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호영의 그 말에 로열패밀리 간부들 그중에서 아무런 직책을 가지지 않았던 간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사실 지금까지 로열패밀리 멤버들의 직책과 역할이 모두 중구난방이었다.
이유는 단순하였는데 황제가 임명했던 고관대작이나 중앙군 장교들이 여전히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황태자 책봉식 이후로, 호영은 숨겨진 실세가 아닌 명실상부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여전히 황제는 존재하였지만 황제의 권력은 허울뿐이었고 제국의 모든 권력은 대리청정을 하는 호영에게 있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을 손에 쥔 호영이라도 구신들을 함부로 내칠 수는 없었다.
일단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안 그래도 혼란한 상황에서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이다.
“뜬금없이 청나라와 동맹하여 중국을 공격한 건에 대하여 아직까지 반대를 표출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나마 아국의 피해가 거의 없고 오히려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어 반대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개혁이나 숙청을 입에 담는 순간 황제의 지지자들이든, 아니면 황태자 전하를 반대하는 자들이든 들불처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최민환과 마찬가지로 7인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용우, 아니 5회 차에서는 신동일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내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일부 간부들이 그의 뜻에 동조하여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로열패밀리라고 모두 구신들을 배척하자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가졌을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호영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이 나라는 아직 전후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분란이 야기될 일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았다.
구신들을 숙청하여 신진 관료를 임명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신기하군. 안지호가 이런 말을 하다니. 저번 회 차까지는 그 누구 못지않은 강경파였는데 말이야. 이미 재무 장관의 자리에 올라서 그러는 것일까?’
호영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숙청을 해야 한다. 그들은 전쟁에 불리해질 때면 언제든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킬 자들이니까.”
“대한 제국의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기에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국이 커진 만큼 우리 로열패밀리의 규모도 커졌다. 경험이나 실력도 훨씬 상승하였고 말이야. 지금의 로열패밀리라면 숙청으로 인한 혼란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권위라면 이런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이 명령으로 강제해도 괜찮겠지만 그는 독재자일지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귀찮다는 이유로 자신의 뜻을 강제할 수만은 없는 법.
호영은 그래서 의외로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었다.
‘나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다 생각한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자리가 어려울 게 뭐가 있겠나.’
이러한 호영의 설득 때문이었을까.
신동일도 결국 호영의 뜻에 동조하였다.
그가 동조하니 다른 간부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모두가 동의했으니, 일정을 말해 주겠다. 사흘 뒤, 여기 살생부에 적혀 있는 구신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그렇게나 빨리 말씀이십니까?”
“허어, 내무부의 관리들은 전부 포함된 것 같은데…….”
“중앙군과 남방군을 한꺼번에 정리하려 든다면 쿠데타가 발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호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가 소란해졌다.
불과 사흘 뒤에 숙청을 감행한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살생부에 포함되어 있는 엄청난 수의 이름을 보고 다들 놀라워하였다.
장교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1천 명 이상이 숙청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분이나 직책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만약에 이대로 숙청이 진행된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핵폭탄이 떨어진 것만큼 큰 충격에 휩싸이겠군요.”
그리고 누군가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전격적인 피의 숙청이 시작되자 제국 전체는 엄청난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호영의 정치에 반대했거나 친황제 세력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은 모조리 연행되었고 부정을 저질렀거나 죄질이 심한 이들은 현장에서 즉결 처분당하였다.
단 하루.
겨우 하루 만에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던 고관대작 5할 이상이 구금되었고 군부의 장성들과 장교들 역시 대거 구금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숙청의 결과로 제국은 크나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지역을 책임지는 지방관, 야전을 지휘하는 야전 사령관, 심지어 각 부의 장관들까지, 소위 말하는 ‘지배층’이 대거 숙청당하였으니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아졌군.”
숙청이 있고 하루가 지난 뒤, 여느 때처럼 조정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조정 회의의 분위기는 어제와 차원이 달랐다.
그의 중얼거림처럼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아져서 그런지, 어제보다 훨씬 삭막하면서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비단, 중앙정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격적인 숙청은 수도뿐만이 아니라 내지 전체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기에 제국 전체의 분위기는 지금 조정의 분위기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뭐, 내일이면 다시 채워지겠지만.”
호영의 말에 구신들 정확히는 NPC로 이루어진 대소 신료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회 차를 거듭하면서 NPC들도 유저의 존재를 인식하였고 당연히 호영이 유저라는 사실이나 그의 최측근이 모두 유저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NPC들 입장에서는 호영이 유저들을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호영이 로열패밀리를 중하게 쓰는 것은 사실이었고 말이다.
‘NPC들에게 미움을 받게 생겼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신료들의 표정을 보며 호영은 쓰게 웃었다.
그는 NPC들을 차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숙청하였던 NPC들은 너무 무능하거나 너무 부패하거나 너무 황제에게 충성하였다.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숙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숙청했든, 저들의 눈으로는 전부 비겁한 핑계로만 들리겠지. 이럴 때는 그냥 폭군 행세를 할 수밖에 없겠어. 뭐, 이미 지금까지 한 일만으로도 충분히 폭군이라 불릴 법하겠지만 말이야.’
호영이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바로 뒤에서 무기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목소리였다.
“태자는 새로운 장차관들을 어떻게 뽑을 생각이냐?”
“현재의 신분, 나이, 출신에 관계없이 오직 능력만으로 인재를 등용할 생각입니다.”
황제의 물음에 호영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리 답했다.
실제 그는 로열패밀리뿐만 아니라, NPC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라면 가리지 않고 등용할 생각이었다.
로열패밀리의 능력이야 5회 차가 끝날 때까지만 유효하였으니 NPC들도 적절하게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의 생각이 그렇다면 뜻대로 하라.”
모든 것을 포기하기라도 한 듯,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호영은 그런 황제를 보며 오히려 경계심을 품었다.
‘권력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면 아예 양위 선언까지 해 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끝까지 양위 선언을 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정치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뜻. 그렇기에 호영은 방심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양위 선언을 한다고 해도 5회 차가 끝나기 전에 독살할 것이다.
“한데…….”
“말씀하시지요.”
“혹시 황실 정보부장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지 알 수 있겠는가?”
“죄질이 나빠 교수형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가.”
자신의 충견이 교수형에 당한다는 말을 듣자 황제의 목소리도 조금은 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원견을 살려 달라거나 선처를 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충견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조차 지키지 못하는 군주가 무엇을 지키겠다고.’
호영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어쨌든 이루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루었다.
솔직히 관료들과 군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을 때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황제의 반발이었는데, 황제가 이런 태도를 보이니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바로 개혁을 진행해도 문제 될 게 없겠어.’
다음 날이 되자 새로운 인물들이 중앙정부의 요직과 군부의 요직에 앉혀졌다.
하층민 신분에 일본 출신, 심지어 성별이 여성인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인물들로 인사가 개편된 것이다.
하지만 잡음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말을 조심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인물들이 하나같이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관료나 군인으로 살아온 것처럼 모든 면에서 충분히 완숙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하층민이거나 여성이다 보니 관직을 경험한 일이 없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호영이 임명한 인재들은 지난 4회 차까지 본연의 능력을 철저하게 증명한 인재들이었다.
무공으로 따지면 A랭크, B랭크의 실력자로 각 분야의 전문가 중에 전문가였다.
몇몇 유저들의 경우는 그야말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의 인재였다.
그 정도로 호영이 뽑은 인재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저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NPC들도 적지 않게 등용되었지만 이들의 능력 역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호영이 가진 엄청난 정보력으로 가리고 가려 뽑은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개혁을 진행할 것이다. 각 부의 장관들과 장수들은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숙청으로 인한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을 무렵, 호영이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놓고 그렇게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의 측근들은 이전처럼 일개 야인의 신분으로 있지 않았다.
인사 개편의 최대 수혜자들답게 각 부의 장관이니 차관이니 꽤나 화려한 직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치 제자리를 찾은 양 태연하였다.
지금도 갑작스러운 호영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어떠한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충직하게 호영의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장수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개혁이 시작되면 언제 반란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호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이 나라에서는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피의 숙청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변화였다.
숙청이야 어떻게 보면 사람만 바뀌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이번에 있을 개혁은 국가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그 변화의 정도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기술 문명이야 근대로 접어들려면 아직 멀었지만 국가 시스템만큼은 어떻게든 이번 회 차 안에 근대 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로열패밀리 간부 중에 누군가는 제나라와의 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지나치게 급격한 개혁이라며 반대하는 이가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