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건우와 짧은 대화가 끝나자 호영이 따로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허영만과 안지호, 우원재가 차례로 보고하였다.
“내년부터는 사교 파티에 굳이 참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로열 그룹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황태자 대반에게 소신 있고 강단 있는 재사들을 붙였습니다. 앞으로 황태자가 황제를 적절하게 견제해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방을 정찰한 결과, 어쩌면 회장님의 예상대로 후금이 발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후금이 강훈련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부하들의 보고를 들으며 호영은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4회 차가 끝나 가는 상황에서 크게 연연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기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회장님, 결혼은 언제 하시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김성근이 보고할 차례가 왔을 때, 김성근이 뜬금없이 호영의 결혼 날짜에 관해 물었다.
“지금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적절하다고 보는가?”
“솔직히 회장님의 결혼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제가 보고하려는 것도 아까 강 이사님이 보고하셨던 혼슈 귀족들에 관한 것뿐이니, 따로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
호영은 미간을 좁히며 침묵하였다.
그러자 윤원목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성근, 회장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아니, 윤 대표님도 저에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하루빨리 회장님의 후계자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그거야······.”
“뭐, 아직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나중에라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호영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이 나면 알려 주겠다.”
호영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했던 말처럼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아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내년에는 프로포즈를 해야겠어.’
어차피 이제 와서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도 없다.
그러니 내년이 되면 경선에게 청혼을 신청하리라.
* * *
마침내 5회 차가 시작되었다.
호영은 그답지 않게 긴장된 얼굴로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그가 회귀 전에 처음으로 센추리를 시작한 게 바로 5회 차 때였다.
당연하겠지만 그에게 5회 차는 여러모로 뜻깊은 회 차가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아는 이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센추리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친구도 사귀었고,전우애도 나누어 보았으며,연애와 결혼도 해 보았다.
첫 시작이었던 5회 차 때는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많이 하였는데, 위에 말했던 모든 것을 경험하였다.
우정과 전우애, 심지어 사랑까지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5회 차가 되니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운 인연을 다시금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비효과 이론을 생각하면 그리운 인연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10퍼센트도 안 될 것 같았다.
역사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기 때문에 그가 만났던 대부분의 NPC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튜토리얼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감성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눈앞에 익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호영이 ‘Yes’를 클릭하니, 이번에는 무기 하나를 고르라는 문구가 떠올랐는데 호영은 여느 때처럼 ‘마법사의 알약’을 선택하였다.
마법사의 알약을 고른 이유는 마법사의 알약이 마나를 1 올려 주기 때문이다.
마나가 1이라도 있으면 ‘기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같은 이유로 이제는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무인들도 무기 대신 마법사의 알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튜토리얼의 특성상 감지 능력의 유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던 까닭이다.
“하필 지형이······.”
하지만 호영은 튜토리얼이 시작되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튜토리얼 장소가 하필 개활지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활지라면 기감은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청력이나 시력으로도 충분히 주변을 감지할 수 있기 탓이
‘그나마 갈대밭이 있어서 다행이군.’
호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엄폐하였다.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여포처럼 행동해도 되겠지만 지금 그에게 주어진 마나는 고작해야 1뿐이었다.
더군다나 무기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니, 아무리 그의 무술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몸을 엄폐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앞에 사람 한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을 들고 있는 30대 중반의 동양인이었다.
‘저 사람은 뭐야? 왜 저렇게 눈에 띄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사내를 공격하려고 가까이로 접근하던 호영은 움직임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튜토리얼 시작 전에 복장을 선택할 기회가 있는데, 호영은 위장을 위해 연두색의 티셔츠를 선택하였다.
아마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와 비슷한 색깔의 복장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4시간도 안 되어 끝나는 튜토리얼에서 멋을 찾기보다, 효율을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는 빨간색 티를 입고 있었다.
‘설마, 말로만 듣던 빨간 티 군단인가?’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호영이 회귀하기 전, 5회 차의 튜토리얼에서는 빨간 티 군단이라는 것 때문에 잠깐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호영이야 5회 차가 시작되고 며칠 정도 지난 이후에야 센추리를 하게 되었으니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지만 빨간 티 군단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이유는 단순하였는데, 개인전이라 할 수 있는 튜토리얼에서 대놓고 팀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중국인들.
그들은 암묵적으로 자신들과 같은 색깔을 착용한 사람들을 아군으로 규정하였다.
즉,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때는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을 넘어 두세 명씩, 때로는 열 명 이상이 한꺼번에 몰려다니기도 하였다.
‘며칠만 지나도 빨간 티를 입으면 오히려 사냥을 당하게 돼서 자연스럽게 해산될 텐데······. 운이 안 좋았군.’
호영은 쓴웃음을 짓고는 몸을 완전히 낮추었다.
상대가 붉은 티 군단의 일원일 것이 거의 확실하니 공격을 포기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창을 든 동양인 사내가 우연히 호영을 발견하였다. 강풍이 불어 고개를 돌리다가 호영을 발견한 것이다.
“휘이이익!”
마치 기다렸다는 듯, 휘파람을 부는 사내를 보며 호영은 빠르게 달려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간 티 군단이 오기 전에 사내를 죽일 생각이었다.
“커헉!”
다행히도, 사내를 죽이는 것은 성공하였다. 어설프게 내지르는 창을 가뿐하게 피해 내고는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사내를 깔끔하게 처리했음에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내를 죽이는 사이, 빨간 티 군단이 서서히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빨리 이동해야겠군.”
호영은 혀를 차고는 사람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동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사내의 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쫓아라!”
“저놈이 동포를 죽였다!”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니 사방에서 중국인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조직적으로 그를 뒤쫓는 것 같았다.
‘미친. 저게 다 몇 명이야?’
처음에는 한 명, 두 명 정도가 따라오더니 이제는 다섯 명 이상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도망갈수록 그를 쫓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호영은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는 두세 명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시끄럽게 나불대는 이들을 빠르게 제거하고 다시 도망칠 속셈이었다.
“죽어라!”
세 명의 중국인들은 체력이 제법 차이 났는지 6미터에서 10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선두로 달리던 중국인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흥분한 탓인지 동료들과 합을 맞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보군.’
만약 그가 호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렇게 생각 없이 달려들지는 않았을 터.
호영은 조소를 짓고는 창을 내질렀다.
그러자 속도만 날렵하고 모든 게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중국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배, 백약이 죽었다!”
그 대신 비명을 지른 것은 두 번째로 달려오던 사내였다.
호영은 기세를 몰아 도끼를 든 사내까지 공격했다.
채앵!
사내는 무공 실력이 제법 뛰어난 이였는지 호영의 공격을 제법 잘 막아 냈다.
심법이 어느 정도인지는 호영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보법만큼은 C급 이상이었다.
호영의 공격을 이 정도로 막아 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센추리에서만 무공을 익힌 자로군. 몸을 전혀 단련하지 않았어.’
하지만 무공은 알았어도 육체 능력이 형편없었기에 사내는 얼마 버티지 못하였다.
호영의 섬전 같은 찌르기를 막아 내기에 사내의 몸은 너무 굼떴던 것이다.
서걱.
결국 사내는 목을 부여잡은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여기다! 동포들을 학살하는 놈이 여기에 있다!”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에도 기세를 몰아 마지막 남은 한 명을 빠르게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상대는 멀찌감치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시끄럽게 나불거리면서 말이다.
“도망치게 놔둘 것이라 생각했느냐.”
혀를 찬 호영은 처음에 죽인 사내의 단창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는 상대를 향해 던졌다.
푹!
“켁!”
투창에도 일가견이 있는 호영이었기에 도망치던 상대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호영은 세 명의 적을 순식간에 처리하였다.
하지만 호영은 마지막 상대까지 처리했음에도 인상을 펴지 못했다.
“동포를 도와라! 동포를 도와라!”
“차이나 넘버 원!”
세 사람을 상대하느라고 시간을 잠시 지체하는 사이, 사방에서 빨간 티를 입은 중국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최소 열 명은 넘어 보이는 규모였다.
‘젠장.’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다.
안개도 조금씩 다가오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빨간 티 군단의 추격은 집요하였다.
아무리 도망쳐도 도저히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평지여서 숨는 것도 불가능하였는데 말이다.
“죽어!”
결국 또 한 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피할 수 없는 승부였다.
이번에도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잔부상을 입었고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체력도 거의 바닥 난 상태였는데, 중국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덤벼 댔다. 무슨 좀비 떼를 보는 것 같았다.
화살을 피하니 창이 날아왔고 창을 피하니 사람이 달려들었다.
죽이고 또 죽였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튜토리얼에서 포위를 당하게 될 줄이야.’
회귀까지 경험한 호영도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운이 없군.”
장소라도 산악 같은 지형이 걸렸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호영은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기 무섭게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1회 차와 2회 차 그리고 회귀 전에 겪어 봤던 죽음의 고통이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