 써도 잘 생각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감정을 소모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어렸을 적에 모두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백작의 방을 빠져나왔다.
***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백작의 명으로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 김이 솟아오르는 나무 욕조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짐을 옮기던 노예 하나가 미끄러운 바닥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항아리를 놓쳤는데, 그게 내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쨍, 하는 그릇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몸 위로 내용물이 쏟아졌고, 향기로운 냄새가 번져 왔다.
“…….”
항아리 속 액체는 본래 물에 소량 풀어 넣어 뭉친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식물성으로 된 미끈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온몸을 뒤덮고 있자, 나는 이상한 기분에 젖고 말았다.
노예는 당장에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얼른 치우겠습니다!”
노예는 수건을 들어, 내 몸의 액체를 닦기 시작했다. 발에서부터 무릎, 허벅지를 지나 골반으로.
꾹꾹 누르는 손길은 정성스러웠다. 그다지 야한 손길도 아니었는데 배 속 아래가 가려워지는 걸 느꼈다.
“……읏.”
손발이 저릿저릿했고 온몸이 뜨거워졌다. 숨소리도 거칠어져 신음을 내뱉자 노예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곧 젊은 노예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내 모습을 알 것도 같았다. 나는 흐릿해진 눈을 하고, 발그레한 몸을 하고 있을 터였다.
온몸이 이완된 채로 더운 호흡을 뿜고 있는 나신의 여인. 안 그래도 목욕탕의 열기로 전신이 후끈해져 있는데 그에 더해 근육마저 풀어져 나는 더욱 야릇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만지는 곳을 따라서 작은 불길이 난 기분이었고, 그 불길 사이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쾌활하기도 했고 시원하기도 했고 가렵기도 한 그 무언가가 나를 불태웠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평소에 나를 얽매고 옥죄고 있던 관념들이 그 불길에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는 걸 느꼈다.
해방감.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갈증이 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더, 더…… 손으로 주물러봐.”
젊은 노예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무언가를 확신한 듯 열정적으로 내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쭉쭉 미끄러지는 손가락의 힘. 알 수 없는 열감이 피어오른다. 나는 허벅지를 누르는 손길에 ‘읏.’하는 신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머리까지 어질해질 정도였다.
“아…….”
손은 금세 허벅지의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민감한 살에 낯선 이의 체온이 닿자 금세 아찔함이 코끝까지 치밀었다.
동시에 경계심이 들었다. 내가 지금 발가벗고 노예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만.”
“…….”
내 말에 노예는 아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꼭 진심이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하체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까지 확인하자 나는 진실로 망설이고 말았다. 나는 내일 수녀원으로 떠나서 다시는 쾌락에 몸담지 못할 인생이었다.
지금 이 순간, 체면과 관습을 모두 내던지고 노예에게 몸을 허락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질문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것은 무척이나 유혹적이고 욕망을 그대로 담은 질문이었다.
나는 결국 사내를 보며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