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대한 제국의 A급 무인은 NPC와 로열패밀리 그리고 일본 유저들까지 다 합쳐서 스무 명이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S랭크 무인은 준기 하나뿐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고수들이 전부 전장에 나가 있는데도 전쟁은 지지부진하기 그지없었다.
청나라군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청나라의 고수가 새로 충원된다면?
그것도 호영을 위협할 수 있는, 준기 정도의 실력을 가진 고수가 충원된다면 어떻게 될까?
호영이 생각하기에 그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면 차라리 이곳에서 산화하는 게 대한 제국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무휼, 황보훈.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예에.”
결정을 내린 호영은 곧바로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는 누르하치에게 다가갔다.
“혹시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충.”
황보훈에게 경고한 호영은 누르하치에게 물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저 기억하십니까?”
누르하치의 말투가 변했다. 왠지 모르게 공손해진 말투였는데,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지?”
“다이샨. 제가 바로 다이샨입니다. 100년 전에 일본에서 용병대장으로 활약했던 그 다이샨 말입니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호영이 놀라는 모습을 기대하였던 듯싶지만, 호영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실제로 그는 누르하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전략 분석 팀에서 누르하치에 대해 조사할 때 유저라는 사실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4회 차의 다이샨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한 것이다.
뭐, 그래 봤자 현실에서 무슨 직업을 가졌고 어디에 사는지 같은 것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당신의 팬이거든요.”
“팬이라······.”
호영은 쓰게 웃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팬이라면 침략하지도 말아야지.”
“저는 당신의 팬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전자이기도 합니다.”
“도전자?”
“저 역시 당신처럼 정복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싶거든요. 그리고 정복자로서 이름을 떨치려면 당신을 꺾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차라리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또는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침략했다면 모를까. 자신의 명성을 위해 침략을 했다니.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왜 내가 제국에 없을 때 침략했지?”
“당신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 비겁하지만 당신이 세운 제국을 이기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습니다.”
“······나에게 하려는 말은 그뿐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그는 더 이상 누르하치와 대화를 이어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누르하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영에게 중요한 것은 누르하치가 자신의 적이라는 사실뿐.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습니다.”
“뭐지?”
“이제 그만 종전합시다.”
“······그 말은 항복하겠다는 건가?”
“항복이 아니라, 대등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자는 겁니다.”
순간 호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르하치의 말을 듣고 분노를 느낀 것이다.
“가만히 있는 대한 제국을 공격해 놓고,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전을 하자고? 청나라였으면 이런 제안을 들어 줬을까?”
“전쟁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손해인 것을 모르십니까? 아마 지금 가장 기뻐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일 것입니다. 안 그래도 우리를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알아서 자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왜 중국인들이 기뻐할 만한 짓을 벌인 거지? 다 네가 자초한 일이지 않은가?”
“과거 이야기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한국의 정복왕이시여,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십시오. 우리가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득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자신을 속 좁은 사람처럼 만드는 누르하치의 말이 거슬리게만 느껴졌다.
“들어 줄 가치도 없는 이야기군. 만약 종전을 원한다면 항복을 하고 마땅한 보상을 지급해라. 그렇지 않으면 협정은 절대 없을 거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신도 아국의 저력을 인정하고 있을 텐데, 굳이 싸움을 이어 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나는 이미 답을 내렸다. 항복을 하지 않으면 협정은 없을 거라고.”
“······그럼, 동맹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서 중국으로 진출하는 겁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끝까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누르하치였다.
“적국과 동맹이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서로에게 이익만 된다면 못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면 중국 전부를 지배하는 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대한 제국과 청나라가 동맹을 맺는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력만 거의 100만에 가까워질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호영은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만약 중국을 차지하면 땅은 어떻게 나눌 생각이지?”
“당연히 절반으로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반을 어떻게 나누자는 거냐?”
“······.”
“청나라야 육지로 이어져 있으니 중국의 땅을 관리하기 쉽겠지. 하지만 우리는? 만주의 일부를 주기라도 할 생각인가?”
“대한 제국은 해군이 강하니 중국의 강남 지역을 지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다 건너의 일본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지정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도 우리보다 최소 5배는 많은 중국의 강남을 어찌 관리하라는 거지? 한 1, 2년 지배하고 말라는 건가?”
누르하치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결국 호영과 손잡아서 중국으로 진출하겠다는 말도 진심이 아니거나,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한 것 같군. 나중에 또다시 화평을 제안하려거든, 백기를 들고 찾아오도록.”
호영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평주성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다.
“후우, 좋습니다. 솔직히 당신과 끝까지 붙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작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거, 한번 해봅시다.”
뒤에서 들려오는 누르하치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 놈.’
그가 생각하기에 누르하치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였다. 뭐, 본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제정신인 사람은 애초에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의외의 협상
다음 날이 되기 무섭게 누르하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콰쾅!
3만에 달하는 오크 보병과 북조선 용병들이 공성전에 나섰는데 대포와 투석기 등 온갖 공성 병기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다행히 평주성은 단단하기 그지없는 철옹성이었고, 강선도 파여 있지 않은 구식 전장포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포의 위력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을 뿐, 적군의 공세는 무척이나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호영이 지키는 북문과 무휼이 지키는 동문을 제외하면 전부 두 번 이상씩 위기를 겪어야 했다.
만약 기병을 이끄는 황보훈이 적기에 구원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미 둘 중 하나는 함락되고 말았으리라.
그만큼 청나라군의 공세는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미친 듯이 공격하는군요. 솔직히 포위만 하고서 우리가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아니면 후방을 공략하든가.”
호영도 적장이 누르하치가 아니었다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한 제국의 군사력은 호영이 가담하기 이전에는 별거 아니었지만, 호영이 가담한 이후로는 무시 못 할 수준이 되었다.
한마디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청나라조차 이제는 대한 제국을 멸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호영을 상대로 공성전에서 이기는 것은 더욱더 그럴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직접 전장에 온 것은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터.
실제로 청나라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쉴 새 없이 맹공격을 퍼부었다. 전쟁 초기 때처럼 단기전을 노리는 것 같았다.
“둘 중 하나겠지. 오크 보병이나 북조선 용병이 죽는 것을 신경 쓰지 않거나, 아니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승부를 낼 생각이거나.”
어찌 되었건 호영으로선 온 힘을 다해 막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래라면 2군단의 기병 부대가 도착하는 순간 성을 박차고 나가 회전을 시도했겠지만 적의 병력은 무려 10만이었다.
그중에 기병이 4만이나 되었고 말이다.
전력 차이가 이렇게 큰 상황에서 회전을 시도했다간 제아무리 호영이라 해도 평주성을 내주고 말 것이다.
‘만약 내가 S랭크가 됐다면 또 모르겠지만.’
호영이 S랭크의 무인이었다면 4회 차까지 자주 써먹었던, 혼자서 무쌍 찍기도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여전히 A+랭크의 무인이었고 5회 차에서는 혼자서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가 정체하는 동안 다른 이들의 실력이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번에 승부를 보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누르하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충구의 말에 호영은 상념을 깨우고 시선을 정면에다 두었다.
청나라군의 깃발이 요란스럽게 휘날리며 후미에 있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크 보병 부대나 북조선 용병 부대가 아닌, 누르하치의 직속 군대, 팔기군이었다.
“청군의 수괴가 오고 있다!”
“사격을 준비해라!”
대포알이나 돌덩이가 날아올 때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북문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팔기군과 누르하치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 하나로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호영은 누르하치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수비병들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파공음에 창을 들어 올렸다.
챙!
그를 노리고 날아오던 무언가가 창에 맞고 튕겨 나갔다.
무언가는 다름 아닌 화살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노리고 화살을 쏜 것이다.
‘누르하치.’
소총으로도 맞히기 힘들 것 같은 거리에서 정확하게 그를 저격한 사람은 바로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가 타커시안이라는, 마법이 담겨 있는 활로 그를 저격한 것이다.
호영이 고개를 돌려 누르하치를 바라보니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인사라도 건넨 것 같은 천진한 얼굴이었다.
누르하치의 웃는 얼굴을 본 호영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도발이야 전쟁에서 수도 없이 겪어 봤다.
흥분하면 오히려 그만 손해인 것을 알았기에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우어어어어어!”
마침 적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정예 팔기군까지 동원한 총공격이었다.
“경은 뒤에서 예비 병력을 지휘하도록.”
“예, 전하. 대신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무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알았다.”
그렇게 충구를 뒤편으로 보낸 호영은 자신의 창을 들고 적을 맞이하였다.
처음 성 위로 올라온 적군은 오크였다.
“취이익!”
화살이 다섯 발에 조총을 맞은 흔적까지 있는 오크였지만 여전히 힘이 넘치는 듯, 사방에서 찔러 대는 의병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터무니없는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