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52화 (252/345)

# 252

도태되지 않으려면 상대를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황자들과 영주들의 야망이 엉기면서 일본 곳곳에서 온갖 세력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100년 전에 있었던 전국시대의 전조를 보는 것 같았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군.’

호영은 일본의 상황을 보며 만족하였다.

자칫하면 공공의 적이 되어 일본 전체와 싸워야 됐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상황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영주들과 황자들이 사분오열 되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황자 전하, 모리야마 남작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모리야마 남작이라······.”

“교토 인근의 모리야마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오늘도 호영은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오다 백작 가문에 속한 도시들을 순방하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일본 해방 전선을 박멸하기 위함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지금처럼 지역 유지와 영주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곳곳에서 세력을 일으키고 있는 여느 황자들과 다르게 그는 단순한 얼굴 마담이 아니었다.

오다 백작 이상의 권력을 가진 진짜 권력자였다.

그렇다 보니 호영은 진짜 권력자로서 자신의 얼굴을 알릴 의무가 있었다.

황자라고 신비주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지금처럼 영주나 귀족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도 찾아왔군. 좋다. 알현을 허하겠노라.”

“그럼 모리야마 남작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후 모리야마 남작이라는 사내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모리야마 남작은 여느 귀족들처럼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다.

오다 백작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귀족이 아니라서 정보가 별로 없었을 텐데도 호영이 오다 백작 가문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소인이 지금은 비록 공왕에게 복속된 처지지만, 소인의 모리야마 가문은 본래 교토보다는 오다 백작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인연이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소인이 생각하건대, 머지않은 미래에 천하는 대혼 황자 전하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황위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본다는 것이로군?”

“물론입니다. 오다 백작 가문을 휘하에 둔 대혼 황자님이 아니라면 그 누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나를 지지하려는 것을 공왕 전하도 알고 계시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왕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애초에 공왕은 소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소인이 군사를 동원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역적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모리야마 남작.

일부러 ‘군사동원’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은 진짜 역모를 준비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즉, 호영이 명령만 내리면 공왕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군.”

하지만 호영은 그런 모리야마의 말에 무심하게 대꾸하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호영에게 가장 큰 적수라 할 수 있는 공왕인데, 정작 호영은 공왕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뒤에 있는 여인은 그대의 질녀인가?”

호영의 시선은 모리야마 남작이 아닌, 그의 뒤편에 있는 미모의 여성에게 향해 있었다.

언뜻 보이는 그의 눈빛은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아, 이 아이는 소인의 먼 친척인 모리야마 리에라고 합니다. 이제 열여덟 살인데, 결혼 적령기인지라 적절한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결혼 상대라······.”

“혹시 마음에 드신다면 황자 전하께서······?”

말끝을 흐렸지만 모리야마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모를 수 없었다.

하기야, 애초에 이 자리에 리에를 데려온 것부터 모리야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혼인 동맹을 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본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지. 뭐, 한국이라고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호영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리야마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나?”

“······전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혹시 리에를······?”

“꼭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헤헤.”

“다시 한 번 묻겠다. 무엇을 원하나?”

“소인은 욕심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보다 높은 작위와 더 큰 영지, 사병 수 제한만 풀어 주신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욕심이 많지 않다면서 작위와 영토, 군사력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나먼 친척이라는 리에의 미모를 보면 그 욕심이 지나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리에의 미모는 그야말로 일본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알겠다. 내가 황태자가 된다면 그대의 말대로 해 주지.”

“헤헤, 감사합니다. 전하!”

모리야마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 호영은 그에게 턱짓을 하였다. 물러나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눈치가 없지는 않았는지 모리야마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리에는 호영의 곁에 남겨 둔 채로 말이다.

“신기한 일이군. 그대가 지금껏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말이야.”

호영은 리에와 단둘이 남게 되자 무심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가주께서 소녀를 아끼셔서······.”

“그래?”

리에의 대답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아니 경은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가?”

“저, 전하. 소, 소녀가 무슨 실수를 하였나이까?”

“모리야마 남작은 아닐 테고, 역시 공왕인가?”

“소녀는 모리야마 가문의······.”

“연기를 해 봤자 소용없다. 이제 그만 정체를 밝혀라.”

채앵.

“대단하시군요. 침실까지는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갑자기 검을 뽑아 들며 기괴하게 웃는 모리야마 리에.

호영은 그런 리에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와 침실이라니.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호오, 제가 남자라는 사실까지 파악하셨습니까?”

일본에서 가장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리에가 사실은 여자가 아니었다니.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상대의 성별을 파악했을 때는 호영도 꽤나 놀랐다.

그만큼 리에의 미모는 대단했으니 말이다.

“걸음걸이와 몸 움직임만 봐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

호영이 무공에 투자한 시간만 수십 년이었다.

무공 실력이야 정체하고 있다지만 상대를 보는 안목은 쌓여 가는 경험만큼 성장해 가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상대의 겉모습만 보고도 성별과 무공 실력을 간파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과연 전하의 실력이 눈썰미만큼 대단할지 궁금하군요.”

“그것이야 지금 알아내면 되겠지.”

“바라던 바입니다!”

리에의 신형이 용수철 튕기듯 앞으로 쏘아졌다. 못해도 B급은 넘어 보이는 보법 실력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범상치 않은 수준이군. 어디서 이런 고수가 튀어나온 거지?’

잠시 의문 어린 표정을 짓던 호영이지만 상대의 실력은 결코 방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전투에 집중하였다.

파바박!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두 사람은 무려 다섯 번을 부딪쳤다. 다섯 번 모두 리에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리에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얼굴만 보면 당하고 있는 쪽이 리에처럼 보였다.

“이익!”

인상을 찡그린 리에는 재차 공격을 감행하였다.

푸른 섬광이 작렬하며 당장이라도 호영의 목을 꿰뚫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호영의 목을 노리던 푸른 검기는 옆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창에 의해 허무하게 막혔다.

리에가 다시금 표정을 굳히던 그때 갑작스러운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거칠게 뒤로 튕겨 나갔다.

반응할 새도 없이 호영의 발 차기가 리에의 복부로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점점 감이 오는군.”

“······무슨 감을 말하는 겁니까?”

“그냥 어떻게 피할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군요.”

“이미 실력 차이를 봤을 텐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토해 내며 다시금 달려드는 리에.

보법을 극성으로 전개하였는지,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4회 차였다면 ‘화경’급의 고수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당하였다.

처음에는 나름 치열했는데, 지금의 호영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어른이 아이를 상대해 주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하아!”

팔을 축 늘어뜨려 놓은 리엔을 보며 호영이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은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끝까지······ 저는 끝까지 갈 겁니다.”

호영은 그런 리에의 모습에 픽 웃고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황보관.”

움찔!

리에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무언가 들키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역시 너였군, 황보관.”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의 검법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냐?”

“검법으로 알아차렸다니. 4회 차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본질은 같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황보관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보아하니 공왕의 명령을 받고 나를 암살하려는 것 같은데?”

리에, 아니 황보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센추리에 접속하니 가문이 풍비박산 났더군요. 원래는 자작 가문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방황을 좀 많이 했습니다.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잘사는 로열패밀리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질투를 내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보 자작 가문의 멸문.

그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내지 출신의 귀족들 때문에 멸문했지, 아마?’

유저들이야 호영이 총애하는 황보관을 차별하지 않았지만 NPC들은 달랐다. NPC의 시대가 되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황보 자작 가문은 멸문하였다.

주변의 영주들이 전부 황보 자작가를 공격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처음에는 방황하다가 로열패밀리의 동료들에게서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기회다 싶어서 공왕의 임무를 받은 겁니다. 참고로 제 아바타의 신분이 공왕의 호위 무사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지?”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후후, 전하와 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하는 거지요.”

“내가 대혼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데?”

“그거야······ 감이었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앙 지휘 본부의 통제도 거부하고 무엇을 하고 지내나 했더니, 자신과 대결하기 위해 자객 노릇을 했단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인의 호승심이란 본래 그런 법이라 호영은 그냥 픽 웃고 넘어갔다.

만약 다른 멤버였다면 질책을 넘어 징계를 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황보관은 어떻게 보면 외국 용병과도 같은 입장이었기에 엄하게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와 대결해 본 소감은 어떻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조금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자존심이 많이 하락한 기분입니다. 정말, A와 A+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