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하! 웃기는 놈들이네. 우리 군이 무슨 신사들만 모인 군대인 줄 아나? 전하! 방심하고 있는 두 놈을 이참에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보훈이 코웃음을 치며 그리 말하자 김성근이 발끈하였다.
“사신인데 죽이긴 뭘 죽여! 우리 군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이냐?”
“명예는 무슨, 명예입니까? 이기는 게 중요하지.”
“그딴 개짓거리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겨.”
“쳇. 어울리지 않게 정정당당한 전쟁을 치르겠다는 겁니까, 얼굴은 산적처럼 생겼으면서?”
“뭐 인마?”
호영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다툼을 중단시키고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누르하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주성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봤을 때는 꽤나 초조한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이자가 정말 테무르인가?’
누르하치를 확인한 호영은 고개를 돌려 누르하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타로가 말했던 대로 ‘돼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비대한 사내였다.
“무슨 동탁과 여포를 보는 것 같군요.”
충구도 마침 테무르로 짐작되는 사내를 보고 있었는지 그와 같은 말을 하였다.
‘동탁과 여포라······. 확실히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이는군. 물론 실제 여포의 외모는 저렇게 서구적으로 생기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테무르와 테무르의 곁에 서 있는 미남자는 삼국지 게임이나 만화 등에서 표현되는 두 사람의 외모를 빼닮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삼국지의 동탁과 여포를 말이다.
“무력도 여포급인 것 같군.”
“예?”
“엄청난 고수라는 말이다, 어쩌면 나를 능가할 수도 있는.”
“······!”
호영의 말에 충구가 당황하는 사이, 누르하치가 호영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놀래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쳐 주지. 너의 그 어처구니없는 만용에 놀란 것은 사실이니까.”
“하하하!”
누르하치는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는 옆에 있는 동탁, 아니 테무르로 생각되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의 만용보다, 이쪽에 계시는 몽골의 대칸을 보고 더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몽골 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대한 제국은 청나라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몽골까지 동맹에 가담했으니 앞으로 더욱 버거워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항복이라도 하라는 건가?”
“정확히는 화평을 제안하는 겁니다. 평주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의 일은 아직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나라 측에서 선제공격을 해 놓고 어떠한 사과도 없이 화평을 요구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불쾌한 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몽골이 끼어든 바람에 지금은 그때보다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어 대뜸 화를 내지는 못할 뿐이었다.
“이번에도 우리에게 어떠한 보상을 제시해 주지 않을 생각인가?”
“저희는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평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화평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하면 청나라가 잡아간 제국의 백성들은? 그들도 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포로는 돌려주겠습니다. 또한 최근에 잡은 노예들도 최대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 잡은 노예는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청나라에 완전히 정착한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런 식의 제안이라면 나는 들어줄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나와 제국에 어떤 이득도 없으니까.”
“······무언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은 이득을 고려하실 때가 아닙니다. 불쾌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금 대한 제국은 항복을 고려해야 할 때입니다. 저희가 관대하여 그나마 동등하게 협정하는 것임을 알아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너야말로 착각하고 있군. 겨우 10만의 지원군이 추가되었다고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판단하다니 말이야. 너희가 10만의 지원군을 추가시켰다면 나 역시 10만의 지원군을 추가시키면 그만이다. 일본에는 여전히 여력이 남아 있음을 잊지 말도록.”
누르하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호영의 반응에 노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은 휴전을 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양국의 국력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상황이었다. 실리를 추구하는 군주라면 허리를 굽혀서라도 평화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지켜본 호영이란 남자는 자존심이나 명예, 위신보다는 국가의 이익과 효율, 실리 따위를 추구하는 남자였다.
평화협정을 거부할 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5회 차를 버리더라도 나는 내 위신을 지켜야 한다.’
누르하치의 판단대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쯤 해서 정전 협상을 맺는 게 정상이었다.
아직 제나라에게는 사신조차 보내지 않은 데다 몽골의 참전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하락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양자일택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둘 중 하나를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포기한 것은 다름 아닌, 5회 차였다.
즉, 5회 차에 세력을 확장시킬 기회나, 국가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포기하고 국가와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그 같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아닌, 수백 년 뒤의 미래를 위해 이 같은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당장의 작은 실리를 얻겠다고 청나라의 제안을 들어준다면 머나먼 미래의 역사에 대한 제국이 청나라에게 굴복했다고 기록될지도 모르는 일.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기록이지만, 대한 제국이 동북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면 사소한 오점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누르하치의 제안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실례 아닌가? 귀환 손님이 왔는데 이렇게 대접을 소홀히 하다니 말이야. 아니면 이 나라는 손님을 대하는 예법이 다르기라도 한 것인가?”
갑자기 끼어드는, 동탁을 닮은 사내를 보며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초면부터 반말을 하는 그 오만한 태도를 보고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낀 것이다.
“한국어를 잘하는군. 몽골 사람 아니었던가?”
“4회 차까지만 해도 대세는 한국이었지 않나? 그래서 배웠지. 어차피 외국어쯤이야 한두 달이면 배우니까.”
외국어를 한두 달이면 배운다니.
‘생긴 것만 보면 자기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아무튼 누르하치도 그렇고 몽골의 테무르도 그렇고 나라를 통치하는 유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호영이 역사를 많이 바꾸기는 한 것 같았다.
원래였다면 대한 제국, 아니 한반도의 소왕국들은 국제 정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보다 나를 여기에 세워 두고 시시한 다툼이나 하고 있던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제삼자인 내가 생각해도 두 나라는 휴전을 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
“제삼자인 것을 안다면 끼어들지 마라. 휴전을 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니까.”
“오호, 단호한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하구나. 이게 군주의 위엄이란 것인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뜬금없이 군주의 위엄을 들먹이는 테무르를 보며 호영은 눈썹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테무르는 영문 모를 웃음을 짓고는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제삼자라고 했는데, 내가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제삼자가 아니지. 우리는 이미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어. 한마디로 어제까지는 제삼자였을지 몰라도 오늘부터는 아니란 뜻이야.”
“설령 그렇다 해도 나의 선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마라. 청나라의 동맹이라면 결국 적대국일 뿐이니, 우리를 중재할 수는 없다.”
무슨 자신감으로 양국의 사이를 중재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호영의 입장에서는 몽골 역시 적대국일 뿐이었다.
그리고 싸우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적의 말을 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왜 나를 적으로 생각하지? 청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그런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몽골이 청나라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 냈을 거다.”
호영의 그 말에 누르하치가 성을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몽골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도 청나라는 끝까지 항전하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멸망했을 거다. 우리의 북진을 막아 내지 못했을 거니까.”
“북진이라고요? 과연 대한 제국에 그럴 만한 여력이 있습니까? 국토의 절반 이상이 초토화되어 군량미도 간당간당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제국이 자부하는 화기 부대도 화약과 철탄이 부족해서 무용해지지 않았습니까?”
빈정거리는 누르하치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호영이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은 군사 수는 충분할지 몰라도 식량이나 화약 같은 물자들은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세 나라의 정상끼리 모인 자리에서 유치하게 왜들 그러나? 이미 끝난 일 가지고 말이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테무르의 말에 호영은 더욱 짜증이 났다.
하지만 테무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흥분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 주기로 하였다.
“한국이 뭐 때문에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방금 말했던 것처럼 이미 끝난 일이잖아?”
“끝난 일이니 과거는 잊고 새 출발을 시작하자는 건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쉽게 말을 하는군. 강화를 바란다면 사과를 하고 우리가 입은 피해에 걸맞은 보상을 제시해라. 사과와 보상 없이는 어떠한 협상도 없을 것이니.”
“청나라가 진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너무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도 곤란할 텐데······. 우리 몽골이 청나라를 적극 도울 수도 있다고. 지금처럼 5만 정도의 지원군을 찔끔찔끔 보내는 게 아니라, 전군을 보낼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 보든지.”
“무슨 자신감이지? 한국 혼자서 몽골과 청나라의 연합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우리에게는 여력이 있으니. 그리고 우리가 언제 혼자라고 했지?”
“호오, 혼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한국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나라는 얼마 없을 텐데? 정확히는 중국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그 중국이랑 동맹을 맺을 생각이다. 몽골과 청나라의 연합은 그들에게도 위협이 될 것이니 말이야.”
호영의 그 같은 발언에 테무르와 누르하치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외교적 선택이었지만 북방 국가인 몽골과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꽤나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제나라와 순나라, 양나라 등 대륙의 국가들이 중화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어찌 대하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그 오만한 중국 놈들과 동맹이라고?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놈들의 시각으로 한국은 오랑캐와 다를 게 없어. 동맹을 한다고 해도 절대 동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