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
“허, 설마 대역을 죽였다는 말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황태자는 확실하게 죽였다고······.”
차르가 아니라면 황태자라고 죽인들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유저는 차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한 실패라는 뜻이군. 하! 화경 고수를 다섯 명이나 동원했는데 실패하다니. 이제 EU의 세력이 더 커지게 되는 건가.’
다섯 명의 가치도 가치지만, 위신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 더욱 걱정이었다.
그가 차르 암살을 감행한 이유는 암살로 인한 위신 감소보다 두려움을 심어 주는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계산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암살 실패는 위신 감소에 두려움까지 제거하는 효과를 낳게 되었다.
EU와 대한 제국을 사이에 두고 고민하던 중립 국가들은 이제 EU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아지리라.
“베트남이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인도네시아와 호주에서도 해군을 파견하였습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제후국들을 공격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차르에 대한 암살 실패의 여파로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가 대한 제국 또는 대한 제국의 제후국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아주 우습게 되었군. 제국의 안방과도 같았던 동남아시아가 적군으로 뒤덮이다니 말이야.”
호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악수 한 번 잘못 두었다고 아주 빌어먹을 상황에 처해 버렸다.
제후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체가 적이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주국까지 내란에 휩싸였다.’
안 그래도 원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는데 만주국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남미는 물론이요, 북미에서조차 영향력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해 버린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꼭,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충구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호영은 그런 충구를 보며 인상을 쓴 채 물었다.
“이 상황이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고?”
“세계가 EU과 우리 대한 제국으로 나뉜 셈이 아닙니까?”
“원래 8회 차가 시작했을 때부터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적과 아군이 모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적아가 명확해졌고 말입니다. 현재 세계는 냉전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우리 대한 제국은 냉전 시대의 소련이나 미국의 입장이 된 셈입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전통의 강자들을 넘어선 절대 강자가 된 배경은 소련이란 강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미국의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준 절대적인 요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EU의 세력 확대도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었다.
EU로 인해 EU의 반대편에 선 대한 제국은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초강대국으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은 셈이었으니까.
“글쎄.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보단 EU가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애초부터 세계 초강대국이었으니 말이야.”
명나라를 무너뜨린 6회 차부터 대한 제국은 이미 초강대국으로 인정받는 나라였다.
굳이 EU가 아니더라도 대한 제국이 초강대국이란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EU는 7회 차까지만 해도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세력이었다.
물론 EU의 중추 국가인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은 7회 차 때도 강대국이었지만 대한 제국에 범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결국 지금의 상황이 장기화되면 득 볼 세력은 EU밖에 없었다.
“초강대국으로 인정받았어도, 대한 제국의 영향력은 아시아를 넘지 못했지 않습니까?”
“이제는 아시아를 넘게 되었다는 뜻인가?”
“예. 지금 상황이 장기화되면 EU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우리 대한 제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대륙의 세력들이 말입니다.”
“다른 대륙이라······.”
호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구의 말처럼 냉전 시대가 장기화된다면 결국 중립을 표방하는 세력들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EU와 손잡거나 대한 제국과 손잡거나.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EU의 적대 세력은 전부 대한 제국과 손잡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대한 제국으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는 세계의 유일한 패자가 되고 싶다.’
아시아를 넘어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그로서도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영은 세계 유일의 패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EU라는, 대한 제국에 버금가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말이었다.
“경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나 짐은 이대로 상황이 장기화되는 것을 원치 않아. 설령 어쩔 수 없이 장기화된다고 해도 EU에게 한 방 먹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방도를 이야기하라.”
“그렇다면 가장 먼저 원나라와 만주국부터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나라가 무너지면 중앙아시아와 북미를 잃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호영의 표정을 보고 충구가 재빠르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만주국이야 당연히 지원을 할 생각이다. 이미 태평양 함대에 지시를 내려 놨으니 곧 지원이 도착할 거다. 다만, 원나라는 굳이 지원해야 할지가 의문이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경도 알다시피 군부에서나 행정부에서 이참에 원나라를 집어삼키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원나라를 집어삼키면 제후국들이 반발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로선 대한 제국이 원나라를 합병시키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생각할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러시아와 원나라의 전쟁을 방관하기만 하였다.
원나라에서 파병을 원치 않는데 대한 제국이 독단적으로 파병을 한다면 다른 제후국들로선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원나라 백성들이 우리에게 나라를 바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준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니.”
“······.”
호영의 말에 충구는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게 이득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도 중앙아시아를 갖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 하나 지금은 제후국들과 절대적인 신뢰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라는 건가?”
“예. 지금은 대국으로서의 관대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니 원나라의 지원 요청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주십시오. 지금은 일단 러시아의 확장을 막는 게 우선입니다.”
충구의 단호한 목소리에 호영이 표정을 살짝 굳혔다.
괜한 욕심 부리지 말라고 야단맞은 격이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황제로 있을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인데, 내가 너무 욕심이 앞섰군.’
아무래도 차르 암살이 실패한 일로 인해 동요한 것 같았다.
그는 이내 흐트러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다. 경의 말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원나라를 지원하도록 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충구의 모습을 보며 호영은 재차 명령을 내렸다.
“동남아시아를 어떻게 정리할지도 생각해 두도록. 다만 짐은 가능하면 아시아에서 EU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싶다.”
“예, 센추리 연구소와 함께 동남아시아를 완전히 대한 제국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EU에게 반격할 수 있는 수단도 강구해 보고.”
“알겠습니다. 일주일 안에 EU에게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겠습니다.”
“좋아.”
호영은 마침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힘은 여전히 굳건하였다.
신료들의 충성심도 대단히 높은 편이니,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이 전쟁을 걸어온 일이나, S랭크 무인 몇 명이 죽은 일로 동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 *
테무르는 동쪽을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제국의 황제를 향한 절이었는데, 보여 주기식으로 연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진심을 다해 동쪽에 있을 제국의 황제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 폐하, 폐하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 제국의 8대 특수부대 중 하나인 화랑도.
B+ 랭크 이상의 무인으로 이루어진 수천의 무사들이 테무르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이 바로 원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한 제국에서 파병 온 제국의 군대였다.
테무르가 지원을 요청하기 무섭게 제국에서 조건 없는 군사 지원을 해 준 것이다.
물론 원나라에 파병 온 군대가 이들뿐인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는 수백만의 군병이 있었고 원정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최소 200만이 넘었다.
지금 당장은 출정 준비가 끝나지 않아 화랑도 8천의 무사만 선발대로 넘어왔지만 머지않아 수십만의 군대가 원나라로 넘어올 것이다.
“테무르 경,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아, 고맙소. 풍월주.”
테무르는 화랑도 대장 풍월주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손을 잡았을 뿐이지만, 강인함이 느껴지는 풍월주의 악력에 테무르는 든든함을 느꼈다.
‘이자도 S랭크 무인이라고 했지?’
원나라에선 겨우 두 명밖에 없는 S랭크 무인이 대한 제국에는 무려 수십 명이나 있었다.
뭐 차르 암살로 인해 그중에 다섯 명이 죽었다지만 여전히 마흔이 넘는 S랭크 무인이 남아 있었으니, 대한 제국의 국력은 실로 무시무시한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풍월주, 당신들이 왔으니 이 전쟁은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쟁이 된 것 같소.”
“또다시 호언장담하는 것입니까? 무조건 이길 거라는?”
“하하하! 그때는 내가 자만했소. 러시아 정도라면 제국의 도움 없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뭐, 지나고 보니 내가 러시아의 국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호쾌하게 웃으며 말하는 테무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한때 대한 제국에게서 독립을 꿈꾸었던 테무르였다.
대한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러시아의 공격을 무찌른 이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공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원나라도 국력이 그리 약한 나라가 아니었건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할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무리 강해도 제국이 지원을 해 줬는데 질 리가 있겠소? 나는 이번만큼은 승리를 확신하오!”
승리를 자신하는 테무르의 모습을 보며 풍월주가 물었다.
“러시아의 비기는 어떻습니까? 아국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비기인데.”
풍월주의 물음에 테무르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순간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비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오. 비기가 아니라 비약이랄까? 솔직히 말해서 그냥 마약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요.”
동양 무공에 버금가는 비기로 알려져 있는 러시아의 비밀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