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38화 (238/345)

# 238

‘쪽바리, 쪽바리’ 하던 김성근도 마음 한편이 찡해지는 기분을 느꼈는지 이 같은 말을 하였다.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져서 군량이 어느 정도 남을 것 같은데, 백성들에게 조금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구휼미를 풀라는 건가?”

“어차피 진화군과의 전쟁도 곧 있으면 끝나지 않습니까?”

현재 규슈 북부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다.

하지만 호영이 남부에 주둔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진화군의 수장 진화가 무의미하게 결사 항전하고 있을 뿐, 전쟁이 곧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본국에서도 되도록 구휼미를 풀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다. 큰돈을 들여 구휼미를 푸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아예 없애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구휼미를 베풀라고?”

물고기를 주기보다 낚시를 가르치라는 말이 있듯, 대한국에서는 구휼미를 베풀기보다 흉년이 아예 오지 않게끔 홍수나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제반 시설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구휼미 같은 경우는 처음 베풀었을 때는 민심이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호의가 권리가 되어, 나중에는 구휼미를 베풀지 않으면 오히려 욕먹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구휼미를 베푸는 것보다 보나 저수지를 만드는 등 다른 방식으로 민생 정책을 펼치는 것이 좋았다.

재작년에는 어쩔 수 없이 군량미를 풀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규슈의 백성들은 나중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당장 굶어 죽을 것입니다.”

“흠.”

구휼미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호영에게 김성근이 계속 설득하였다. 그러자 호영도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한국이 일본 백성들에게 호구로 보이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을 계속 점거할 수 있을 테니까.’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이미 한 번 반란을 통해 통치자를 바꿔 본 경험이 있는 일본 백성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국에게서 식량을 얻어 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였다.

만약에 공화정의 국가라면 백성들이 그 같은 착각을 해도 상관없겠지만 대한국은 일본과 다를 게 없는 군주제의 나라였다.

군주제의 나라에서 백성들이 통치자를 우습게 여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나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통치자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우습게 여기게끔 하느니, 10만이 죽든 20만이 죽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나았다.

그가 지금까지 구휼미를 베풀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성근의 계속된 설득에 조금씩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인구수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공짜로 베풀어 주는 것만 아니라면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는 일도 없을 거고.’

만약 규슈 백성들이 대한국에 적대감을 보이거나 불순한 행동을 하였다면 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규슈 백성들은 고분고분하였다. 일종의 환곡처럼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형태라면 구휼미를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구휼미를 베푸는 것으로 하지.”

“흐흐! 역시 전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호영의 대답에 김성근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경이 일본 백성들을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경은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

“이제 와서 측은지심이 생긴 것은 아닐 테고.”

김성근은 호영의 추궁 섞인 말에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여자 때문인가?”

“예? 아닙니다. 여자 때문이라니. 하하하하! 전하께서 소장을 너무 안 좋게만 보시는 거 아닙니까? 소장은 그저 일본 백성들의 충성심과 복종심이 갸륵하여 그 충성심에 보답하려는 차원에서 말을 꺼낸 것일 뿐입니다.”

“정답인가 보군.”

“그, 그것이······.”

“미나코라는 여인인가?”

“흠흠! 저에게 부탁하더군요, 가엾은 백성들 좀 보살펴 달라고.”

“남부에서 널리 알려질 정도의 미녀라고 하던데, 설마 강간하지는 않았겠지?”

“아니, 전하께서는 저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저 김성근입니다, 김성근! 저 같은 남자가 강간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슴을 팍팍 치며 얼굴을 붉히는 김성근을 보며 호영은 피식 웃었다.

“여자를 워낙 밝혀야지.”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밝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21세기에 영웅호색이라니.

누가 ‘만인적 장비’ 아니랄까 봐, 사고방식도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호영은 고개를 젓고는 친위대에서 참모를 담당하는 대원들에게 명했다.

“친위대가 3개월 동안 먹을 군량을 제외하고 전부 환곡제도를 운영하여 빈농들에게 풀 것이니 중앙 지휘 본부에 통보하여 이를 담당할 행정 기구 및 행정 체제를 준비해 놓도록. 시간은 일주일 주겠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호영은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실행에 옮겼다.

수하들로 하여금 환곡제도를 준비케 한 것이다.

“대한국 만세! 국왕 전하 만세!”

“만수무강하십시오, 국왕 전하!”

일주일이 지나 마침내 환곡제도를 실행하자, 일본 백성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호영을 찬양하였다.

공짜로 준 것도 아니고 저리로 빌려준 것이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당장 굶어 죽을 판국에 빌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호영이 너무도 쉽게 남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을 때, 마침 북부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진화군이 마침내 투항했습니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화가 죽었다고 합니다. 진화의 목을 벤 용병들이 그저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마침내 규슈, 아니 일본이 통일되었습니다!”

참모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잇달아 보고하였다.

호영은 그런 보고를 듣고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일본이 통일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볼 수 있었던 전쟁.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판단했던 일본과의 전쟁은 결국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 * *

호영은 진화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자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친위대와 함께 잔당 소탕에 나선 것이다.

그가 나서자 성에서 버티고 있던 규슈 영주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패퇴한 상태에서, 반란군과의 전투까지 겹치자 규슈 영주들의 곁에는 기껏해 봐야 삼백 명 정도의 병력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삼백 명 정도로는 호영의 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남부의 잔당을 소탕한 호영은 다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중앙군이 놓친 잔당을 소탕하기 위함인데 제나라 용병들과 규슈 영주들은 위아래로 좁혀 오는 중앙군과 친위대의 진군에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모조리 투항한 것이다.

그렇게 잔당이 소탕되니 치안이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만약 대한국이었으면 외세의 침략군에 저항하기 위해 백성들이 들고일어났겠지만 일본에는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대한국의 군대가 보이면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국의 군대를 대하듯 크게 환영해 주었다.

“치안은 이제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행정만 바로잡으면 되겠군요.”

잔당 소탕을 끝마치고 다시 규슈 북부로 돌아오니, 충구가 마침 2만 명을 데리고 기타규슈에 상륙하였다.

규슈의 행정을 책임질 관리들을 데려온 것이다.

“관리들의 교육은 잘되었나?”

“2년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관리들은 전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 보지.”

당연하겠지만 정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무력으로 적의 땅을 빼앗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완전한 정복은 칼이 아닌 펜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 있듯, 우수한 행정 체계를 갖추어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지만 진정한 정복이 가능하였다.

호영이 관리들의 교육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규슈를 진정한 대한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관리들이 어떤 소양과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는 무척이나 중요하였으니 말이다.

“참고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유저들도 오백 명이나 데려왔습니다.”

“그래?”

“어차피 일본의 경우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만 해결되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근데 언어에 대한 대책은 세워 놨나?”

“혼슈에서도 계속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학교를 만드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학교이겠군.”

“예,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 일본어로만 대화가 가능했던 것처럼, 한국어로만 대화가 가능하게 만든다면 규슈의 지식인들은 전부 한국어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인이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규슈 백성들 전체가 한국어를 사용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그의 말처럼 언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학교를 세워 전문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결 방법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학교를 세워 한국어를 가르치겠다는 의견은 내가 생각해도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백성들이 무언가를 배우게 되면 신분제를 타파하려고 한다든가, 독립군을 만들려 들지 않을까?”

“규슈 백성들은 딱히 민족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서 독립군 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혼슈에서 일본 해방 전선이라는 조직이 나타났는데도?”

일본이 한국에 지배당하기 시작하자 애국심이 넘치는 일본인들이 대거 본 게임으로 넘어왔다.

그러고선 일본 해방 전선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독립 투쟁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혼슈는 그들 때문에 아직도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해방 전선은 유저들이 만든 단체이지 않습니까? 일반 NPC의 참여도는 거의 0퍼센트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

“NPC들은 지금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독립군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러니 오히려 우리가 직접 학교를 세워 소속감과 일체감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NPC들은 지금 흰색 도화지와 다를 게 없으니 우리가 무언가를 주입하면 주입하는 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게 사상이든, 국가관이든, 아니면 민족관이든 말입니다.”

그 말에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음 회 차를 기대하면 되겠나?”

“100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저들도 한국어를 익히는 게 대세라는데 NPC들까지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문화를 배우면 이후에도 계속 한국의 영토로 남기는 하겠어.”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음 회 차에도 일본이 한국의 영토로 남아 있을지 걱정하였는데, 학교를 세워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한국의 영토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언어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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