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심지어 딸이 결혼하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세상사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과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경선 때문에 만나는 일보다 센추리 때문에 만나는 일이 더 잦을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이제 겨우 세 번 정도뿐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박선후와 호영은 장인어른과 사위의 관계이면서도 이처럼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사이였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전쟁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 들었어.”
박선후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그가 전쟁에 대해 물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재미있다기보다는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S랭크 무인 때문이겠지?”
“아, 예. 하북 팽가의 가주라는 자가 5천의 의용군을 이끌고 있는데 그가 S랭크 무인이라 잡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가면 어떨까?”
“예?”
“슬슬 다른 S랭크의 고수와 생사를 걸고 대결해 보고 싶었는데, 내가 전쟁에 참전해도 괜찮겠지? 사위의 일을 방해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야.”
호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는 절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선후를 보며 호영은 당황하였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여 결혼식 관련해서 따로 이야기할 게 있는 줄 알았더니, 용건이 벌써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버, 벌써 가십니까?”
“왜? 더 할 이야기가 있나?”
“그건 아닙니다만······.”
“아, 내가 어디로 갈지는 알려 줘야겠군. 나는 중국의 태원으로 갈 계획이다.”
“태원이라면······?”
“의용군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지. 그곳에서라면 하북 팽가의 가주라는 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버님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청나라 측에 이야기를 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삼국 동맹에서 한국의 입지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원래부터 제나라의 후방을 괴롭히는 역할만 맡기로 하였지만 두 나라의 피해가 커질수록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만큼 박선후가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한국에게 악영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것이다.
최강의 무인이라 할 수 있는 S랭크의 무인을 전쟁에 동원한 셈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건 너 알아서 해라. 다만, 청나라군이 나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강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입니다. 애초에 한국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S랭크의 무인을 강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았다. 그럼 나는 이만.”
박선후는 뒷짐을 진 채 태연자약하게 문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침입자이면서 당당하게 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호영이 그런 박선후를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릴 때, 갑자기 박선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벽을 넘지 못했지? 설마 여전히 이곳이 게임 세상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 말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나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 이유가 뭐 때문일까? 아직도 이곳을 게임 세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S랭크가 되고 싶다면 잘 새겨 두어라. 이곳은 게임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라는 것을.”
“······?”
또 다른 현실이라고?
설마 음모론자들이 하는 말처럼 이 센추리 세상이 다른 차원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내 경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역시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센추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를 가진 게임이었다.
한국 굴지의 대기업을 경영하는 회장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센추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센추리에 존재하는 세계가 다른 차원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음모론이나, 센추리는 신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그런 음모론들 말이다.
하지만 호영에게 그런 음모론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도 밝혀지는 것이 크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영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센추리가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면 달라지는 게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준기에게 물어봐야겠어.’
박선후가 보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는 이미 떠난 상태였다.
아마 현실에서 가르쳐 달라고 해도 딱히 무언가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르쳐 줄 것이었다면 본인이 S랭크가 되었을 때 진즉에 가르쳐 주었을 터.
그러니 호영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준기뿐이었다.
준기라면 박선후가 해 준 말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으리라.
#분열의 조짐
“글쎄요. 무공을 익힐 때 보다 진지하게 임하라는 의미가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호영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준기에게서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얻어 내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같은 S랭크의 무인이라도 깨달음은 달랐던 모양이다.
결국 호영은 쓰게 웃으며 현실로 되돌아갔다.
지금 당장은 무공보다 경선과의 결혼식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마침내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은 칠인회와 친인척만 초대하였기에 아주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로열패밀리나 로열그룹의 임직원, 대한 길드의 멤버들을 모두 초대한다면 야구장을 빌려도 부족했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뭐, 애초에 신부 가족이나 신랑 가족 모두가 거창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그래도 규모만 작을 뿐, 화환이나 축의금 규모는 세계 톱스타 못지않았다.
“신혼여행은 안 가십니까?”
결혼식 다음 날 곧바로 본사에 출근한 호영을 보고 전략 분석 팀의 본부장, 조경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볼거리는 센추리에 더 많아서 나중에 센추리에서 같이 여행 가기로 했다.”
“······진심이십니까?”
호영의 대답에 경호는 황당해하였다.
안 그래도 센추리 중독인 양반이 신혼여행까지 센추리에서 한다고 하니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이 불쌍하군요.”
“경선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뭐가 불쌍해.”
“형님은 결혼까지 했으면서 어째 여자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쏠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답게 한참을 티격태격했다.
아마 호영을 상대로 이렇게 격 없는 태도를 보일 사람은 이제 몇 없을 거다.
그래서 호영에게는 경호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호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돌연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경호에게 물었다.
“장인어른이 태원에서 팽가의 가주와 맞붙었다고 들었다.”
그러자 경호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호영과 마찬가지로 경호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 어제 일기토를 하였다고 합니다.”
“결과는?”
“일기토 자체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의 승부였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깜짝 놀랐겠군.”
“예. 그래서 일기토의 승부와 관계없이 전투는 청나라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지?”
“청나라군이 전해 준 정보대로라면 한동안 의용군이 활개 칠 일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 말에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동맹군을 귀찮게 하던 의용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도 그를 즐겁게 하였지만 그보다는 한국이 이번 승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특히 즐거웠다.
박선후는 한국의 무인이었고 그의 활약은 곧 한국의 공이었으니 말이다.
“곧 점령지가 안정되겠군.”
“가장 세력이 컸던 의용군 조직이 그리되었으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슬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어.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말이야.”
삼국 동맹에 가담했으면서 언제까지 전쟁을 관망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센추리에 접속하러 가십니까?”
경호의 물음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때문에 너무 오랜 시간을 방치하였다.
물론 그래 봐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센추리 시간으로 무려 한 달이었다.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내정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달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대혼이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나 걱정이야. 똑똑한 편이지만 심성이 너무 무르니까.’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센추리에 접속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신혼 생활은 어떻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영은 그들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그들을 본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두 잘 지냈나?”
자신이 로그인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수하들을 향해 호영이 그리 물었다.
그러자 열성적인 화답이 들려왔다.
반응들을 보면 호영을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몇몇 간부들은 일부러 과장스럽게 반응한 것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몽, 청 동맹군이 다시 출정 준비를 하고 있다 들었다.”
일주일 만에 수하들을 다시 보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호영은 평소 성격답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기야, 신혼 첫날부터 본사에 출근하고 센추리에까지 접속하는 워커홀릭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으리라.
“예. 그렇습니다. 지난 1개월 동안 두 나라는 점령지를 어느 정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어제 있었던 승리로 후방을 튼튼하게 하였으니 곧바로 침략 전쟁을 개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나라와 양나라 중 어디를 침공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만······ 제나라를 먼저 침공할 것 같습니다.”
외교를 책임지는 최민환의 답변에 호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양나라보다는 제나라를 먼저 침공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면 우리는 처음 약속했던 대로 제나라의 후방을 쳐 줘야겠군.”
“동맹 관계를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우리가 이대로 관망만 한다면 세상 모두를 적으로 삼게 될 것이니, 제나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해.”
이제 와서 삼국 연합의 편에 선다고 해도 그들이 진심으로 받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은 손잡을 수 있어도 몽골과 청나라를 무찌른 이후에 곧바로 한국을 공격할 것이리라.
그러니 한국은 삼국 동맹의 일원으로서 제나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전쟁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제나라를 치고자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것입니까?”
“내부를 정리해야지. 그동안 너무 어수선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