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95화 (295/345)

# 295

호영은 피식 웃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기에, 명나라를 칠 생각이 없는 줄 알았더니 역시 누르하치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한국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전쟁과 관계없이 외교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청나라를 적대하느냐, 지지하느냐에 따라 6회 차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제안을 할지가 궁금하네. 5회 차 때처럼 땅을 제안하려나? 하지만 그들이 줄 땅은 이제 별로 없을 텐데. 그렇다고 명나라를 밀어낸 이후 강북 땅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웬만해서는 청나라에게 손들어 줄 생각이지만, 청나라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면 그때는 협상이 결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방파제로서 청나라의 역할이 한국에게 무척이나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호구가 되면서까지 도울 이유는 없었던 까닭이었다.

“무슨 제안을 하건, 일단 성대하게 준비를 해야겠군. 일단 명목상으로는 청나라가 한국의 형이니 말이야.”

그로부터 보름.

불과 보름 만에 청나라의 사절단이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였다.

육로가 아닌 해로를 선택한 결과였다.

“아유르바르와다라고 하옵니다, 폐하!”

“환영한다, 청나라의 사신이여.”

만약 약소국의 사신이 찾아왔다면 차일피일 미루다 접견을 허락하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상대는 초강대국 청나라였다.

호영은 사절단이 도착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을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청나라의 사신이 한국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양국은 형제 국가이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한데 지금, 형제 국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대한 제국은 어찌 가만히 방관만 하고 있는 겁니까?”

몽골의 유력 부족인 곤기라트 출신이라던 청나라의 사신은 무례하다 싶은 어조로 따지듯 호영에게 물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같은 사신의 태도에 호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청나라가 저자세를 취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리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엄하오! 어찌 한낱 사신이 황제 폐하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오!”

준기가 사나운 얼굴로 그리 외쳤으나, 사신은 사과하기는커녕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무례라니요! 지금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대한 제국임을 모르는 것입니까!”

“이자가!”

무장들이 참지 못하고 살기를 피울 때, 호영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사신에게 물었다.

“설마 명나라와의 일에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는 건가?”

“알고는 계시군요. 알고 계셨다면 어서 신하들에게 명을 내리시지요. 청나라를 최대한 지원하라고! 식량이든, 무기든, 공녀든 말입니다.”

“······식량과 무기라······. 그건 그렇다 치고 공녀는 무슨 말이지?”

“대한 제국의 여인들이 뛰어난 미색을 가졌다는데, 그들을 보낸다면 청나라 장수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호영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신하들도 그의 심정에 동조하였는지 여기서 헛웃음과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사신의 태도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우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 외신보고 미쳤다고 하셨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짐에게 그런 언사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청나라의 사신인 외신에게 이런 모욕을 주시다니요! 폐하께서는 청나라의 힘이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사신의 말에 호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야말로 우리의 힘이 두렵지 않은가 보구나.”

청나라와의 전쟁?

분명 꺼려지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서 피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도 일본 열도와 만주를 포함하면 인구 1억이나 되는 인구 강국에다, 군사력도 예비군을 총동원하면 100만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S랭크 무인이 다섯이나 있다.’

그야말로 현대의 핵미사일과 비견되는 비대칭 전력이 바로 S랭크의 무인이었다.

현재 한국은 NPC까지 포함하면 S랭크 무인의 수가 무려 다섯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세계 제일의 수준으로, 청나라나 명나라조차 S랭크 무인의 수가 다섯 명을 넘지 못하였다.

그마저도 유저는 각각 한 명뿐이었다.

“이익!”

청나라의 사신도 뒤늦게 한국의 힘이 생각났는지 분해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외신을 이리 대한 것을,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사신이 대전에서 사라지자 신하들이 청나라 사신의 행태를 비난하였다.

“감히 아국을 이리 무도하게 대하다니! 청나라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아국은 고립주의를 선택하여 중립국으로서 두 나라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유도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황제 폐하! 차라리 명나라와 손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신이 저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데, 청나라에게 힘을 실어 줄 이유는 없습니다!”

원래 한국 정계의 여론은 호영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와 손잡고 명나라를 견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NPC들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청나라는 100년 동안 이어진 끈끈한 동맹이었다.

지금 한국과 가장 우호적인 나라가 청나라일 정도이니, NPC들의 여론이 청나라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신의 무례한 태도를 지켜본 이후에는 여론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로열패밀리 소속의 간부들은 물론이요, NPC들까지 청나라를 비난하며 외교 방침을 수정할 것을 간청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이 상태에서는 청나라에게 힘을 실어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갑이 되어야지 을이 되어서는 안 되니 말이야.”

호영도 청나라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사신의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호영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다시 손을 들어 신하들을 진정시키고는 차분히 이와 같은 말을 꺼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어떤 것입니까, 폐하?”

“과연 저 사신의 행동이 청나라 황제의 뜻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신의 행동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한창 명나라라는 강대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에서 한국을 적으로 돌리려 하다니.

물론, 한국의 역량을 과소평가했거나 자국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여 무례를 저지른 것일지도 모르지만, 청나라 황제가 그렇게까지 무능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청나라 황제 누르하치, 아니 이제는 푸린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그자라면 한국과 호영을 높이 평가했으면 높이 평가했지 결코 낮게 평가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청나라 사신이 보여 준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목적이라면, 사신이 혹시 명나라의 첩자라는 말씀이십니까?”

“첩자까지는 아니어도 돈을 받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받기로 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전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황실 정보부장.”

호영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정보를 담당하는 원재를 불렀다.

“예. 황제 폐하.”

“청나라 사신이 몽골인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사신은 곤기라트 부족 출신의 몽골인입니다.”

“곤기라트라면 몽골의 지도층에 속한 부족이지 않나?”

“폐하의 말씀대로 곤기라트는 황후를 두 번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몽골에서 유력 부족으로 손꼽힙니다.”

“그 정도의 부족이라면 야망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겠어.”

몽골은 현재 청나라에 복속된 상태지만 한족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치권뿐만이 아니라 청나라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는데, 대대로 청나라 황실에 황후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이 일본 영주들과 혼인 동맹을 맺어 일본에 대한 장악력과 지배력을 극대화하였듯, 청나라도 몽골의 지배력을 혼인 동맹으로 극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 유저들과 다르게 몽골 유저들은 청나라 황실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혼인 동맹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NPC들 사이에서나 유효한 것.

청나라에 어느 정도 소속감을 가지게 된 몽골 NPC들과 달리 몽골 유저들은 업적 점수를 받기 위해서라도 몽골 독립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호영이 하려는 말처럼 청나라 사신으로 온 몽골인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청나라가 명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 말이다.

“황제 폐하! 자신이 청나라 황제의 진짜 사신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칙명을 들고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때마림 호영의 확신을 더해 줄 이가 알현을 청해 왔다.

청나라 황제의 진짜 사신이라고 주장하는 청나라 인이었다.

“외신은 구왈기야 롱루라고 하옵니다.”

“구왈기야라면 강북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였다던 씨족이 아닌가?”

“황제 폐하의 식견에 외신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외신의 구왈기야 씨족은 양황기에서 군공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호영은 그의 말에 피식 웃다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대가 정녕 청나라 사신이 맞는가? 맞다면 아까 대전에서 보았던 아유르바르와다라는 자는 뭐지?”

“그자 역시 아국의 사신이 맞습니다.”

“사신이 두 명이라니, 짐을 능멸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청나라 조정에서 사신으로 보낸 자는 아유르바르와다가 맞습니다. 다만 외신은 아국의 황제께서 비밀리에 보낸 사신입니다.”

“비밀리에? 굳이 그래야 될 이유가 있었나?”

“청나라에서는 한국과의 외교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몽골인들을 말하는 건가?”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한족 출신의 중앙 관료들과 군부 장교들이 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권력이 예전 같지 않은가 보군. 신하들이 황제가 하려는 일에 반대하려고 들다니 말이야.”

그 말에 롱루는 쓴웃음을 지을 뿐,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황제의 권력이 실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청나라의 상황이 심각한 것인가.’

겉으로 봐서는 여전히 강성하기 그지없는 청나라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썩다 못해 고름이 고이고 있었다.

대놓고 반기를 드는 몽골 부족들과,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명나라의 편으로 돌아설 한족들.

심지어 유저들까지 호시탐탐 독립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명나라를 이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 조정을 속이면서까지 짐에게 사신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

“아국의 황제께서는 대한 제국과의 동맹을 원합니다.”

“동맹이라? 우리는 이미 형제 국가이지 않은가?”

“6회 차가 시작되기 전에 했던 외교들은 전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대는 유저였군.”

“예. 외신은 유저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도 되겠구나. 동맹을 원한다고 했지? 이 상황에서 동맹이라면, 명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질 때 지원을 해 달라는 의미일 것인데, 청나라는 아국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호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룽루는 잠시 한숨을 쉬다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국을······ 아국, 청나라를 드리겠습니다.”

“······!”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