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정당한 이유 없이 아국을 공격한 침략자 놈들과 강화 협상을 맺느니 동이 취급을 받더라도 동맹국을 하나 만드는 게 우리에게는 차라리 나은 일이다.”
물론 호영도 중국인들 특유의 중화사상을 모르지 않았다.
마치 근대 이전의 중국이 그러했듯 사방의 국가를 오랑캐 취급하는 바로 그 중화사상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대로 청나라와 굴욕적인 협상을 하느니, 한국을 동이 취급하는 중국과 동맹을 맺는 게 훨씬 이로웠다.
중국과 동맹을 맺으면 적어도 청나라에게 복수를 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니 말이다.
“후우, 곤란해.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 곤란해져. 나의 목표는 세 나라가 힘을 합쳐 대륙을 정복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이 중국의 동맹으로 빠져 버리면 목표를 이룰 수가 없어.”
“누르하치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중국을 정복한다? 이론이야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어렵겠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실제 역사에서도 북방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잖아?”
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유저들의 영향으로 실제 역사와 나름 비슷하게 시대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자세하게 따져 보면 전혀 달랐다.
유럽식으로 시대를 나눈다면 이미 중세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는데, 고대에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어야 할 중국이 단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던 것이나 유목 민족에 의해 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애초에 한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팽창을 거듭하는 것만 봐도 차이점은 명백하였다.
“아무튼 나는 청나라가 항복을 해 주지 않는다면 동맹은커녕 강화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회귀 전에 중국이 북방 국가에 의한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면 조금은 고민을 해 봤겠지만 중국이 약해진 적은 있어도 북방 국가에게 지배를 당하거나 약세를 띤 적은 없었다.
물론 회귀 전에는 만주를 통일한 누르하치나, 테무르 같은 인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에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누르하치.”
“뭐지? 테무르.”
“한국의 제안을 들어주는 게 어떤가?”
“설마 한국에게 투항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누르하치가 표정을 굳히며 사납게 말했지만 테무르의 얼굴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전쟁에서 잡았던 노예를 다시 돌려주고 군마 몇 필에 금은을 줘서 사죄의 마음을 표하면 될 것 같은데.”
“······.”
호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테무르의 발언권이 조금 더 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국력은 청나라가 조금 더 세지 않나? 몽골이 지원해 주고 있는 상태여서 그런 건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누르하치는 고민을 끝냈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거 참. 누구의 동맹인지 모르겠군.”
“말했잖아, 나는 한국과도 동맹을 맺을 거라고.”
“알았다. 몽골의 뜻이 그렇다면 나 역시 한국과 강화 협상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누르하치는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더니 호영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강화 협상에 응해 준다면 패배를 시인하겠습니다. 물론 보상금, 아니 배상금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배상금도 최대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이럴 거면 진즉에 항복하지 그랬나?”
“······아국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패배를 인정하고 보상을 제시해 준다면 나 역시 강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보상을 원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척이나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협정을 마무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일단 포로로 끌고 간 우리 백성들을 다시 돌려줬으면 좋겠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알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누가 말했던 것처럼, 국토의 절반이 초토화되어 식량이 부족해졌다. 양 20만 마리, 소 10만 마리, 말 10만 필, 그리고 약탈해 간 쌀 9만 섬을 배상해라.”
“쌀이야 그렇다 치고 양 20만 마리에 소 10만 마리라니요? 포로도 돌려주고 승전국이라는 명분까지 쥐여 주는데 지나치게 과한 요구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여기에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
누르하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호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북간도를 북조선 유민들에게 줘라. 이게 내 마지막 요구다.”
“뭐요? 지금 북간도를 내 달라고 했습니까?”
“정확히는 북조선 유민들에게 내 달라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어이가 없군요! 테무르! 나는 이렇게 해 가면서까지 동맹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청나라를 버리고 한국과 동맹을 하려거든, 여기에 남아라! 나는 여기서 떠날 테니까!”
테무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몸을 휙 돌린 누르하치.
그의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았다.
하지만 호영은 떠나려는 누르하치를 불러 세웠다.
“누르하치, 누가 보내 준다고 했지?”
“왜, 저를 억류시키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적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어처구니가 없군요. 제가 누군지 모르시는 겁니까? 저, 청나라의 황제입니다! 청나라의 황제!”
“그러니 더욱 억류시켜야지. 너만 잡는다면 전쟁을 단숨에 끝낼 수 있을 테니까.”
“하하하하!”
“뭐가 우습지?”
뜬금없이 대소하는 누르하치를 보며 호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호영이 고개를 돌려 테무르를 바라보니 그 역시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뭐가 우습냐고 물었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하니 우스울 수밖에!”
채앵!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무장들이 검을 빼 들거나 창을 치켜들며 누르하치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같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겁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왠지 둘 다인 것 같은데.’
호영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누르하치에게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히든카드가 말이다.
“하마드.”
테무르가 무심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테무르의 곁을 지키던 사내가 가슴을 펴며 당당히 앞에 섰다.
아까 전에 충구가 여포를 꼭 빼닮았다고 말했던 사내였는데, 그가 앞으로 나서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흉폭하고 거대한 기운이 좌중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고, 고수다!”
“설마! S랭크인가?”
언제나 텐션이 높은 타로, 슌지 형제가 가장 먼저 반응하였다.
당혹스러움을 넘어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가득한 모습을 하였는데, 다른 무장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S랭크.
세계적으로도 무공 수준이 높은 편에 속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조차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랭크가 바로 S랭크였다.
어쩌면 핵미사일 이상의 파괴력과 전쟁 억제력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는 게 S랭크였는데 바로 그 S랭크의 고수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군이 아닌 적으로서 말이다.
‘신체 조건이나 마력 수준이 준기에 비해 압도적이다. 준기는 아바타의 운이 좋지 않아 S랭크의 위용에 걸맞은 무위를 보여 주지 못했는데 저자는 아니야. 유저인지 NPC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지컬 또한 엄청나다.’
무장들만큼은 아니지만 호영의 표정 또한 눈에 띄게 굳어 갔다.
처음 본 순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그렇게 호영을 비롯하여 한국의 무장들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 테무르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이 무용한 싸움을 계속하자고 주장한다면 나 몽골의 대칸 테무르도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겠다!”
그 말에 김성근이 발끈하여 고함을 치려던 찰나, 호영이 말렸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몽골의 진면목을 파악하였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자, 대한의 칸이여, 결정을 내려라. 우리 몽골과 전면전을 치를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할지.”
분위기는 다시 역전되었다. 상황이 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작 한 명 때문에 타협을 해야 하는 건가.’
호영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놈의 재능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게 되었다.
자신이 S랭크만 되었더라면 테무르가 자신을 협박할 수 있는 상황이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씁쓸한 건 씁쓸한 거고 지금은 일단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처음 계획대로 중국을 동맹으로 만들어서라도 싸움을 계속할지, 아니면 이대로 타협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잠시 고민을 하던 호영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다른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면 북간도는 포기하겠다.”
“크하하하! 잘 선택했다! 역시 현명한 지배자였어, 대한의 칸은!”
호영의 결정은 북간도를 포기하고 평화를 얻는 것이다.
이는 즉, 북조선 용병 부대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대신!”
“음?”
“우리와 동맹을 하고 싶다면 만주를 내줘라!”
갑작스러운 호영의 요구에 테무르는 눈을 크게 떴고 누르하치는 분노를 토해 냈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만주를 달라니, 만주는 우리 청나라의 강역이오!”
“그러니까 우리와의 동맹을 원하면 달라는 거다. 내가 중국의 땅을 가져 봤자 의미가 없으니 말이야.”
테무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 대한도 결국 우리의 뜻에 동참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만주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테무르의 말에 누르하치는 곧장 반대를 표출하였다.
“테무르! 만주는 청나라의 영토다!”
“누르하치, 만주보다는 중국의 땅이 낫지 않나?”
“하나······!”
“초원에서 했던 맹세를 기억한다면! 만주에 미련을 두지 마라. 우리가 지배해야 할 곳은 초원이 아닌 대륙이다.”
“······.”
두 사람의 대화에 호영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만약 전쟁을 계속하였다면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왔겠군. 하마드라는 S랭크의 무인이 지휘하는 대군이 말이야.’
몽골이 그렇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면 중국과의 동맹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한반도는 초토화되거나 완전히 빼앗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았다. 테무르! 너의 말대로 만주를 내주고 한국을 얻겠다!”
“하하! 현명한 선택이야!”
테무르는 한차례 대소를 짓고는 호영에게 말했다.
“중국의 땅을 점령하는 대로, 만주를 내주겠다. 그럼 이제 한국도 중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확실하겠지?”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호영은 그런 테무르의 눈빛을 느끼며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만주의 가치만큼 활약해 주겠다.”
“좋아, 좋아! 하하하하! 이로써 삼국 동맹이 완성되었다! 우리 셋이 뭉친 이상 중국을 지배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야!”
테무르가 크게 웃자 누르하치 역시 대소를 지었다.
호영만 유일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