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99화 (299/345)

# 299

“정백기로 보이는 팔기군의 군대가 우리 군의 진로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합니다. 규모는 대략 3만 정도입니다.”

그 말을 듣고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덧 그의 군대는 요하를 지나 장성 이북을 지나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청나라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청나라군은 한국군의 진군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국경을 지키는 녹영군과 팔기군 일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함인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팔기군의 군대가 그의 군대 정면에서 나타나다니?

푸린 황제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에 그로서는 무척이나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백기? 그들은 황제의 친위 군대 아닌가?”

“예. 팔기군에서 상위 세 개 깃발군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소장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호영은 떨떠름함을 느꼈다. 녹영군이나 한족 팔기라면 적으로 단정 짓고 그냥 공격하면 그만이지만 여진족, 아니 만주족이 이끄는 정백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쳐야겠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진군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전령이 이야기했던 정백기 소속의 군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폐하, 일단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아직까지도 청나라 황제에게 연락이 없었기에 눈앞의 군대가 떨떠름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설마’라는 생각이 강했다.

왜냐하면 황제의 친위 군대가 그를 방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백기가 보여 준 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사, 사신의 목이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미친놈들! 감히 한국의 사신을 죽이다니!”

“폐하!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다짜고짜 사신을 죽이다니.

서로 전쟁 중인 와중에도 사신을 죽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청나라와 한국은 동맹 상태였고, 한국군은 청나라의 반란을 대신 진압해 주기 위해 원정 온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군의 사신을 죽인 행위는 그야말로 ‘명분이 뭐건 일단 무조건 싸우자’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쯧. 이렇게 되면 무조건 싸울 수밖에 없겠군.’

호영은 얼굴이 붉어진 채 흥분하는 무장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 역시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감히 자신의 수하를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는데 어찌 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상황이 너무 수상하다는 게 문제였다.

왜 황제의 친위 부대인 정백기가 저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황제, 푸린이 이제 와서 배신이라도 한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고작 저 정도의 규모로 나를 막으려 들지는 않았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함정이라도 팠다면 모를까, 아주 대놓고 ‘나 여기 있소!’ 하며 움직이던 정백기였다.

고작 3만의 병력으로 20만의 대군을 맞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황제가 배신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대로 저들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중국 정부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됩니다. 청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행히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호영처럼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장수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황보영이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사신이 죽었는데 어찌 보복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복을 하더라도 청나라 황제의 친서를 받고 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청나라 황제도 정백기의 배신을 알아차린다면 우리 손을 빌려서라도 복수를 원할 것입니다.”

황보영의 주장에 몇몇 장수들은 울컥한 얼굴을 하였지만 이론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려면 청나라 황제의 허락이 꼭 필요하였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정백기를 공격한다면 청나라 황제의 의중이 어떻건 양국은 전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끌리게 됩니다.”

“맞습니다. 청나라 황제의 답변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며칠이 걸릴 건데 이러면 우리가 강행군을 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청나라와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을 공격한다고 꼭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저들이 정백기가 아니라 정백기로 위장한 군대일 수도 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저들이 정백기라는 것은 이미 황실 정보부에서 다 확인한 정보입니다.”

장수들의 의견은 금세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지금 당장 정백기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다른 한쪽은 청나라 황제의 답변을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호영이 생각하기에 두 가지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호영은 지금 당장 정백기를 공격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였다.

몇몇 장수들이 말했던 것처럼 한국에게는 청나라 황제의 답변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답은 한 가지밖에 없겠군. 짐이 직접 나서야겠어.”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백기 전체가 청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은 아닐 거다. 지휘부에서 아주 극히 일부가 배신했을 터. 그러니 짐이 그들을 청나라 황제 대신 심판하겠다.”

그가 선택한 방안은 소수의 절대 고수가 공격에 나서는 것이다.

즉, 호영이 직접 적의 지휘부를 친다는 뜻.

당연하겠지만 그의 수하들에게는 기겁할 만한 내용이었다.

“설마, 폐하 혼자서 적을 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되옵니다. 폐하! 적의 군대는 3만이 넘습니다!”

호영은 격렬하기 그지없는 부하들의 반응에 피식 웃고는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짐의 친우들도 함께할 것이다.”

친우들도 함께한다는 말에 잠시 소란이 가라앉혔다.

그가 친우라 부른 두 사람의 무공은 엄청난 수준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S랭크의 초고수였으니까.

무 씨 성을 가진, 무영과 초 씨 성을 가진 초환.

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무가 출신들답게 두 사람은 실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실력 때문에 무공에 관심이 많았던 황제와 친우가 되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초환의 경우는 본래 S랭크 무공이 아니었지만 6회 차가 되면서 S랭크의 경지에 올랐다.

왜냐하면 6회 차부터 초환은 준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은 호영과 같은 절대 고수였고 세 명의 절대 고수라면 적진을 치는 것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친우분들이 함께한다고 해도 셋이서는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의 전투 교리는 100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절대 고수라 해도 이전처럼 활약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100년 전에는 절대 고수 한 명이 만 명도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고작해야 천 명 정도가 한계일 것입니다. 전략과 전술이 그리고 무기가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단순히 전략과 전술만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 병사들의 전투력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습니다. 마법사들의 실력도 많이 달라졌고 말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굳이 무리한 전투를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부디 소장들을 믿고 진중하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다시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된 호영.

보통 때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 주는 수하들이지만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에선 이렇게 반대가 줄곧 있었다.

솔직히 그로서도 이런 식으로 제동을 걸어 주는 것은 나쁘게 볼 일이 아니었다.

가끔 그는 지나치게 용기를 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수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기로 하였다.

“말했지만, 지금은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하나······!”

“걱정하지 마라, 경들이 지적한 것을 짐도 모르지는 않으니. 다만 경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상대는 우리 한국군이 아닌, 팔기군의 정백기라는 사실이다.”

“······!”

“낡고 고루하며 부패한 군대다. 그들은 한국군처럼 100년 동안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였다.”

이미 황실 정보부에서 파악한 정보였다.

100년 전, 청나라의 최정예 군대로 이름을 드높였던 팔기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퇴보한 상태였다.

군대가 아니라 가족 모임이라도 되는 양, 지휘관 자리를 능력도 없는 혈족들에게 내주어서 생긴 일이었다.

팔기군에게 더 이상 긍지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긍지는커녕 처첩이 있는 수도로 돌아가자는 생각뿐일 것이다.

‘뭐,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공격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형편없이 퇴보한 군대라 해도 한 나라의 최정예라 불리는 군대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호영이 극소수 인원으로 공격에 나서려는 이유는 청나라와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즉, 정백기 내부로 잠입하여 친명파로 판단되는 지휘관들만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장수들이 걱정하는 일이 생길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정백기 내부에 S랭크의 절대 고수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를 응징하려는 것이겠지.”

“그래서요?”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는 말이다.”

예친왕의 말에 본래는 일개 유격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던 한족 출신의 서달이 싸늘하게 맞받아쳤다.

“지금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고작 천오백 명을 다루는 일개 유격이, 모든 니루를 다루는 기주이자 총병관인 예친왕을 위협하는 상황.

원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만주족으로 보이는 장수들이야 분해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장수들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했지 않습니까, 한국은 우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황제가 직접 친정하였다. 그런데 우리를 치지 않을 것이라니.”

“한국의 황제는 지나칠 정도로 이해타산적입니다. 치는 게 이득일지 치지 않는 게 이득일지는 한국의 황제도 잘 알 것이니, 절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친왕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공격을 당해도 상관없겠지, 네놈들은. 우리와 한국이 싸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테니까.’

정백기를 장악하고 있는 서달은 한족이었다.

만주족으로만 이루어진 정백기에서 한족인 서달이 권력을 장악한 것도 실로 놀라운 일인데 그는 예친왕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청나라의 형제 국가인 대한 제국과 싸움을 붙이려는 음모였다.

참고로 예친왕은 어떻게든 서달의 음모를 막아 보려고 온갖 발악을 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정백기에서 한족은 분명 소수였지만 어디에서도 존재하였다.

무엇보다 예친왕 본인이 서달의 손에 잡혀 있는 상황이라 제약이 너무 많았다.

우습게도 3만의 지휘권이 예친왕에게 있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수십 명 때문에 지휘권이 서달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만주족 장수들 중에 제대로 된 정신머리를 가진 이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지휘권을 회수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전쟁에 관심이 없거나 마약에 빠져 있으니 예친왕으로선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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