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30화 (330/345)

# 330

#제후국을 세우다

“고다군이 물러나자 다른 군도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군의 사상자는 8만으로, 이 중 사망자 수는 3만 6,600명입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장수들이 옥좌에 앉은 노인에게 보고를 하였다.

노인은 보고를 듣는 내내 가부좌 자세를 취한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모든 보고가 끝이 나자 마침내 눈을 떴다.

“분명 이겼는데도 사상자가 8만이라······.”

“아무래도 무공 수준의 차이가 크다 보니 사상자의 수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친왕이 다시 침공한다면 막아 낼 수 있겠느냐?”

“추가로 병사를 징집하면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인데 추가적인 징집이라······. 침공이 오기 전에 반란부터 일어나겠구나.”

“······.”

“대한 제국도 아니고 일개 황자에게 나라 전체를 잃게 생기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노인, 세리자와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에 대한 제국에서 한족 출신의 난민들이 몰려왔을 때는 그러려니 하였다.

청나라와 어떤 밀약을 맺고 강남을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한 제국의 능력이라면 곧 난민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난민의 유입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를 않았다.

마치 한족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때쯤 되니 세리자와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친한파로 유명한 세리자와지만 대한 제국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의 지적에 대한 제국에서는 ‘우리나라를 제멋대로 떠난 백성은 더 이상 우리 백성이 아니니, 알아서 해결하라.’라고 답변하였다.

대한 제국에서는 난민 문제를 방관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세리자와로선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래도 난민들을 어찌 대하던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니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때까지는 대국의 백성이란 이유로 한족 난민들의 행패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대한 제국의 방침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세리자와는 본격적으로 한족 난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죄질이 심한 자들은 즉결 처형하였고 조그만 죄라도 지은 이들은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난민과의 전쟁을 선포한 셈이었다.

필리핀인들은 그런 세리자와의 조치에 열성적으로 환호했고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 한족들은 극단적으로 반발하였다.

그러다 결국 대만에 거주하는 한족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대만의 후예를 자처하며 독립을 한 것이다.

처음 세리자와는 대만의 반란 소식을 들었을 때 조소를 금치 못했다.

6회 차였다면 모를까, 통치체제가 안정된 7회 차에 반란이 통할 리가 없었다.

친위대를 보낼 필요도 없이 대만에 주둔해 있는 군대만으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대만의 반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되기는커녕 더 활활 타올랐다.

그러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대한 제국에서 일단의 무리가 바다를 건너와서는 대만의 반란군을 지원한 것이다.

그 일단의 무리란 다름 아닌 대한 제국의 오 황자, 의친왕의 친위군이었다.

상국의 황자가 속국의 영토를 침략한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세리자와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리자와는 곧바로 대한 제국의 황제에게 청원하였다.

의친왕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벌을 내리라는 청원이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은 세리자와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와 무관한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라는 황당한 답변만 할 뿐이었다.

세리자와는 분노했지만 이번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의친왕이란 자를 필리핀의 힘으로 무찌르는 수밖에.

하지만 대한 제국의 일개 황자라는 의친왕의 군세는 실로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병사들은 전부 D랭크 이상의 무인이었고 심지어 의친왕의 친위대장이란 자는 무려 S랭크 무인이었다.

결국 세리자와는 대만을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본국을 사수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만큼 의친왕의 공세는 무서웠던 것이다.

‘과연 우리가 언제까지 의친왕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는 유저가 아니라서 3년 뒤에도 바뀌는 게 하나도 없을 텐데.’

현재 필리핀은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대한 제국의 일개 황자에 의해 나라 전체가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인데, 결코 필리핀이 약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은 오히려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강대국에 속하였다.

국력의 순위를 매기자면 최소 15위 안에는 들 정도였다.

사실 필리핀보다는, 의친왕을 일개 황자로 치부해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의친왕이 이번 전쟁에 동원한 군사 수만 50만이 넘는 대군이었으니 말이다.

‘의친왕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 낸다 해도 그 이후에는? 대한 제국에는 의친왕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또 어찌 막는단 말인가.’

대한 제국에는 의친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황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몇 명은 의친왕보다 많은 군사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어떻게 의친왕의 공세를 막아 낸다 해도 또 다른 황자들이 필리핀을 노리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한 제국에는 북한까지 포함하면 무려 다섯 나라의 유저들이 속해 있었다.

한국, 일본, 중국, 몽골, 북한이 바로 그 다섯 나라였다.

그리고 이 중에 한국과 일본, 중국의 무공 수준이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났는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다면 필리핀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의친왕의 공세를 그럭저럭 막아 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의친왕과 필리핀을 침공한 일본 유저들이 충돌했기 때문이지 필리핀이 강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만약 다섯 나라의 유저들, 아니 일본 유저들만 본격적으로 필리핀을 침공해도 필리핀은 반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아국의 사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태국 같은 경우는 국왕이 갑작스럽게 서거한 이후, 국토를 절반 이상 잃었고 베트남 역시 해남을 잃는 등, 난항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소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국의 황자들에게 침공을 받는 나라들은 전부 위기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국의 황자들이 필리핀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필리핀을 도와줄 나라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기뻐할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더 이상 반한 동맹을 주장하는 이가 없겠구나.”

“반한 동맹은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대한 제국을 찬양하는 나라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세리자와는 쓰게 웃었다.

‘제국에 충성한 대가가 겨우 이것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대한 제국의 황제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따져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막내 황자가 남미를 기웃거린다는데 차라리 그자에게 나라를 팔까?’

이제 곧 세상은 대한 제국의 황제와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 왕으로서 군림할 수 없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의친왕의 공세를 막아 낸다 해도 언젠가 그의 왕위는 제국의 황자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국의 황자 중에 적당한 이를 한 명 뽑아 그에게 나라를 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더 이상 왕을 자처하지는 못하겠지만 필리핀의 가장 강력한 제후로서 막후의 실력자로 군림할 수는 있을 것이니 말이다.

* * *

무장들이 황자들과 함께 동남아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며 확장을 거듭할 때 호영은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였다.

주로 청나라와 한국 교체기로 인한 혼란 수습과 반청복명 운동의 후유증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6회 차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호영의 휘하에 있는 유저들부터가 행정의 달인인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청나라의 지배계급인 만주족이 한국의 통치에 순응적이었다.

간혹 불만을 내비치는 이가 있었지만 군사적인 반란을 시도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한국의 지배에 대한 반대가 적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들어서는 만주족이 지나치게 순응적이라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왜냐하면 청나라를 따라 북미로 이주하겠다는 만주족의 수가 예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천만은커녕 500만도 안 따라갈 것 같은데······. 500만으로 북미에서 세력을 일구는 게 가능하려나?’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건 대한 제국의 강남 통치는 불과 1년도 안 되어 안정을 찾아갔다.

행정력은 이미 충분할 정도였고, 민심도 조금씩 대한 제국을 지지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슬슬 개혁을 시도해도 되겠어.”

내정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자 호영은 불쑥 그와 같은 말을 꺼냈다.

“개혁이라면 어떤 개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토지개혁을 말하는 거다.”

갑작스러운 호영의 말에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의 말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었다.

산업혁명이 있기 전, 기득권에 속한 세력은 전부 지주였다.

즉, 권력자들은 전부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땅이 넓은 중국에는 엄청난 수의 지주가 존재하였다.

이제 막 한국의 땅으로 바뀌게 된 강남도 마찬가지였는데, 만약 강남에 토지개혁이 실시된다면 지주들은 대거 반발하게 될 것이다.

반청복명 운동으로 한창 떠들썩하였을 때, 미동도 하지 않았던 한족 신사층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절반 이상의 무장들이 본국을 떠나 있는 상태인데, 반란이 일어나면 수습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무장을 뽑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지금 남아 있는 인재가 그리 많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제국의 모든 장수들이 황자들과 함께 원정에 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제국의 힘이 든든해도 그렇게 몰상식한 짓을 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변방을 지키는 무장의 숫자는 충분할지 몰라도 전국적인 반란을 진압할 무장의 숫자는 확실히 부족한 편이었다.

사실 장수들뿐만이 아니라 병사들의 숫자도 이전보다 줄어들었는데, 강남을 차지했는데도 정규군의 규모가 180만 정도에 불과하였다.

타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많은 편이었지만 세계 제일의 영토 크기를 자랑하는 대한 제국을 수호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병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문관들의 우려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족들 중에도 찾아보면 인재가 제법 많으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반란을 한족 출신에게 맡긴다는 말씀이십니까?”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족들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되는 족속들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반란 진압을 맡긴다면 오히려 그들은 반란군과 힘을 합쳐 반역을 꾀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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