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이렇게 순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순나라의 동맹인 제나라는 다급히 지원군을 보내는 한편, 외교적인 노력도 거듭하였다.
당연히 제나라가 주력한 외교 상대는 대한 제국, 정확히는 호영이었다.
“우리 제나라와 수백 년 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던 한국이 어찌 저 북방 오랑캐와 손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부디 지금이라도 정도를 걸으십시오!”
제나라의 외교적 노력은 센추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에서 비공식적으로 항의하였습니다! 오늘 이후로 청나라나 몽골을 돕는 행위를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답니다!”
유저들 중에 중국의 권력자가 끼어 있었는지 현실에서 이와 같은 협박을 하였다.
만약 호영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이 같은 제나라의 수작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의 호영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호영은 누구에게도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제나라와 순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해라! 우리도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다.”
굴복하기는커녕 되레 강하게 맞부딪치는 호영이었다.
“구주 총독이 출정에 나섰습니다.”
“제나라군이 회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전포고를 하고서 곧바로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니 순나라를 지원하고 나섰던 제나라군이 다급하게 회군하였다.
하지만 보군으로 이루어진 제나라군이 한국의 함대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제나라의 항구들은 순식간에 약탈당하고 방화되어 폐허로 바뀌었다.
해안가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구라 불리는 해적들이 주로 속해 있는 구주 함대는 제나라의 해안가를 철저하게 약탈하였다.
사로잡은 포로의 숫자만 10만이 넘을 정도로 성공적인 약탈이었다.
“회군하라!”
제나라의 군대가 다시 돌아오자 구주 총독 순신은 발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회군 명령이었다.
그렇게 한국군은 전격적으로 쳐들어왔다가 전격적으로 물러났다.
당연히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기에 피해는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반면 제나라는 엄청난 인적 피해와 자원 손실을 입었고 말이다.
“전하! 다시 출정 명령을!”
또 한 번 함대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약탈한다는 순신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방비가 너무 두꺼워졌어. 수비하는 병력도 너무 많고 말이야.”
“설령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고 해도 승산은 충분합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순신의 모습에 호영은 이채를 띠었지만 대답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피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어차피 한국의 역할은 제나라의 후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제나라는 한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해안가에 묶어 둔 상태였다.
순나라를 지원하러 간 제나라의 병력은 고작해야 3만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한국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한국으로선 더 이상 피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삼국 동맹이 불리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현재 전쟁 상황은 삼국 동맹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였다.
제나라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제 집 지키느라 바빴고, 순나라는 이미 수도를 빼앗긴 채 남쪽으로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여기에 몽골과 청나라에서 추가 지원군이 거듭 들어오고 있어 순나라는 날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앞으로 길어야 한 달 정도나 버틸 수 있을까?
그 한 달이라는 기간도 공성전 때문에 길어지는 것이지, 공성전만 아니었다면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하!”
그때 정보를 담당하는 부관이 다급하게 호영을 불렀다.
호영이 이유를 물으니 부관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양나라가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동원한 병력만 20만이 넘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몇몇 참모들이 침음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양나라의 참전에 당황한 것이다.
“올 것이 왔을 뿐이다! 당황하지 마라!”
하지만 참모장의 직책을 맡은 충구는 당황하지 않고 그렇게 외쳤다.
물론 당황하지 않는 것은 호영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삼국 연합군이 결성되었군.’
양나라의 개입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나라가 무너지면 그다음 차례가 바로 양나라였다.
아무리 순나라와 적대 관계였다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적대 관계고 뭐고 의미가 없었다.
외적을 무찌르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전하! 양나라까지 개입하였으니 우리 한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신의 말은 결국 자신을 전쟁에 내보내 달라는 말이었다.
“일단 지금은 관망한다.”
“자칫하다간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리될 것 같으면 몽골이나 청나라가 구원을 요청할 것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신의 주장처럼 한국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옳을지 몰랐다.
양나라의 참전으로 이 대 이에서 삼 대 이가 된 상태.
전력을 비등하게 만들려면 한국이 개입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만약 제나라와 양나라가 총력을 다해 순나라를 지원했다면 모를까, 그들은 여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한국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순나라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이 되었지만 양나라와 제나라는 그다지 경각심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대비만 철저히 한다면 순나라처럼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괜히 한국이 나서서 저들이 경계심을 느끼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청나라와 몽골만으로 삼국 연합을 깨뜨리기는 충분하였으니 말이다.
이 같은 호영의 예상은 양나라가 개입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나 현실이 되었다.
양나라가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나라의 멸망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는 제나라로, 황태자는 양나라로 망명을 갔다고?”
“예, 정부와 군부 인사들도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졌습니다.”
“벌써 전쟁이 끝났다고 착각하는 모양이군.”
호영은 조소를 지었다.
이미 국토 전체를 빼앗긴 주제에 타국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순나라의 지배층이나, 황제와 황태자를 손에 쥐고 순나라의 영토를 노리는 두 나라나 그에겐 우습기 그지없었다.
아직 강북의 나라들만 상대했을 뿐이지만, 어쨌든 더 이상 중국이란 나라를 높이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중국이란 나라에선 정부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무림이니까. 몽골이나 청나라도 부디 방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호영의 걱정대로 순나라 황실이 무너지자 무림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무림 세가들이 무인들을 이끌고 유격전에 나선 것이다.
다행히 몽골에서는 하마드란 이름의 S랭크 무인이 있어서인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나라의 경우는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큰 피해를 보고 말았다.
무려 S랭크의 무인이 청나라군의 후미를 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어.”
“그러면 전쟁이 길어지지 않겠습니까?”
“길어지겠지. 어쩌면 5회 차가 끝나기 전까지 전쟁이 안 끝날 수도 있고.”
이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열병기가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서 다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다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중화사상이라는 오만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은 더욱 정복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순나라 황실이 무능하고 제나라와 양나라가 굼뜨게 움직여 순나라는 어찌어찌 점령하는 게 가능할 테지만 그 이상은 미지수였다.
‘뭐 나로선 순나라만 점령해도 충분하지. 최소한 간도 지역과 요동 지역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호영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전쟁보다는 내정에 집중하였다.
* * *
중국 의용군의 활약으로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동안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느덧 5월이 되었는데 호영의 결혼식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워커홀릭이라지만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센추리에만 빠져 살 수는 없었다.
전쟁이나 전후 복구에 관해서는 7인회에 완전히 위임하고는 현실에서 결혼식을 준비하였다.
“와, 좋아요가 100만이 넘어요!”
“대통령님께서도 결혼을 축하한다는데요?”
“우리가 결혼하는 게 뉴스에도 나오고 있어요!”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경선도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호영은 그런 경선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양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게 하는 여인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저 여인과 결혼을 하는구나.’
경선과 곧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 두려움? 설렘? 기쁨?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결혼식 규모가 너무 작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왜 또 그 말씀을 하세요. 저는 친한 사람들과 소박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아요.”
“······그래?”
“그리고 애초에 규모가 큰 결혼식은 센추리에서 이미 했잖아요? 황태자 책봉식에서 말이에요.”
경선의 말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책봉식에서도 경선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혼한 이후에는 과연 내가 잘 챙겨 줄 수 있을까?’
센추리 때문에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미래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자 왠지 모르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센추리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 잠시만요. 아빠, 전화 왔어요.”
“응. 편하게 전화해.”
“아빠, 왜? 센추리? 지금 접속하라고?”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녀의 대화에서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빠가 지금 센추리에 접속하라 하시는데요?”
이윽고 전화를 끊은 그녀가 호영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왜?”
“저도 모르겠어요.”
“알았어. 일단 접속해 볼게.”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장인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호영은 곧바로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장인어른?”
센추리에 접속하니 신기하게도 그의 장인, 박선후가 떡하니 그의 침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개 야인 신분인 박선후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태자궁에 들어온 것이다.
“경비가 너무 약한 것 같은데.”
“예?”
“내가 암살자였으면 이미 죽었을 거라고.”
“······.”
그 말에 호영은 오랜만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박선후가 암살자였다면 이미 호영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 혼자서는 S랭크의 박선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욱 철저하게 경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이없게 죽고 싶지 않다면 그러는 게 좋겠지.”
참고로 박선후는 본래 호영에게 경어를 사용하였지만 계속된 호영의 설득으로 얼마 전부터 경어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장인어른으로서 사위에게 하대하기 시작했다고 딱히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박선후는 마치 수도자처럼 세속에 초탈한 사람이었는데 유일하게 흥미를 가지는 것은 무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