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48화 (248/345)

# 248

이 거리를 구경한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

4회 차까지만 해도 시골 마을에 불과하였던 곳이었다.

그런데 불과 100년 만에 도시에서나 볼 법한 고층 건물들이 생겨나 있었다.

거리에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말이다.

10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호영으로선 이곳의 변화가 놀랍기만 하였다.

“이곳이 나의 영지란 말이지?”

영지.

호영이 4회 차에 귀족들에게 하사하였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영지였다.

그리고 지금, 호영은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되었다.

그의 아바타 대혼이 황자로서 혼슈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하,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상념에 잠긴 그에게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무인이 말을 걸었다.

“무휼.”

무인의 이름은 무휼.

황자 대혼의 호위 무사로서 초절정, 즉 B+ 이상의 무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호영은 고개를 돌려 무휼을 바라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경은 영지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하께서 무슨 의미로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영지전에 대해서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니까.”

“소장은 일본의 관습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영지전을 원하신다면 소장은 전하의 검이 되어 싸울 것입니다.”

“그래?”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난 3주 동안 관찰했던 대로, 무휼은 그의 아바타 대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 같았다. 마치 준기나 윤원목이 호영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유저라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충성할까?’

그것은 호영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면 무휼의 본심을 알아내야 했다. A급 수준의 무인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지전으로 세력을 넓힐 생각이다. 중부 지역을 넘어 본섬 전역을 차지할 거야.”

“······.”

“그리고 결국엔 황태자가 될 거다. 본섬 전역을 차지하면 황제 폐하라고 해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까.”

“······.”

“하지만 이런 나를 두고, 내관들이나 무사들은 의심하겠지. 이전의 나와는 너무 다른 행동이니까. 특히 이한용 같은 경우는 나를 공왕에게 고발할 거야. 그는 황제 폐하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첩자나 다름없으니.”

“······.”

무휼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주군의 정체를 파악하고서 충격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호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노골적으로 물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전과 달라진 나의 모습을?”

“소장에게 있어 황자 전하는 황자 전하일 뿐입니다.”

“이한용이나 다른 내관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나는 경이 충성을 바치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소장이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직 황자 전하뿐입니다.”

“내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린다 해도? 어쩌면 황제 폐하와 반목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전하께서 명령하신다면 소장은 누구든 벨 것입니다. 설령 그분이 이 나라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라고 해도.”

“······!”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황제의 권위가 절대적인 대한 제국에서 황제를 베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믿음직스러웠다.

그 누구도 황제를 베겠다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연기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경의 충성심이 그렇게 확고하니 나도 더 이상 경을 의심하지 않겠다.”

호영의 말에 무휼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이한용.”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보며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관이면서도 곰 같은 덩치를 가지고 있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황제가 보낸 첩자, 이한용이었다.

“무슨 일이지?”

“황자 전하, 또 소관에게 하대를 하시는 겁니까? 요즘 들어 황자 전하는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수상하다는 듯, 눈가를 좁히며 말하는 이한용을 보며 호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허어, 안 하시던 외출을 계속하시는 것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너무 많이 변하신 거 아닙니까?”

“사람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지.”

“하지만 지금 시점에 변하는 것은 너무 공교로운 것 같습니다만?”

그는 감히 황자를 상대로 빈정거리는 말투를 사용하였다. 마치 호영을 우습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 보면 확실히 그가 호영을 우습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 계속 이런 식으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소관으로선 공왕 전하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한다는 거지?”

“다 아시면서 괜한 것을 물으십니다. 당연히 황자 전하의 정체에 대한 보고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악령에 씌었다고 의심하는 건가?”

“그거야 소관이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신다면 소관으로선 어쩔 수 없이 보고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황자에게 대놓고 협박하는 이한용.

본국이었다면, 아니 다른 황자였다면 일개 내관 따위가 이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이었고 대혼은 황자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황자였다.

이한용처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는 내관이라면 대혼을 괄시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어떻게 해야 공왕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냐는 말이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소관이야 굳이 보고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외출도 하지 말고, 정치에도 관심 가지지 말고, 그냥 무공이나 수련하라는 것이로군.”

호영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이한용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평소 황자 전하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내가 그러는 동안 그대는?”

“예?”

“그대도 평소처럼 행동할 것인가?”

“평소대로라? 소관이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일본인들에게 청탁을 받고 뇌물을 받으며 학정을 펼치는 것이 그대가 평소에 하던 일이 아닌가?”

“······.”

예상치 못한 비난에 이한용은 충격을 먹었는지 잠시 말문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요. 공왕 전하에게 보고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군.”

“······태연하시군요. 소관이 황자 전하에 대해 공왕 전하께 보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시는 것입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황자라 해도 의심스럽다면 제거하라는 명령 말입니다.”

“······.”

“이제 아시겠지요, 황자 전하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소관의 손에 황자 전하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채앵!

“감히 황자 전하에게 무례를 저지르다니!”

그때 조용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무휼이 검을 뽑고는 이한용의 목에 겨누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전하에게 무례를 저질렀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살기를 뿜어내는 무휼의 모습을 보면 당장이라도 이한용의 목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감히! 무례는 내가 아니라 네놈이 저지르고 있다!”

“그래도 이놈이!”

“황자 전하!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어서 이자에게 명령을 내리세요! 검을 치우고 무릎을 꿇어 사죄하라고!”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하였다.

무휼이 자신의 목을 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무휼 장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화, 황자 전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잘못했다는 거다. 나에게 죽을죄를 졌다는 뜻이지.”

호영의 말에 이한용은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가 이내 사나운 얼굴로 버럭 외쳤다.

“실성하신 겁니까! 소관을 죽이면 공왕 전하께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자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검을 집어넣으라고!”

“어차피 그대를 살려도 공왕에게 보고할 것이 아닌가?”

“······!”

“무휼, 죽여라.”

“화, 황자 전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소관을 죽인다니요! 소관은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고 있는 내관입니다!”

“죽을 때가 되니 그 사실을 말하는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살려 주십시오. 황자 전하! 부디 살려······!”

서걱!

이한용의 수급이 하늘로 솟구쳤다.

무휼이 단숨에 이한용의 목을 베어 낸 것이다.

“잘했다.”

“소장은 단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무려 황제의 최측근을 죽인 일이었다. 아무리 호영의 명령을 따랐다지만 무휼로서도 정치적 부담이 상당했을 터.

하지만 무휼은 정치적 부담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호영의 명령에만 충실할 따름이었다.

‘우직하군. 이런 수하가 최측근으로 있다니 나름 운이 좋다고 해야 되나.’

그의 아바타가 처해진 상황은 분명 최악이나 다를 게 없었지만 무휼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무휼에게 말했다.

“경이 또다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어떤 명령이든지 따르겠나이다.”

“나와 같이 황도에서 내려온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황제 폐하의 지시를 받고 나를 감시하거나 견제하고 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충.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숙청 명령.

하지만 무휼은 이번에도 우직하게 명을 받들었다.

‘이번 회 차에 새로운 충신 가문이 생겨나겠군.’

무휼.

앞으로도 그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내지에서도 중용될 것이다.

호영은 그를 요직에 중용할 날을 고대하며 무휼과 함께 본격적으로 숙청 작업에 나섰다.

* * *

황자 대혼의 영지는 오다 가문의 영지였던 기후 지역의 오가키성이었다.

물론 오가키성 하나만 다스리는 것은 아니고 주변의 땅들도 간접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직접 다스리는 오가키성과는 다르게 간접적으로 다스리는 곳의 책임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황자가 실성했다는 이야기?”

오가키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영지, 아라오의 통치자 토키치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사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검을 휘두른 적은 몇 번 없는 봉신 귀족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무휼이었던가? 아무튼 장수 한 명을 앞세워 명분도 없이 피의 숙청을 했다고 들었소.”

“우리들의 말을 잘 들어주던 이한용이라는 자도 그 무휼의 손에 죽었다죠?”

“허어, 진짜 이게 뭔 난리입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우리를 편히 대해 주어서 이전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봉신 귀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자의 통치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다 가문의 가신이 오가키성을 다스렸을 때보다 세금이 훨씬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세금이 준 것이 아니라 오가키성의 내정을 관리하던 이한용이 뇌물을 받고 세금 감면을 해 준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봉신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황자의 통치가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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