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물론 제국 선언이 아니더라도 백년대계라는 아주 중요한 과업도 남아 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전쟁이 이렇게 끝났으니 아바타를 죽일 일도 더 이상 없겠군. 차라리 규슈 남부에서 장렬하게 산화할 걸 그랬나.’
열흘이 지나 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호영은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사연은 있다지만 어쨌든 폭군은 폭군이었다.
과연 폭군에게 100년이라는 시간을 맡기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일단은 최대한 교정을 해 보는 수밖에.’
아바타의 성격이나 스킬은 유저가 조금씩 수정하는 게 가능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인이었던 자가 악인으로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반대도 마찬가지.
그저 방향을 잡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연왕이라는 아바타가 과연 방향을 잡는 것만으로 폭군이 아니게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마땅히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후계자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겠어. 제국 선언에, 황태자 책봉 그리고 무공 학교 건설까지.”
호영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강파도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전하,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친위대는 모두 탑승했나?”
“예.”
“그럼 가지.”
그는 강파도와 함께 배에 올라탔다.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구나.’
금의환향하여 본국으로 돌아간다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영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규슈를 바라보았다.
충구가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지 백성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의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백성이었다.
호영도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보냈다.
“전하, 지금 향하는 곳이 교토입니까?”
“그런데?”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규슈를 떠날 때, 친위대원 중 한 명이 갑자기 다가와서는 그렇게 물었다.
“교토에는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으로 혼슈를 들러 미비한 점들을 보완할 생각이었다.
귀족들 덕분에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영역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혼슈의 절반 가까이가 그의 땅이었다.
더군다나 그 절반 중에서 또 절반 가까이가 ‘왕실 직할령’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게 아닌, 왕실이 직접 관리해야 할 땅이 되었는데 왕실의 땅이니만큼 그가 직접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호영은 본국으로 귀환하는 와중에 잠시 혼슈를 들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지?”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교토 인근에 ‘일본 해방 전선’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친위대원의 보고에 호영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또 그놈들인가. 지겹지도 않나 보군. 규슈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는데 말이야.”
치안이 안정되기 시작될 무렵, 규슈에서 난데없이 반란군이 등장했다.
‘일본 해방 전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반란군이었는데 혼슈에서만 활동하던 그들이 마침내 규슈까지 진입한 것이다.
‘무공은커녕 싸움도 할 줄 모르는 넷 우익들이 쓸데없는 일을 벌여 백성들의 피해만 가증시키고 있어.’
대한국의 지배를 받는 센추리의 일본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한 제국과는 전혀 달랐다.
센추리의 일본에는 애국심이라는 것이 없었고 민족에 대한 구분도 없었다.
더군다나 영주나, 황제, 쇼군 따위에게 야만적인 통치를 받던 센추리의 일본이었다.
세금은 5할이 기본이고 온갖 수탈을 당해 농사를 해도 남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쉬도 때도 없이 전쟁이 벌어져 징집당하거나 약탈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일본 백성들의 체구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가혹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주의자로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 백성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대한국에 점령당하는 게 이로운 일이었다.
일단 전쟁이 없어졌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일본 백성들의 삶이 2배, 아니 3배 이상은 나아졌으니 말이다.
물론 영지전이라는 게 있었지만 영지전 같은 경우는 규칙이 존재하여 현지 수급이나 강간, 방화처럼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다.
징집이나 징발로 인한 피해는 없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영주들이 대한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니 백성들이 지나칠 정도로 학대받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으로선 해방 전선이라는 존재가 역겹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투사를 흉내 내지만 실상은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티끌만큼도 가지지 않은 아바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반란군이 나타났으면 오히려 혼슈로 가야 하는 게 맞지 않겠나?”
“하지만 반란군이 전하만을 노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지. 규슈에서처럼 유인을 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야.”
“······.”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친위대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전을 위해서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데 호영의 무공 실력이 원체 뛰어난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친위대원의 모습을 보고 호영은 피식 웃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참에 나의 아바타, 연왕의 운을 시험해 봐야겠어.”
일본 해방 전선.
호영의 입장에서는 이슬람 테러 조직 못지않게 극성맞은 반정부 단체였다.
친위대원이 했던 말처럼 호영이 나타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려 들 터.
만약 그들의 암살 위협에서 이번에도 살아남는다면 호영은 연왕을 계속 왕으로 둘 생각이었다.
* * *
일본 해방 전선과의 전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호영이 혼슈에 도착한 순간, 반란군이 마치 들불처럼 일어나 호영을 위협하였지만 그 누구도 호영에게 유효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너무도 압도적으로 모든 위협을 봉쇄시킨 것이다.
“저희 오다 백작가에서 5천의 병사를 동원하였습니다. 전하와 함께 반란 진압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의 명령만 떨어지면 관동 초씨 가문 역시 반군 토벌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주고쿠 지역의 귀족들 역시 대규모 출병을 준비하였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친위대만으로 교토 인근의 반란군을 정리하자, 백작들을 시작으로 열도 전체의 귀족들이 반란군 토벌에 적극 가담하였다.
공을 세워 왕에게 인정받겠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일본인 같은 경우는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아무튼 의도가 어떻건 간에 귀족들의 협조로 반란군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고, 호영은 해를 넘기자마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경은 이제 영지로 돌아가도록.”
“소장도 전하를 따르고 싶습니다만.”
“영지에서 세력을 키워 반란군이나 같은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이 경의 임무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친위대장 김성근의 직위를 해제하였다.
이제 그는 자작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뭐,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영지에서 제 할 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리자와 가모를 감시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 신선조 국장이었던 늙은이 말입니까? 정보부에서 말하기를 신선조가 해산된 이후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고 하던데.”
낭인 조직들은 그동안 조직에서 보유한 엄청난 숫자의 낭인들을 기반으로 각국의 정세에 개입해 왔었다.
그야말로 통치하지 않고서 군림해 왔던 낭인 조직들이었다.
하지만 삼대 낭인 조직의 수장이었던 세 사람은 영지와 작위를 받게 된 이후 자신들의 조직을 해산시켰다.
호영이 따로 해산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 자발적인 해산이었는데 그들이 받은 영지가 족쇄로 작용한 경우였다.
귀족들의 원칙 중에 다른 영지에 첩자나 사병을 파견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이 있었는데, 삼대 낭인 조직에 소속된 낭인들은 첩자이나 사병으로 쓰였다.
영지전의 명분을 제공하고 싶지 않다면 낭인 조직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다 진, 세리자와 가모, 미치이 히사유키는 작위와 영지를 얻고도 오히려 세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영지를 가짐으로써 혼슈 전역으로 확장되어 있던 세력이 자작령으로 확 줄어들기는 했어도 그는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도 주변 영지의 정세에 개입하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어.”
“허, 뒷방 늙은인 줄 알았는데 더러운 수작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러니 경의 역할이 막중하다. 다른 두 사람은 황 자작과 순 자작이 맡을 것이니 세리자와는 경이 확실하게 책임지도록.”
“명을 따르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호영은 그렇게 영주의 신분이 된 김성근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는 본국으로 되돌아왔다.
“우와아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대한국 만세!”
제물포에 도착하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인파가 그를 환호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었는데도 민심이 대단히 좋아 보이는군.”
“고무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그런 것이라 사료됩니다.”
“다른 이유로는, 전쟁보다 폭군 시절이 더 가혹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호영이 일본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내정을 담당했던 외무 장관, 최인준과 내무 장관, 신용우가 각각 말했다.
그러자 호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렇다곤 해도 경들이 내정을 다스리지 않았다면 백성들의 지지도 없었겠지. 모두 수고 많았다.”
“과찬이십니다. 수고는 전하께서 하셨지 않습니까?”
“소신이야, 받은 만큼 일하였을 뿐입니다.”
그의 칭찬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호영은 다시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수도로 이동하지.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말이야.”
수도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제물포에 계속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자, 호영은 대신들과 함께 곧장 수도로 향하였다.
‘길이 많이 넓어져서 그런가. 배와 수레가 바쁘게도 움직이는군. 마을 백성들의 행색도 전과 비교해 보면 무척이나 좋아 보이고 말이야.’
황폐하여 수레는커녕 사람도 나다니기 어려웠던 도로가 수레 두 대도 지나다닐 수 있는 도로로 바뀌었고, 걸인처럼 추레하기 그지없었던 백성들의 행색이 이제는 보기 좋을 정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도로를 포장하는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일단 함경도 지역에 벽돌 공장을 건설하여 벽돌을 생산하고 있는데 상행이 활발한 한강 이북 지역 먼저 도로를 포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
“개성, 의주, 회령 등 주요 도시의 경우 50퍼센트 이상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아직 10퍼센트 정도로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한때 상인이었던 신용우는 항상 도로 건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호영이 전쟁을 나가 있는 동안 전국의 도로 건설을 총괄하였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진척이 상당한 것 같았다.
“부역하는 이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고 있겠지?”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매일매일 새참을 마련해 주고 있고 나름 임금이라는 것도 지급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법을 어겨 감형하는 조건으로 공사에 참여하게 된 죄수들의 경우 임금 없이 새참만 지급해 주었습니다.”
“초기에는 죄수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노동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이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