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누르하치는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퇴각한다.”
“예?”
“고수의 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니 이길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제장들은 지금 바로 퇴각 명령을 내려라.”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군대의 규모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비대해졌다지만, 여전히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소수의 절대 고수였다.
동부 전선에서 청나라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한국군을 밀어붙이기는커녕 오히려 밀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절대 고수들 때문이었는데, 그들이 서부 전선으로 넘어온 이상 전투의 승패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완패.
이 전투는 질 수밖에 없는 전투였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리핀에서 뛰어내린 한국의 고수들을 본 순간, 장수들에게 퇴각하라고.
* * *
평양 인근에서의 대회전은 한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평양에서 한국군이 승리를 거두자, 서부 전선에 넓게 퍼져 있던 십수만의 청나라 군대는 패잔병 신세가 되어 압록강 근처까지 쫓겨나고 말았다.
본대라고 할 수 있는 누르하치의 직속 군대가 패배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동부 전선은 어떻게 되었지?”
“적절한 시점에 지원군이 충원되어 전세는 여전히 아군이 압도하는 형태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호영의 물음에 충구가 특유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답변하였다.
그러자 호영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A급 이상의 고수들이 충원되어 서부 전선이 많이 유리하게 바뀌었지만 반대로 동부 전선의 경우는 한국군의 전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적으면 기천, 많으면 1만의 적병을 책임지던 A급 고수들이 대거 빠졌으니 전력의 약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준기 혼자서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구의 활약 덕분에 동부 전선은 여전히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활약이란 다름 아닌, 지원군을 새롭게 불러들인 일을 말하였다.
다 합해서 10만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지원군이 동부 전선으로 충원되었는데, 충구는 이 지원군을 일본에서 불러들였다.
일본 해방 전선을 해제시킴으로써 더 많은 지원군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휘하에 모략가와 책략가가 많아져서 그런지 이전보다 권모술수에 능해졌군. 무력이 아닌 돈과 모략으로 일본 해방 전선을 해제시키다니 말이야.’
원래도 충구의 능력은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모범적인 전략이나 책략, 작전 등에만 능했다면 이제는 기상천외한 묘책도 곧잘 사용하는 능력자가 된 것이다.
호영은 다시금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동부 전선이 안전하다면 더 미룰 필요도 없겠군. 바로 공격 명령을 내리면 되겠어.”
현재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뒤에 둔 채 배수의 진을 친 상태였다.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결사 항전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동부 전선도 안정적인 데다 전력에서도 압도하는 상황.
한국군이 총공격에 나선다면 누르하치도 결국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 제국에 이만한 피해를 입혔으면 합당한 보상을 해 줘야 했다.
땅이 됐건 아니면 주권이 됐건 말이다.
만약에 보상해 주지 않는다면 청나라군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청나라 사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돌려보내. 이 상황에서 평화협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화평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온 청나라 사신을 쫓아 보낸 호영은 곧바로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다 왔군.”
“흐흐, 전하께서 소장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소장이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경이 총공격을 생각했다면, 맞다.”
“크하하하! 드디어, 저 누르하치 놈을 죽이는 것입니까?”
“죽이는 게 최선이다. 그게 힘들다면 청나라군만 전멸시켜도 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장이 누르하치를 잡겠습니다!”
김성근의 말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동부 전선에서도 선봉을 곧잘 맡으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그가 세운 군공만 따져도 일등 공신으로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터.
그런데도 공을 더 세우기 위해 악을 썼다.
공명심보다는 전쟁 그 자체를 즐기는 까닭이었다.
호영으로선 변치 않은 그의 모습이 새삼 좋게 느껴졌다.
“누르하치는 소장이 처리하겠습니다! 선봉은 소장에게 맡겨 주십시오!”
“솔직히 선봉은 소장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저 황보훈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언제나처럼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호전적인 장수가 김성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부 전선에서 넘어온 장수들과 서부 전선에서 호영과 함께 싸웠던 황보훈, 타로 등이 목소리를 높이며 선봉을 자원했다.
선봉이란 그만큼 얻는 게 많은 자리이니 장수들로선 탐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의 선봉은 무휼 군단장이다.”
하지만 호영은 목소리를 높이는 장수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뒤편에 우직하게 서 있는 무휼을 지목하였다.
“엥?”
“하오나 전하, 그는!”
그러자 장수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무휼은 유저가 아닌 NPC이기 때문이다.
“문제 될 게 있나? 무휼 군단장은 누구와 비교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용맹과 무력을 가졌는데?”
“······.”
“착각하지 말도록. 나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기회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다. 친하다는 이유로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무휼 군단장이 선봉을 서는 것에 반대하는 이가 또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봉은 무휼 군단장이다.”
언제나 그랬듯 호영은 NPC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능력이 출중하고 충성심도 확실하다면 최대한 NPC에게도 기회가 돌아가게끔 배려해 주는 편이었다.
그의 포용력이 남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유저들이 극소수인데도 엄청난 저력을 보여 주었다. 만약 유저의 힘까지 더해졌다면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우리 대한 제국도 NPC를 포용해야만 한다. NPC를 포용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도태되고 말 것이니까.’
청나라를 이긴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가 대적할 적은 인구만 수억에 달하는 중국이었다.
심지어 중국은 유저의 수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였다.
유저도, NPC도 많은 중국은 당연히 인재의 수도 천문학적일 수밖에 없을 터.
호영으로선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서부 전선에서 유저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NPC들을 중용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종족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반쯤 실패하고 말았지만 NPC만큼은 어떻게든 얻으려고 그 나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 * *
“끝까지 항전할 생각인가?”
“겨우 이 정도로 제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호영의 무심한 물음에 누르하치가 날 선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언제나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누르하치지만 거듭된 패전으로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원래였으면 웃고 넘어갈 질문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누르하치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분명 패배가 확정된 전쟁임에도 끝까지 항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오기인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워낙 특이한 성격이다 보니 호영은 누르하치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호영은 누르하치의 대답에 그저 혀를 차며 보법을 전개하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니 누르하치의 목숨을 노리려는 의도였다.
“전하! 소장이 누르하치를 끝장내겠습니다!”
때마림 김성근이 거대한 도를 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정당당이고 뭐고, 누르하치를 죽이고 볼 생각인 것 같았다.
호영도 그런 김성근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기는커녕 쾌재를 불렀다.
그 역시 누르하치와 일대일 대결을 한답시고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죽일 수 있을 때 무조건 죽이리라.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해 줄 것 같습니까?”
하지만 누르하치도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누르하치는 두 사람이 합격하는 낌새를 간파하기 무섭게 뒤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는 청나라 최고 정예군인 팔기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팔기군을 제물 삼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김성근! 뚫어라. 놈을 잡아야 한다.”
“맡겨만 주십시오!”
청나라의 정예고 뭐고,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팔기군이 대단한 정예군인 것은 사실이지만 초절정 이상의 무위를 지닌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사수해라! 커헉.”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여기서 물러나면 황제 폐하께서 위험하다!”
예상했던 대로 팔기군은 두 사람의 압도적인 무위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였다.
두 사람 정도의 고수 앞에서는 제아무리 정예군이라 해도 그저 나약한 병졸일 뿐이었다.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고수들이 중간중간에 끼어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지 시간을 조금 더 끌었을 뿐이다.
그렇게 수백으로도 1만 이상의 정규군도 상대할 수 있다는 팔기군이 무기력하게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무용하지만은 않았다.
“전하, 아무래도 놓친 것 같습니다.”
“쯧.”
누르하치가 결국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물러난다.”
“여기서 물러나자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전투를 끝낼 수 있는 기회인데.”
“너무 깊숙이 들어왔어. 다 이긴 전쟁에서 괜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쩝, 전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군으로 되돌아갔다.
누르하치를 놓친 것이 너무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애초에 청나라의 황제인 누르하치를 그리 쉽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팔기군의 전력을 최대한 줄여 놨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그날 이후로도 비슷한 전투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
당연히 모든 대회전은 한국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심지어 기병 간의 격돌도 이제는 한국군이 우위를 점칠 정도였다.
청나라군은 이제 기병 전력조차 한국군에게 밀릴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한국군이 압도하는 상황인데도 청나라군은 불굴의 의지로 결사 항전을 하였다.
이쯤 되니 호영도 누르하치에게 따로 믿는 구석이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호영이 본 누르하치는 자존심이 센 편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이 이전에 말했던 대로 몽골과 동맹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예, 소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누르하치가 저렇게까지 저항을 하는 이유는 그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전쟁이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