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36화 (236/345)

# 236

중앙군과 보급 물품이 아직 하선을 끝마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앙군의 역할과 친위대의 역할은 따로 있었다.

보급 물품의 경우야 현지 수급을 하면 그만이고 말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규슈를 정복하리라.’

호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그 같은 다짐을 하였다.

* * *

규슈의 영주들은 대한국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였다.

대한국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고 군을 합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오이타를 장악한 왕전군이 규슈 동맹군에 합류하는 척하다가 남하하던 친위대에게 매복 공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공격해라!”

“말부터 노려!”

“왕이 있다! 왕을 죽여라!”

호영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최적의 장소와 최적의 타이밍에서 일어난 매복지계였다.

적군의 엄폐 실력도 대단했고 병력 배치도 요소요소 잘 배치되어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도 무척 많았는데 궁병 비율이 상당히 높았던 것 같았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군대라면 크게 당할 수밖에 없겠군. 보아 하니 전진해 봤자 길목이 막혀 있을 거고 후퇴하면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니 말이야.’

정말 예상치 못한 매복이었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신속하게 동맹군을 결성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렇게 따로 군을 운용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규슈 남부의 유일한 중국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영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찌 되었건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호영의 군대가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위대는 절대 평범한 군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강력했던 정예였는데 실전을 거치면서 더욱 완벽해졌고 지난 전쟁에서 중앙군의 최정예들을 끌어들여 숫자까지 늘린 상태였다.

호영이 확신하건대 그의 친위대는 세상 그 어떤 군대보다 강력할 것이다.

“하마해서 적군을 사살해라!”

“충!”

날아오는 화살을 창으로 튕겨 내거나 방패로 막아 내던 친위대원들이 호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에서 내리고는 매복이 펼쳐지고 있는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수의 인원만이 자리에 남아 말들을 지켰는데 호영은 당연히 산 위로 올라가는 쪽이었다.

“돌격!”

“저놈이 왕이다! 왕을 죽여라!”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제나라 용병들이 호영을 가리키며 달려들었다.

시계가 제한되어 숫자 파악은 어려웠지만 최소 6천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위치도 불리하고 숫자에서도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호영은 개의치 않았다.

단순 무식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면 기책 따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법이었다.

부우웅! 부우웅!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군을 창풍으로 밀어낸 호영은 적장을 찾기 시작하였다.

“뭐, 뭣들 하느냐! 이놈이 왕이다······ 크헉!”

서걱!

목소리를 높이던 적 지휘관을 베었지만 사기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적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영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장이 도망친다!”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어!”

그때 적군이 한쪽을 바라보며 소란을 피웠다.

적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수십의 사내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저기에 왕전이라는 자가 있는 건가?’

적군이 한국어를 사용했다면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텐데, 중국어를 사용하는 터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영은 경험이라는 것이 많았기에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소수의 무리가 적장이거나 지휘부에 소속되어 있는 주요 인물이라는 것은 눈치챘다.

파바박!

적을 수백 죽이는 것보다 적장을 죽이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호영은 주저 없이 적장을 추격하였다.

“함정이라면 함정에 도착하기 전에 끝장내 주마.”

풍운보를 극성으로 전개한 호영의 신형이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훌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독하리만치 실전적인 보법답게 산악 지형에서도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왕전이라는 놈이냐?”

“히이익!”

순식간에 도망치던 무리를 앞지른 호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상대측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귀신처럼 등장한 호영을 보고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왕전이냐고 물었다.”

“마, 맞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라.”

말이 통한다는 게 의외였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살려 주십시오! 투항하겠습니다!”

“내가 왜 살려 줘야 하지?”

“대한국은 항장에게 관대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항장에게 관대하다고 해도 배신자들에게까지 관대하지는 않다.”

“저, 저를 살려 주면 당장 병사들을 항복시키겠습니다!”

“너의 수급을 들고 가는 게 더 확실하다.”

“······.”

“더 할 말 없으면 이제 그만 죽어라.”

“너나 죽어!”

비굴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표독한 얼굴이 된 왕전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영악한 놈이로군.”

호영은 그런 왕전의 변화에 미소를 지었다.

공격 명령을 내려놓고 정작 자신은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영악하고 비겁하며 생존 욕구가 대단한 놈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런 놈들이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B급은 되어 보이는 무인이 두 명 정도 있었다.

여기에 C+ 경지의 무인이 열 명이었다.

4회 차 기준으로는 나름 실력자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A+ 경지의 무인이었다.

지금 시대에서는 거의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것이다.

1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수십의 무인들을 베어 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30초였다.

그리고 왕전을 추격하는 데 걸린 시간이 30초였다.

겨우 1분 만에 수십의 무인을 처리하고 경공을 사용하여 도주하던 왕전까지 추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무엇을 믿고 뛰어가나 했더니 화공을 준비하고 있었나?”

“······.”

“자신의 군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잡으려 했던 것이군. 군대가 소멸되면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왜 그렇게까지 했지?”

“너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뭐?”

“너만 죽이면 나는 중화의 영웅이 된다! 성삼 그룹에게서 돈까지 받게 될 테지! 병사들이나 아바타의 목숨이 아까울 리가 없잖아!”

“그렇군.”

악을 쓰며 외치는 왕전을 보며 호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규슈 동맹군과 함께하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무슨 희생정신이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라 호영의 목숨을 노리고 그랬던 것이다.

‘나의 목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겠지?’

호영은 턱을 쓰다듬었다. 규슈 동맹군을 묶어 둘 수 있는 작전이 생각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것은 잠시뿐이었다.

서걱!

눈을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 왕전에게 창을 휘둘렀다.

용병대장치고 무력이 낮은 편에 속하는 왕전은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전이 죽었다! 적군은 투항하라!”

호영은 왕전의 목을 들어 올리고는 아직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향해 그리 외쳤다.

그러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친위대원들이 ‘왕전이 죽었다!’를 따라 외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적군은 왕전의 죽음에 전의를 상실했다.

“투, 투항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용병답게 태세 전환 속도가 엄청났다.

죽거나 도망친 이들을 제외한 5천 명의 용병들이 전부 투항한 것이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김성근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호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은 후속 정리를 하고 따라오도록.”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먼저 출발할 것이니 천천히 따라오라는 말이다.”

뜬금없는 호영의 말에 김성근이 콧김을 뿜어냈다.

“아니! 혼자 재미 보신다는 말입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소장도 데려가 주십시오!”

다른 이였다면 ‘위험하다.’, ‘체통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을 하며 말렸을 것인데 김성근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경의 이름값이 나보다 낮은데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 이유 때문에 소장은 안 되고 전하는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적을 유인하려면 그만큼 이름값이 높아야 하니까.”

“인터넷에서 제가 얼마나 화제가 되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모두가 저를 ‘만인적 장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그렇지. 여기는 일본이고.”

“크흑, 내 인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됐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대원들을 지휘할 시간에 쪽바리 놈들을 학살했어야 했나 봅니다.”

언제 봐도 우습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호영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저, 정말 가십니까!”

“대원들을 잘 부탁한다.”

다그닥, 다그닥!

단 혼자서 적지로 떠나는 호영의 뒷모습을 보며 김성근은 입맛을 다셨고 대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왕이 호위도 없이 적지로 떠나가고 있었지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김성근처럼 호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 * *

“내가 바로 대한국의 왕이다!”

일기필마로 달려드는 호영의 모습을 보고 구마모토의 가토군은 그저 우습게만 생각했다.

왕이라는 것도 황당할 따름인데 혼자서 2천의 병사들을 향해 덤벼들다니.

“미쳤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도, 도대체 경지가 어느 정도 되어야 이런 일이 가능한 거야?”

“무신이다! 저놈이 바로 조선의 무신이야!”

하지만 호영의 무공을 보고 가토군은 경악하고 말았다.

창 한 번 휘두르면 수십이 나가떨어졌고, 창풍을 일으키면 최소 다섯 명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무력이 아닐 수 없었다.

1회 차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거인을 상대하는 것도 이 정도로 절망스럽지는 않았으리라.

결국 가토군은 단 한 명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지휘관이 모두 죽어 버리니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조선의 왕을 무시하고 진화군을 지원해야 하오. 진화군이 무너진다면 적의 대군이 어디를 노리겠소?”

“무슨 소리! 눈앞에 조선의 왕이 있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의 왕만 잡으면 끝나는 전쟁,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떻게 조선의 왕을 잡는다는 것이오! 소수의 무리로 쫓으면 역으로 당하게 되고 대군으로 쫓으면 따라잡을 수가 없는데!”

“사무라이들이 고작 한 명도 어쩔 수 없다니! 우리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안 될 일이오! 조선의 왕이 수작을 부리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오!”

“시끄럽다! 정 나의 말에 따라 주지 않겠다면 나 혼자 조선의 왕을 잡겠다!”

“군대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오! 우리는 뭉치지 않으면 조선을 이길 수 없소!”

“이 겁쟁이 같은 것이!”

“뭐요? 이 사람이 지금 말이면 단 줄 아오?”

2천에 달하는 가토군이 호영에게 패퇴하자 규슈 동맹군의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다.

규슈 북부를 지원해서 중앙군을 대적해야 할지, 아니면 규슈 남부를 종횡무진 하는 대한국의 국왕을 잡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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