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62화 (262/345)

# 262

그것은 바로 땅이었다.

아직 한강 이북은 되찾지 못했지만 한강 이남 그러니까, 경기도와 충청도를 되찾았고 강원도 역시 절반 가까이를 되찾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대혼 전하 만세! 대혼 전하 만세!”

그리고 전선이 유리하게 바뀌고 잃었던 땅을 조금씩 수복해나갈 때, 호영이 비로소 내지에 도착하였다.

무려 3만에 달하는 1군단과 친위 군단의 병력을 대동하고 부산진에 상륙한 것이다.

“환영 인파를 준비해 놨었나?”

“소신은 환영 인파를 준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인파는 모두 자발적으로 나왔다는 말인가?”

“민심이 전하를 따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로열패밀리를 총동원하여 여론을 선동하였는데 민심이 따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기, 중앙정부의 장차관들이 보입니다.”

그때 호영의 부관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부관이 가리킨 곳에는 일단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마치 일본 귀족들을 보는 것처럼 행색이 요란하였다.

저들이 바로 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는 장차관들이었다.

“황자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국을 구원하러 오시다니, 전하의 애국심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장차관들의 인사에 호영은 고개를 숙였다.

“환영해 주어 감사합니다.”

그답지 않은 공손한 태도였다.

하지만 아직 황태자도 되지 못한 일개 황자의 신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호영이 장차관들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형식상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지만,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는 여전하였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봐야 되겠죠?”

“허허, 그것이······.”

“뭐, 상관없습니다. 적아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이왕이면 끝까지 적 행세를 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중간에 배신한다면 부왕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호영의 노골적인 발언에 장차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까지 로열패밀리가 퍼뜨린 소문의 영향으로 호영을 지지하게 된 장차관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로열패밀리가 퍼뜨린 소문들은 대게 조작되었거나 미화되어 있었다.

호영을 온화하고 따뜻한 성군처럼 묘사한 것이다.

물론 장차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소문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영은 그들이 기대하는 성군의 재목이 아니었다.

패왕.

오로지 패도를 지양하는 군주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을 거다. 이미 나의 군대가 부산을 점거했고 너희들은 황제의 적이 되었으니까.’

결국 이쪽 편에 선 장차관들이 해야 될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호영을 황제로 만드는 것이다.

호영은 씩 웃고는 장차관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갑시다. 옥좌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말에 장차관들은 다시금 할 말을 잃었지만 애써 웃는 얼굴을 하며 임시 조정으로 호영을 안내하였다.

별궁이었다가 임시 조정으로 쓰이고 있는 부산 행궁.

대한 제국의 황제가 자리한 이 부산 행궁에, 호영이 도착하였다.

“전하, 이곳부터는 병력을 들일 수 없습니다.”

궁궐을 수비하는 근위병이 문을 가로막으며 호영에게 말했다.

“호위는?”

“······최소한의 인원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대신 무기는 패용할 수 없습니다.”

근위병의 말에 호위를 담당하는 무휼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불가합니다.”

“예?”

“소장은 대혼 황자 전하를 호위하는 친위대장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호위든 시종이든 간에 이곳에 들어가려면 누구도 무기를 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순간 근위병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지금 황제 폐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날카로운 눈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압박하는 근위병.

대답 여하에 따라 무휼을 즉결 처분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호영을 호종하는 또 다른 무인, 황보훈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장 황자 전하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 황제 폐하인데?”

“가, 감히!”

“감히 뭐 어쨌다는 거죠?”

“제아무리 황자 전하의 심복이라 해도!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중죄라고요? 크크, 저에게 벌을 내리는 게 가능하기는 합니까?”

“······감히!”

“또 감히? 감히라는 말을 참 좋아하시네.”

호영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만.”

그 한마디에 황보훈은 눈웃음을 지으며 물러났고 근위병 역시 씩씩거리기만 할 뿐, 제자리를 지켰다.

“창은 모두 넘겨주겠다. 대신 검은 그대로 들고 가겠다.”

“하지만 전하!”

“이 정도면 내가 관대함을 보여 준 것 같은데?”

“······.”

아직 황태자가 되지 못했을 뿐, 벌써부터 차기 황제라 거론되고 있는 호영이었다.

호영의 신분이라면 무기를 가지고 가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위병은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기만 할 뿐, 더 이상 호영을 막아 세우지는 못했다.

“가자.”

그렇게 호영은 열 명의 호위와 장차관들을 이끌고 부산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으로 향하였다.

“대혼 황자 전하께서 입시하였사옵니다!”

내관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호영은 그대로 봉수당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적을 보는 것 같은 눈빛들이군.’

호영을 바라보는 대소 신료의 눈빛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부산진까지 그를 마중했던 장차관들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던 신료들은 호기심 어린 또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으나 나머지는 불쾌심이나 경계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참고로 황제의 경우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분명 속으로는 호영을 원망하고 있을 텐데도 겉으로는 여느 황자들을 보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였다.

“소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호영은 그런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단하게 인사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무심한 어조로 툭 던지듯 물었다.

“대혼, 네가 정녕 황자 대혼이 맞느냐?”

“······.”

순간 대전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황제의 물음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친자임을 의심하는 물음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저’임을 의심하는 물음이었다.

어찌 되었건 황제는 호영을 진짜 대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소자가 대혼이 아니라면 누가 대혼이겠습니까?”

호영은 내심 당황하였지만 티를 내지 않고서 말했다.

“그렇구나. 아무튼,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와 주어서 고맙다.”

“이 나라의 황족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면 출정은 언제쯤 할 생각이냐?”

다짜고짜 출정 날짜를 묻는 황제의 모습에 호영은 픽 웃었다.

이제 막 내지에 도착한 호영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다니.

‘빨리 꺼지라는 뜻이로군.’

하기야, 중앙군과 남방군이 경상도 전체에 5만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호영은 부산에만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황제로선 불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영이 당장 군사를 일으키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영은 그런 황제의 속내를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대답하였다.

“글쎄요. 아직 정해질 날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틀 정도 쉬고 사흘 뒤에 출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너무 급하신 거 아닙니까? 전황이 유리하다고 들었는데.”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하니 더욱 기세를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

경망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 모습만 봐도 황제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권력을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주지 않는 황제였던 것이다.

“꼭 출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뭐라 하였느냐?”

“소자,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 병력을 쉽게 빼 줄 거라 생각한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 병력으로 무엇이든 한 가지는 얻어야겠어.’

황태자 책봉이든, 아니면 장차관 자리든 간에 3만의 병력으로 황제를 겁박하며 한 가지는 얻어 낼 생각이었다.

“황자 전하, 오늘 아침에 황해도에서 적괴, 누르하치가 출몰했다는 첩보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요?”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황실 정보부장, 원견을 보며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르하치가 전장으로 다시 돌아온 이상, 전선에는 황자 전하의 병력이 꼭 필요합니다.”

“이미 12만에 달하는 내 병력이 전장에 나가 있어요. 그런데도 내가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여력이 있으시니 당연히 손수 나서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위기 상황이니 말입니다.”

호영은 잠시 인상을 쓰다가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자가 꼭 출정하기를 바라십니까?”

“너의 군대가 아주 막강하다는 사실은 제국 전체가 알고 있다. 그런데 3만이라는 병력을 놀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출정을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하지만 짐이 어찌 너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겠느냐?”

황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소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역시 너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황족이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

“불경하오! 황자 전하, 조건이라니요! 어느 안전이라고 어찌 감히······!”

원견이 목소리를 높이며 호영을 지적할 때 황제가 손을 들었다.

“조건이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남방군 2만을 소자에게 주십시오.”

그 말에 대소 신료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당혹해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황제였다.

“남방군 2만을 달라니. 지휘권을 달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안 될 일이다. 짐의 곁을 지키는 병사가 고작해야 5만밖에 안 되는데 어찌 병력을 뺄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이 황자에게는 병력을 지원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1만의 병력을 주겠다. 이 황자에게도 1만을 주었으니 공평하지 않느냐?”

“소자는 누르하치의 군대를 직접 상대할 것이옵니다. 1만으로는 도저히 누르하치의 군대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만약 2만 이상을 지원해 주시지 않겠다면 누르하치의 군대는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2만의 병력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누르하치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협박.

황제는 호영의 협박에 얼굴을 붉혔지만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하나 너에게 2만의 병력을 주면 경상도를 지키는 게 어려워진다. 최소한 5만의 병력을 유지해야 짐이 안전하다는 말이다.”

이 와중에 자신의 안전 때문에 불가하다는 말을 뻔뻔하게 해 대는 황제였다.

하지만 호영은 예상했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대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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