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그런데 호영은 영지전의 암묵적인 룰을 무시하고 황자를 무려 세 명이나 죽였으니 귀족들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영이 ‘전국구’가 된 시점에서 황자들과 귀족들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 황자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일본을 장악하는 것은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다만 문제는 나의 이름이 내지에까지 퍼졌다는 건데.’
호영은 얼마 전에 내지에서 찾아온 황실 정보부장 원견이라는 사람을 떠올렸다.
원견은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비밀경찰처럼 바뀌어 버린 황실 정보부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호영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협박부터 하였다.
황제에게 찍히고 싶지 않으면 세력 확장을 멈추고 처음 황제가 하사하였던 영지에서 은인자중하라는 협박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영에게 그딴 협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원견의 협박을 무시하였고 원견은 얼굴이 빨개진 채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다. 황제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고서 돌아갔다.
‘황제의 충견인 원견에게 그리 대하였으니 앞으로 황제와의 관계는 영영 회복될 수 없겠군.’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원견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황제는 황제였고 대한 제국에서 황제와 적대한다고 좋을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어찌 처신했든 간에 황제와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지에서 호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야. 나중을 생각하면 내지에서의 영향력도 강화할 필요가 있으니까.’
언제까지 일본에서만 활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영의 목표는 결국 황제가 되어 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것.
그리고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각 부의 장관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의 견제를 막아 내기 위해서는 장관들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슬슬 정부의 장관들과도 관계를 가져야겠어.’
아직 일본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지의 장관들에게 접촉하는 것은 지나치게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였다.
로열패밀리를 통해 전해 들은 내지의 여론은 황자나 영주들에게 어떤 것을 내주든지 간에 일단 지원군을 불러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론일 뿐이고 중신들이나 황제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여론이 일본의 지원군을 바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만큼 현재의 대한 제국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여론을 선동하여 내지에 자신의 지지자를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자신을 황태자로 책봉해 준다면 10만 이상의 지원군을 보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지지자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 * *
고다 진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병력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의 반대편에는 흐릿한 형상의 사람이 하늘에 떠 있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VR 기기로만 가능했던 홀로그램 채팅이었다.
-물자를 지원해 달라면 지원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병력은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식량 따위를 지원해 달라고 당신과 화상 채팅하는 줄 아시오? 식량은 나도 충분하오! 그러니 병력을 보내시오!”
-안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쾅!
고다 진이 분노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뭐 하자는 거지? 초씨 가문을 이대로 놔두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가?”
별다른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홀로그램 화상 채팅을 하여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유는, 공공의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함이었다.
간토 지역을 지배하는 초씨 가문!
석고가 100만이 넘고 군사력은 5만에 달하는, 동부 지역에선 최고라 해도 무방할 세력이 바로 초씨 가문이었다.
심지어 초씨 가문의 수장은 3회 차부터 조선의 무신 또는 한반도의 수호신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무인이었다.
전국시대에 버금가는 난세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동부 영주들에게 초씨 가문만큼 위협적인 세력은 또 없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초씨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권력자를 보게 될 것이다. 초씨 가문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모르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대혼 황자를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는데 왜!”
-설령 일본이 대혼 황자에 의해 통일된다 해도 저의 뜻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동맹을 약속했는데, 갑자기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대혼 황자와 혼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 했어!”
-제 아바타의 여식을 대혼 황자에게 보냈습니다. 혼인 동맹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되었냐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네놈. 지금까지 나를 농락한 거냐!”
쾅!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리치는 고다 진.
그러나 홀로그램이 조금 흔들렸을 뿐, 상대방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농락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대혼 황자 쪽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감히!”
-아무튼 물자 지원을 거부하셨으니 저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홀로그램이 빛을 잃으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채팅방에서 로그아웃 한 것이다.
“칙쇼! 이 멍청한 새끼!”
혼자 남은 고다 진은 광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 보아도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일본을 통일하고 대한 제국의 정부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4회 차 때 그가 대한 제국의 황제에게 팔을 잃었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을 한 이유가 뭐였던가.
대한 제국의 귀족이 되어 나중을 기약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일본뿐만이 아닌,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군림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굴욕적인 항복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5회 차는 그가 원하던 조건을 모두 충족하였다.
양국에서 군림하는 세력가가 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그의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그가 지지하는 황자는 이미 황위 계승 후보자로 불리며 머지않아 황태자가 되었을 터.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가 지지하는 황자는 존재감이 극도로 희박했고 오직 단 한 명의 황자만 위명을 떨쳤다.
그 황자란 다름 아닌, 대혼이었다.
“빌어먹을! 조선 놈에게 또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위 경쟁의 향방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자, 대혼이 승리하게 되리라.
물론 아직까지는 섣부른 판단일 수 있었다.
세 명의 백작 중 두 명의 지지를 받고 있고, 일본의 수많은 영주들과 혼인 동맹을 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지만 반대파도 만만치는 않았다.
동부는 백중세일지 몰라도, 서부는 황자 대혼을 적대하는 세력이 조금 더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다 진은 서부의 세력 판도가 역전되는 것 또한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미 대혼의 세력 확장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문 듯 기세가 대단하였는데, 본섬 중부 지역을 시작으로 그 영향력을 빠르게 늘려 가고 있었다.
서부가 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세리자와 유우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비어 있던 정면의 좌석에서 홀로그램 빛이 쏟아지더니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한때 고다 진과 같이 낭인 조직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세리자와 가모, 아니 세리자와 유우였다.
“영감, 무슨 일이야?”
-동부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최악이야.”
-정확하게 말해라. 어떤 점에서 최악이라는 거냐?
유우의 물음에 고다 진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연합을 만들려고 했는데 죄다 저쪽 편에 붙었어. 혼인 동맹을 했다는데, 아무튼 답이 안 보여. 대혼은커녕 초씨 가문의 공세를 막아 낼 방도조차 없어.”
-그런가.
“서일본은 어때?”
-여기도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끝났다니? 아직 서일본은 버틸 만하지 않나?”
-와카야마의 김성근 자작이 1만, 오다 백작이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중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야 할 교토는 황보훈이라는 자가 장악하였고 쥬코쿠의 미와 가문은 대혼 황자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거기도 혼인동맹이야? 나 참. 대혼 그 자식은 진짜 일본 영주들을 전부 외척으로 만들려는 것인가.”
고다 진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도 세력 확장의 속도가 지나칠 정도로 빠른데 혼인 동맹까지 적극 이용하니 순식간에 일본의 절반이 대혼의 세력으로 넘어간 모양새였다.
“그런데, 영감도 위험한 거 아니야? 4만 명이 쳐들어오고 있다며?”
-나는 이 전쟁을 포기했다.
“포기했다니? 설마 4회 차 때처럼 조선 놈들에게 항복할 생각이야?”
-미치이는 이미 그쪽으로 넘어갔다.
“뭐라고? 이 새끼가······ 감히 배신을 해?”
고다 진은 분개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동성회의 수장, 고다 진, 용병 연합의 미치이 히사유키, 신선조 국장 세리자와 가모.
이렇게 세 사람은 지금까지 운명 공동체였다.
거의 1회 차부터 이어진 관계였는데, 현실에서도 안면을 익혔을 정도이니, 고다 진으로선 히사유키의 배신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개새끼들이 나를 아주 갖고 노네. 동맹하겠다고 약조했던 동북부 새끼들도 그렇고, 미치이까지 이 지랄을 하다니.”
-어쩔 수 없다. 강자였다면 모를까, 지금의 우리는 엄연한 약자이니까.
“영감! 왜 재수 없게 약한 소리를 하고 그래? 설마 영감도 미치이처럼 조선 놈들에게 이미 넘어간 것은 아니지?”
-그럴 리가. 다만 현실을 자각하자는 거다.
“······젠장 할. 그래서 영감은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거야?”
고다 진의 물음에 유우가 영혼 없이 거죽만 남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일본을 포기할 생각이다.
“뭐? 일본을 포기한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번 회 차에서 확실하게 느낀 건데, 나는 조선을 감당할 수 없다. 정확히는 그 대혼이라는 유저를 감당할 수가 없어.
“그래서 도망치겠다는 거야? 그놈들과 싸워 보지도 않고서?”
-싸우고 난 이후에는 내 힘만 약해지겠지. 그러니 여력이 남아 있는 지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차라리 항복하는 게 낫지 않나?”
-4회 차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미치이처럼 진즉에 투항했다면 모를까, 대혼은 우리의 항복을 받아 주지 않을 거야. 알다시피 그는 한 번은 있어도 두 번은 없으니까.
“······.”
-어쨌든, 내가 이곳에 와서 너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고다 진, 너와 함께하고 싶어서다.
유우의 말에 고다 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역시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