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예상외군. 당 대표는 역시 다르다는 건가.’
‘꼰대’일 것을 예상했던 호영으로선 무척이나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서 마주 인사하였다.
서로 통성명이 끝나자 최수종은 로열 그룹의 본사가 근사하다느니, 센추리 안에서의 활약을 잘 지켜보고 있다느니 호영이 기뻐할 이야기들을 하였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 친목을 다지기 위해 온 것처럼, 최수종은 한참 동안 호영과 로열 그룹에 대해 칭찬하였는데 호영도 조금씩 최수종을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대통령처럼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원만한 관계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서론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서자 호영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송 회장님도 알겠지만, 한국이 아무리 위상이 커졌어도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중국의 뜻에 따라 줍시다. 이번 회 차에만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말투가 훈계조로 바뀌어 가는 것 때문에 표정이 굳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는 야당의 대표라는 인물이 진심으로 중국의 횡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표님, 베트남도 당당하게 중국 정부에 맞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보다 강국인 한국이 중국의 횡포에 굴복하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베트남과 우리는 다릅니다. 베트남은 대중 무역을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무역이 중지되면 중국도 타격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역에서의 손실이 두렵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압박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중국 정부의 압박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속국처럼 말입니다.”
“송 회장! 인생은 대나무처럼 꼿꼿하게만 살 수는 없어요! 가끔씩은 꺾이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최수종은 답답하다는 듯 그렇게 소리쳤지만 호영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조선이 아닙니다. 미국처럼 강하게 나가지는 못해도 최소한 제 목소리는 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아.”
호영의 단호한 태도에 최수종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호영의 결정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최수종은 별다른 소득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송 회장님, 부디, 국민들과 기업들을 생각해 주세요. 지금 송 회장의 결정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최수종이 사라지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정치인이란 작자들에게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호영이다 보니, 최수종과의 만남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수종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호영의 사회적 영향력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저자세를 취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호영이 보기에 최수종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중국 정부가 두려워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수용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야당 대표로서 자신감을 가져도 될 위치의 인물인데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
호영은 중국 정부의 실질적인 보복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사용할 수단이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실 그의 동맹이나 세력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중국 정부의 압박에 넘어갈 것이 두려웠다.
대통령조차 중국 정부의 압박에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도 갖지 못한 일반 유저라면 스트레스를 넘어 공포를 느낀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세리자와는 과연 중국 정부의 압박에서 이겨 낼 수 있을까? 북한은? 최근에 와서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중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북한인데…….’
베트남도 안심할 수 없었다.
아니, 로열패밀리 안에서조차 배신자가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중국 정부의 힘은 막강하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
하지만 호영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중국 정부의 압박은 앞으로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잠잠해지지는 않을 터.
그러니 여력이 남아 있을 때 최대한 명나라를 압박해야 했다.
명나라가 무너진다면 중국 정부의 횡포도 결국 멈추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공격하라!”
센추리에 접속하니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호영이야 현실에서 중국 정부의 압박에 대응하고 있었지만 유저들은 센추리에 머무른 채 명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황은 어떻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참모들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하였다.
“곧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성전이 끝나 간다는 말이로군.”
아직까지, 명나라와의 전쟁은 승승장구였다.
중국 정부의 압박에 장수들이 동요하고 있기는 하나,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거대한 명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전쟁에서 이기고 있기는 했다. 명나라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한국군은 전격적으로 남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명나라는 거대하였다.
연전연패를 하고 있음에도 수백만의 군사 수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 군사 수는 줄어드는 속도보다 충원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마 무공을 익힌 자들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명나라의 군사 수는 계속 수백만을 유지할 것이다.
곤란한 점은 이 말고도 또 있었다.
콰앙!
멀리서도 들려오는 폭음 소리. 호영은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공성전에 투입한 청나라군의 병사들이 화염에 휩싸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또 함정인가.”
“……무슨 이슬람 테러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 같은데? 단위부터가 다르잖아.”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지는, 목숨을 담보로 한 공격들.
이번에도 명나라는 백성과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화공을 사용하였다.
성안으로 들어간 얼마 안 되는 병사를 잡겠다고 말이다.
“전후 수습이 또 길어지겠군.”
“송구합니다.”
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정말 조급한데, 상황이 따라 주질 않았다.
아무리 그가 S랭크의 무인이라 해도 지금의 전황에서는 무력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너무도 거대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도록.”
“충.”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호영이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전후 수습하는 데 전부 사용한 호영은 다시 현실로 복귀하였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중국 때문에 떠들썩한 상태였다.
-중국 어선 수천 척이 서해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자국 어선의 ‘깡패 조업’을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TV를 틀기 무섭게 중국과 관련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중국 어선이 서해로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였는데 영상을 보니 아주 영화가 따로 없었다.
수백 척을 넘어 수천 척의 빨간 어선이 바다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쯧.”
호영이 혀를 차며 뉴스를 지켜볼 때,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원재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회장님, 혹시 지금 저택 안이십니까?
“그런데 왜?”
-당분간은 저택 안에 계속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호영은 표정을 굳혔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회장님 사유지 주변에 낯선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사진 몇 장을 보냈는데 한번 보십시오.
확실히 사진 몇 장이 그의 메신저에 올라와 있었다.
호영이 통화를 하면서 사진을 확인하니 동양인이지만 왠지 다른 나라의 사람처럼 보이는 낯선 얼굴들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건장한 것이 운동선수이거나 무슨 특수부대에 소속된 군인들 같았다.
“이자들은 누구지?”
-중국 정부에서 비밀리에 운용하는 척살조입니다. 우리도 방금 전에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척살조라고? 히트맨이라는 건가?”
-예. 회장님을 암살하려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결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집을 감시한다는데 좋은 목적일 리는 없겠지.”
-어쨌든 회장님은 당분간 저택 안에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한국에서 회장님의 저택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원재의 그 말에 호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였다.
자칫하면 암살당할 수도 있으니, 저택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가진 것이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갑자기 답답한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났다.
한편으로는 중국 정부와 맞선다는 것이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과연 로열 그룹과 한국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까?
센추리에서 명나라를 무너뜨리려면 현실 시간으로 최소 한 달은 필요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얻는 게 너무 어려웠다.
중국 정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압박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제재를 넘어 무력 도발까지 한다면, 한국 정부도 더 이상 로열 그룹의 편을 들어 주기가 힘들게 될 터.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중국 정부에서 비밀리에 운용하고 있다는 척살조가 움직인다면 호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한 나라, 그것도 중국이라는 강대국에서 작정하고 키운 척살조인데 로열 가드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호영은 원재와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한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였다.
처음으로 ‘타협’이란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호영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아내, 경선의 목소리였다.
“히트맨은 무슨 소리예요, 여보?”
“어?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센추리 안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야.”
원재와의 통화를 엿들은 것인지 불안한 얼굴로 물어 오는 경선을 보며 호영이 어색한 태도로 횡설수설하였다.
경선이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기에 그답지 않게 당황한 것이다.
“여보.”
“응?”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무엇을?”
“싸우는 거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중국 정부라니.”
처음이었다.
그녀가 호영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경선은 결혼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결혼 이후에는 이상적인 현모양처로서 오직 집안일에만 신경을 썼다.
호영이 무엇을 하건, 절대적으로 지지해 주었다는 뜻이다.
한데 지금 그녀가 처음으로 호영의 일에 간섭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녀의 간섭에 불쾌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
이미 센추리 때문에 그녀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