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42화 (342/345)

# 342

대한 제국의 진군을 막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전으로 가문이 쑥대밭 되는 것을 막는 게 그들에게는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몇몇 장교들은 결국 탈영을 선택하였다.

자신이 지휘하는 광전사들을 데리고 탈영한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장교들은 여전히 혼란에 빠진 채, 대한 제국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의 직책을 가진 군 책임자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군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에 일반 장교로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러시아군이 정상이었다 해도 이전보다 강력해진 대한 제국의 공격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수도, 아니 EU의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군이 대한 제국의 공격을 막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차르의 죽음으로 EU의 지원이 더 이상 오지 않고 있으니 러시아군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대한 제국의 진군을 막지 못한 상태로 쫓기고 쫓겨 볼가강으로까지 밀려났다.

러시아군이 이렇게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사정도 좋지 못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대한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서 전 아랍의 힘을 집결시켰다.

마치 EU와 비슷한 연합 세력을 구축한 것인데, 준비된 시간은 짧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공공의 적으로 인해 집결된 힘은 상당했다.

이스라엘 공방전에 무려 30만이 넘는 아랍 동맹군이 도착한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동맹에 합류한 세력이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랍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터키까지 사우디아라비아와 뜻을 함께하였다.

안 그래도 적이 많았던 이스라엘인데 터키라는 나름 강력한 지역 강국이 추가로 적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프리카에 있는 EU의 식민지 왕국들과 지중해를 통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아랍 동맹군과 대한 제국군, 여기에 터키군까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였다.

차르 암살이 성공하고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결국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EU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대세가 완전히 굳혀진 상황.

최소 수백만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아메리카 상황도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주국은 끊임없이 동진을 시도하였고, 남미에서는 대한 제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페루나 칠레 같은 몇 없는 독립국가는 대한 제국의 동맹이 되어 버렸고 말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EU로선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부터 지원해야 합니다! 러시아를 빼앗기면 유럽이 위험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보다 지중해를 막아야지요. 이교도들이 지중해를 통해 본토를 침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에 지원군을 보내겠습니다. 솔직히 아랍이나 러시아나 스페인과는 상관없는데 왜 식민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그곳을 지켜야 합니까?”

“스페인이 그런다면 우리 영국도 앵글로 아메리카에 지원군을 보낼 겁니다.”

대한 제국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고 있을 때만 해도 연합 세력치고 상당한 단결력을 보여 주었던 EU다.

하지만 위기가 시작되자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단결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느 나라의 정치판을 보듯,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자기 국가의 이익만을 따질 뿐이었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이 상황에서 식민지나 지키겠다는 겁니까? 전 유럽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교황청에 소속된 유저들이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고 하였다.

8회 차가 되었지만 교황청의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했던 것이다.

“전 유럽이오? 흥. 교황청조차 분열한 상황인데 전 유럽은 무슨.”

“프라이스 경! 교황청을 비하하는 겁니까!”

“비하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교황청은 지금 떳떳한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

하지만 교황청을 바라보는 각국 대표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대한 제국과의 전쟁에서 교황청이 제대로 나섰다면 상황이 조금 더 좋게 변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유럽인들은 적지 않았다.

교황청이 가진 비기도 비기지만, 식민지 왕국이나 독립 왕국에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청은 8회 차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내부 정리조차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NPC 교황과 유저 추기경들 간의 갈등이 심했던 탓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항복을 하시지요.”

대주교가 입을 다물자, 폴란드의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러시아가 멸망하면 그 다음은 폴란드였기 때문에 대한 제국과의 전쟁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대표의 발언은 곧장 반대에 부딪쳤다.

“항복이라니요. 대한 제국이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보고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대한 제국은 협상이 통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멸망만을 바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럽에만 수백만의 대군이나 있는데 항복이라니!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맞아요. 설령 항복한다 해도 우리의 힘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조건이 좋아질 것이고 말이죠.”

대부분이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으면서 항복하는 주장엔 경기를 일으킬 듯,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월한 유럽인들이 하나로 똘똘 뭉쳤는데 열등한 아시아의 국가에게 패배를 인정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싸우자는 겁니까? 어디로 군사를 보낼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폴란드 대표의 말에 독일 대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사는 절반으로 나눠서 남미와 지중해를 지키는 데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는요?”

“제게 러시아를 지켜 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지금 상황에서 러시아를 지켜 낼 방도라니?

모두가 궁금한 얼굴로 독일 대표를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차르가 죽었는데 러시아 정부의 제안이라니요?”

“이곳 말고, 현실의 러시아를 말하는 겁니다.”

“현실의 러시아 정부가 우리들에게 제안을 했다는 말입니까?”

“예.”

“어떤 제안입니까?”

그 말에 독일 대표가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였다.

러시아 정부의 제안이 EU에게 한 제안은 간단했다.

어떻게든 대한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낼 테니 마법과 신성력에 관련된 핵심 비기들을 전수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물론 차르의 러시아제국이 지고 있던 부채를 완전히 면제해 준다는 조건도 덤으로 끼어 있었다.

“차르가 죽었는데 대한 제국의 공격을 어떻게 막는다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자기 나라를 지키는 건데 왜 우리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겁니까? 빚을 면제해 주고 비기를 전수해 달라니. 지금까지 우리가 지원해 주었다고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닙니까?”

“흥. 러시아 정부가 센추리의 현실을 모르나 보군. 저번에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회유하려고 수작 부리더니 말이야.”

러시아 정부의 제안에 모두가 격렬한 반응을 내비쳤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 제국의 진군이 EU에게 위협적이기는 해도 가장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러시아였다.

저자세를 취해야 할 것은 EU가 아닌 러시아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마치 자신들이 갑이라도 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게 EU의 지도자들로선 황당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애초에 러시아 정부가 대한 제국의 진군을 막아 내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차르 때문에 지금까지 센추리에 관여도 못 하고 불 건너 강 구경만 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제국에 대한 영향력이 없을 것 같은데······”

“저도 러시아 정부의 실력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는 사실 외에는 말입니다. 다만 EU가 제안을 거부한다면 곧바로 대한 제국에게 투항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

그 말에 몇몇 대표들은 이를 갈며 분노했다.

사실상 러시아 정부가 EU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불곰이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군요.”

“하지만······ 러시아 정부의 실력이 확실하다면 한 번쯤 고민해 볼 제안입니다.”

“그 대신, 러시아가 이번 위기를 이겨 낸다면 100년만 지나도 러시아의 국력은 EU를 넘어서게 될 겁니다.”

“100년 뒤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대한 제국에게 멸망할 판인데.”

맞는 말이었다.

귀중한 비기를 주고 천문학적인 빚을 면제해 주면 현실의 러시아 정부가 세울 센추리의 러시아는 머지않아 엄청난 강대국이 될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미래의 러시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EU를 위협하고 있는 대한 제국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빚을 면제하더라도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 주겠습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수백만의 대군을 잃은 러시아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한 제국을 막겠습니까?”

“러시아의 비기라면 가능할 겁니다. 장정이 꽤나 죽었지만 아직 러시아의 인구는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뭐 대한 제국의 공격을 막는 데 실패한다 해도 아랍이나 남미의 일들이 해결될 때까지는 버텨 줄 겁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러시아 정부는 아직 센추리에서 한 번도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그러니 저는 일단 반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는 상황.

결국 각국의 대표들은 언제나처럼 투표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투표 결과는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러시아 방면은 현실의 러시아 정부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머지 위험 지역을 EU가 맡기로 한 것이다.

***

“갑자기 러시아군의 반격이 거세졌군. 이슬람 극단주의 식 테러까지 한다고?”

“예. 아이나 여성들이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하다고 합니다.”

“보급로까지 털리고 있고?”

“아무래도 보급로가 길어지다 보니, 유지하는 게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게릴라 규모도 상당한 지라······.”

호영은 쓰게 웃었다.

순조롭기 그지없었던 러시아와의 전쟁은 어느 순간 난관에 부딪친 것처럼 진척이 없었다.

현실의 러시아 정부가 개입하고 나서 생긴 일인데, 차르의 죽음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러시아군이 재정비되었다.

유저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그런 뒤로 러시아군은 생명을 불태우는 비약을 먹으며, 때로는 폭탄 테러까지 해 가며 대한 제국의 진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400km.

무공을 익힌 대한 제국군의 이동속도라면 6일도 안 되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철도를 이용하면 훨씬 짧아질 거리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 6일도 안 되는 거리가 도저히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 있으면 겨울이군. 이러다가 나폴레옹 꼴이 나겠어.”

겨울.

제아무리 무공을 익힌 대한 제국의 군대라 해도 겨울, 그것도 러시아의 겨울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식량의 보급부터가 어려워질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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