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강화 협상
평양까지 물러난 뒤에 다시 결전을 준비하려던 누르하치였지만 달려서 하루 이틀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이동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뒤에서 악착같이 쫓아오는 한국군도 한국군이지만,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는 매병 부대의 게릴라전이 더 큰 문제였다.
현재 청나라군은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대한 제국의 도로 또한 잘 닦여 있었지만 10만이 넘는 군대가 한꺼번에 행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많으면 3만, 적으면 5천 단위로 분산해서 행군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5천 단위의 소규모 부대들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의병 부대의 매복 공격에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사흘 사이에 입은 피해만 무려 3만.
평주성에서 입었던 피해까지 고려한다면 짧은 시간에 5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군부는 이 예기치 못한 피해에 기절초풍하듯 당황하였고 누르하치 역시 그답지 않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곳에 도착했으니 곧장 덤벼들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예비 병력이 어느 정도 충원되었지만 저쪽은 아직 병력이 그대로니까 말이야.”
그래도 평양에 도착하자 다시 평정심을 회복한 누르하치였다.
비록 불리하기 그지없는 전황이지만 시간을 끄는 소모전 양식으로 전투에 임한다면 몇 달 버티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 달만 버티면 누르하치가 준비한 히든 무기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히든 무기만 도착한다면 또다시 전황이 역전될 터.
하지만 누르하치가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그가 상대하는 유저, 호영은 시간을 끄는 소모전을 싫어하고 단기 결전을 선호하는 인물이란 점이었다.
“적이 공격을 시도할 것 같다고?”
“방첩부대의 보고대로라면 오늘 안에 공격을 시도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허, 아무리 이곳이 수비하기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라 해도 병력의 차이가 5만에 가까운데 공격을 시도한다니. 상대가 상대라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로군.”
한국군의 병력은 게릴라전을 펼치던 의병 부대를 수습한다 해도 고작해야 8만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에 반해 누르하치가 거느린 병력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비 병력과 주변의 성에서 급히 퇴각하던 병력을 합쳤기에 무려 13만이나 되었다.
‘내일이 되면 신은성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도착할 텐데, 왜 굳이 오늘 공격을 시도하는 거지?’
물론 한국군이 충원되는 만큼 청나라군 역시 병력이 충원될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득이 되는 것은 한국 쪽이었다.
지금의 병력 비율은 청나라군이 압도적이지만 모든 예비 병력이 충원되었을 때는 병력 비율이 거의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아닌가?”
“남방군이나 동부 전선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다륭아 장군께서 커다란 새를 목격하였다는, 다소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 외에는 말입니다.”
비록 모든 전선에서 밀려나고 있는 청나라군이지만 정보력은 여전히 공고하였다.
유저들이 현실에서 정보를 전하는 까닭에 정보 조직이 발각될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물론 북조선 용병 부대의 배신을 파악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 정보력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커다란 새라? 설마 그리핀인가?”
“그리핀은 전쟁 전에 이미 모두 죽였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겠군. 일단 지금 당장은 전투 준비부터 해야겠어. 커다란 새야 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누르하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지휘관 회의를 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전투를 준비하고서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와서는 누르하치한테 보고하였다.
“적군이 1시간 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병력 수는?”
“일전에 보고했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대략 8만 정도로 추측됩니다.”
“8만이라······.”
턱을 쓱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대접을 해 주러 가자.”
전쟁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곧 있으면 벌어질 회전만큼은 청나라 측이 유리하였다. 적군이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변수가 될 만한 요소는 없다.’
누르하치는 적군이 방심을 했거나 아군의 전력을 오판하여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아아!”
1시간이 지나자 예정했던 대로 한국군이 쳐들어왔다.
엄청난 대군이었는데 달려드는 기세가 아주 대단하였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땅에 한국군으로 가득 차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쾅!
그러나 청나라군도 한국군의 진격을 마냥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활을 쏘고 대포를 날리며 한국군의 진격을 방해하였다.
비록 수비하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라지만 전투는 자리를 선점한 쪽이 유리한 법이었다.
대포가 존재하는 화약의 시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군은 거리를 좁히기도 전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타타탕!
하지만 한국군이 자리를 잡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한국군의 화력이 청나라군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휘휘휘휙!
“역풍이다!”
“아니, 이건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야! 마법이다! 마법사를 찾아라!”
화력만 압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군은 마법사까지 동원하여 전장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바람 마법을 쓰자 청나라 측에서 쏘아 보낸 화살이 땅으로 처박혔고, 불 마법을 쓰자 포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서 폭발이 발생하였다.
‘마법이 이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고? NPC 마법사와 유저 마법사의 차이인가? 전쟁 초기에 마주했던 마법사들은 한낱 표적에 지나지 않았는데.’
누르하치는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고지 위에 올라선 채, 조금씩 구멍이 나기 시작하는 청나라군의 대오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적군의 공격이 막강했다.
조총과 함께 간간이 날아오는 마법 공격은 청나라군으로 하여금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어진 마법 공격에 최소 3천 이상이 전사한 것 같았다.
‘이게 숨겨진 한수인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준비한 게 이것뿐이라면 이번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그가 무시했던 마법사가 예상치 못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지만 승기는 변함없이 청나라 측에 있었다.
숫자와 지형 모두가 청나라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기병들은 모두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
한국군이 쏘아 대는 조총 때문에 전장의 일부가 흑색 연기로 뒤덮이자 누르하치는 기병들로 하여금 돌격 명령을 내렸다.
총병의 수도 적고 마법사도 보유하지 못한 청나라로선 화력전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기병을 보내 백병전을 유도하였다.
다그닥, 다그닥!
기병들이 전장에 진입하니, 한국군 측에서도 기병을 보내 견제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기병의 수는 청나라 측이 압도적이었다.
결국 몇 번의 격돌 끝에 한국군 기병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적의 기병이 물러나자 청나라 기병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장을 누비기 시작하였다.
난전을 벌이느라 측면이 약화된 부대에는 어김없이 청나라 기병이 찾아갔다. 측면을 허용한 보병 부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멸하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서너 부대가 전멸하였고, 한국군의 우익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
“보아하니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인 것 같은데요?”
“흥! 무식한 놈들! 끝까지 와 보라고 해! 어차피 이기는 것은 우리일 수밖에 없어!”
두 친왕, 즉 수르하치와 무르하치의 대화처럼 전장의 흐름은 완전히 청나라 측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한국군은 여전히 기세 좋게 달려들고 있었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사상자만 최소 수천일 정도였다.
‘저 정도로 피해를 봤다면 이제 곧 물러날 수밖에 없겠군. 아마 해가 지기 전에 물러나겠지? 내일은 우리가 역습을 시도해도 괜찮겠어.’
누르하치는 승리를 확신하였다.
비록 예상치 못한 마법사의 등장으로 청나라 측의 피해도 작지 않다지만 어쨌든 승리는 승리였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기병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니 한국군이 퇴각할 때 엄청난 피해를 강요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혀, 형님!”
그때였다.
갑자기 무르하치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뭔 일이야!”
“저기를 보십시오!”
누르하치와 수르하치가 고개를 돌려 무르하치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새 아니야?”
“저렇게 큰 새가 있다고?”
장수들이 눈을 끔벅거리며 의아한 반응을 내비칠 때 누르하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장의 수는 따로 있었군. 그리핀이라······. 살아남은 그리핀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야.’
그리핀!
미국에서 건너온 이 공중형 마물은 10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하였다.
사자 몸체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진 이 마물이 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바로 전쟁에서였다.
엄청난 항속거리와 이동속도를 가진 그리핀은 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전쟁의 판도를 몇 번이나 바꿔 버릴 정도였다.
물론 열기구도 처음 등장하였을 때, 전투에 큰 파란을 일으키기는 하였다.
하지만 열기구는 어디까지나 전장에서만 영향을 끼쳤을 뿐, 전쟁 그 자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열기구는 하늘을 난다는 장점만 있을 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나 속도는 터무니없이 짧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핀의 경우는 전장을 넘어 전투가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내지에 있던 초고수를 일본으로 반나절도 안 되어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그리핀도 청나라와 대한 제국의 전쟁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어쩔 수 없는 게, 그리핀들은 대한 제국의 관리 소홀로 청나라군에게 거의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그리핀이라곤 제주도와 북해도에 있는 암컷 한두 마리뿐.
수컷도 아니고, 한두 마리의 암컷들로는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한 누르하치는 그리핀의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동부 전선의 무인들을 데려온 것인가? 이거 아무래도 내가 너무 방심한 모양이야.’
그리핀을 간과했던 그의 실책은 무척이나 뼈아팠다.
“사, 사람이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검기를 보니 최소 A급은 되는 것 같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날아온 대한 제국의 초고수들.
그들은 그리핀에서 뛰어내리기 무섭게 전장을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한 명 한 명이 청나라에 몇 없는 A랭크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동부 전선을 지탱하던 한국의 고수들답게 엄청난 실력이군. 확실히 다륭아 장군만으로는 상대하기 벅찼을 수밖에 없었겠어.’
청나라의 명장, 다륭아가 고전을 했던 이유가 바로 저들 때문이었다.
병력의 수와 사기는 분명 청나라 측이 압도적인데도 소수의 무인들 때문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리고 그 무인들은 지금, 누르하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등장하자마자 전장의 흐름을 뒤집어 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적군의 총사령관이 나섰습니다!”
“폐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