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35화 (235/345)

# 235

거의 노예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영지를 보존해 주지 않는다면 규슈의 영주들은 끝까지 항전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규슈 백성들의 피해가 커질 것입니다. 어쩌면 규슈 영주들이 자신들의 백성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원칙을 지키려면 감안해야 할 일이다.”

호영이 극렬한 원칙 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원칙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전쟁 원칙은 꼭 지켜야 할 원칙이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작전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충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일단, 소마군을 무찌르고 후쿠오카를 장악하는 것까진 그대로입니다. 중앙군을 서진시키는 것 또한 그대로고 말입니다.”

“달라진 게 뭐지?”

“원래 세웠던 계획은 진화군까지 빠르게 무찌르고서 남쪽에 있는 규슈의 영주들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다면······ 이번에는 소수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중앙군이 진화군을 무찌를 때까지 남쪽의 영주들을 묶어 두는 것입니다.”

“소수의 강력한 군대라······. 당장 생각나는 부대는 하나밖에 없군······. 그런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 군대를 나눌 필요 없이 진화군을 빠르게 무찌르고 남쪽의 영주들을 각개격파 하면 되잖아.”

“만약 전하께서 규슈 영주들의 투항을 받아 주신다면 아군이 진화군을 무찌를 때까지 외교적 협상으로 규슈의 영주들을 남쪽에 묶어 두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전하께서는 규슈 영주들의 투항을 받아 주실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투항을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영주들 입장에서는 권력과 부를 보전해 주지 않는다면 투항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진화군을 무찌를 때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습니다. 진화군과 전쟁하는 동안 규슈의 영주들이 북진하면 곤란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하기야 규슈 영주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소마군이 전멸하고 진화군까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북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이전까지는 서로 적이었다 해도 대한국이 침공한 상황에서는 결국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별동대의 역할이 중요하겠군.”

“물론입니다. 5천 이하의 소수 병력으로 5만에서 7만가량의 적군을 묶어 둬야 하니,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천으로 10배가 넘는 병력을 붙잡아야 한다니. 실로 어려운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동대의 숫자를 늘릴 수도 없었다.

원정군의 수효는 5만으로 정해져 있었고 진화군을 빠르게 무찌르기 위해서는 최소 4만 이상은 필요하였다.

결국 별동대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정도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정군의 숫자를 늘리거나 진화군을 담당하는 병력의 숫자를 줄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 원정군의 숫자를 늘릴 만한 방도를 찾기는 어려웠다.

징집병이야 무공이 존재하는 시대에 크게 의미가 없었고, 용병 같은 경우는 규슈로 데려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슈에 있는 귀족들의 사병을 동원하기에는 그들에게 더 이상 나누어 줄 영토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원정군을 늘리려면 본국의 병력을 끌어오는 게 유일한 방법인데 벌써 5만이나 끌어온 터라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결국 원정군의 숫자를 늘릴 방도는 없다고 봐야 했다.

진화군을 상대할 병사의 숫자를 줄이는 방법 또한 찾기 어려웠다.

앞서 말했듯 진화군을 빠르게 섬멸하려면 숫자로 압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진화군을 상대하는 병력만 최소 4만은 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대라면 하나밖에 없겠군. 이번에도 친위대가 나서야겠어.”

“친위대만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한 기분입니다.”

“게네들은 고생해도 돼. 그러라고 그 많은 혜택을 쥐여 주는 것이니 말이야.”

충구가 민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호영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군사인 충구 입장에서야 그럴듯한 전략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닌, 친위대라는 특수한 군대에 의존하는 형태로 적을 무찌르니 민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영의 생각은 달랐다.

‘친위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패라면 쓰는 게 맞다. 전략이야 정공법처럼 단순해지겠지만 어쨌든 가장 효과적이니까.’

애초에 무공과 마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병법이나 전술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수백 명이 수만 명을 무찌르는 기적 같은 승리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호영은 충구의 전략에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충구가 역사에서 등장하는 위대한 전략가들처럼 획기적인 전술이나 전략을 사용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전술과 전략을 사용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친위대에 의존하는 전략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호영이 보기에 충구는 친위대의 전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친위대라면 10배 이상의 적군을 막아 내는 게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는 게 좋겠군.”

“예? 전하께서 또다시 친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초인이 가지 못하니 나라도 가야지. A+급 무인을 후방에 배치하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큰 손해이자 낭비이니 말이야.”

“······하지만 전하는 이 나라의 국왕이십니다.”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는 폭군이기도 하지.”

호영의 말에 충구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전하께서는 죽기 위해 친정하시려는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다. 단지, 이 아바타가 전장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리 아까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당혹해하는 충구를 보며 호영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니 말이야.”

적어도 4회 차까지는 그럴 것이다.

5회 차부터는 A-를 넘어선 A 또는 A+랭크의 무인이 등장할 것이니 말이다.

“후우, 전하께서 참전해 주신다면 확실히 승리는 쉬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내 내가 친정한다는 가정을 하고 작전을 짜도록.”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군사부를 소집하여 완벽한 작전을 구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충구가 작전을 구상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 홀로 남은 호영은 작게 중얼거렸다.

‘연왕을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군.’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평가받는 연왕.

어쩌면 그는 전장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폭군을 믿고 맡기기에 1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후계자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죽는다면 한창 팽창해 나가던 대한국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후계자 검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세자를 뽑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후우, 지금은 일단 전쟁에만 집중하는 게 맞는 일이다. 백년대계를 설계하려면 규슈를 하루라도 빨리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때 일본 제국의 백성이었던 교토 시민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길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암울함이 가득하였던 작년과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분위기였다.

* * *

“네가 우두머리인가?”

“마, 말도 안 돼! 도대체 혼자서 몇 명을 쓰러뜨린 거야!”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기타규슈에 상륙하자마자 맞이하게 된 적군을 순식간에 격멸시킨 호영은 적장으로 보이는 이를 사로잡았다.

19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한이었는데 담력이 세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얼굴은 두려움으로 퍼렇게 질려 있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호영은 그런 거한의 모습을 보고 조소를 흘리고는 통역을 불렀다.

“이자의 이름이 뭐지?”

“소마군에서 이인자라 할 정도로 강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무린이라는 자입니다.”

“고작 이런 놈이 이인자라니, 소마군에는 한심한 자들만 모인 것인가.”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무린이라는 자가 바로 그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었다.

기타규슈에서 주둔하고 있었으니 대한국의 상륙을 경계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을 텐데 무린은 술에 취한 채 골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당연히 대한국의 상륙을 저지하기는커녕 야습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5천에 달하는 군대가 순식간에 전멸당한 것은 이야기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무린은 규슈 전역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입니다. 무공 수준도 절정에 달하고 통솔력도 비범한 편에 속합니다.”

“그래? 이런 자가 그렇게 후한 평을 받았다니. 그렇다면 이번 전쟁도 크게 어렵지 않겠구나.”

방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워낙 형편없는 적을 만나게 되니 저도 모르게 방심하게 될 것 같았다.

억지로 경계심을 끌어 올린 호영은 통역에게 말했다.

“소마군의 이인자가 여기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소마가 아국의 침공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예, 5천이나 되는 병력을 주둔시킨 것도 대한국의 상륙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침공했다는 사실을 소마도 이미 알고 있겠군.”

“전령도 전령이지만 이미 현실에서 연락이 닿았을 겁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성근을 불렀다.

“친위대장, 대원들에게 출정 준비를 지시하여라.”

“어디로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소마군이나 진화군은 중앙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남진한다.”

“우리만으로 남쪽에 있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입니까?”

김성근이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 전쟁도 전격전이라 할 수 있다. 느릿한 중앙군을 끌고 다녀서는 각개격파를 시도할 수 없어.”

“흐흐, 그렇습니까? 하긴, 쪽바리 따위야 친위대만으로 충분할 것 같기는 합니다.”

애써 진중한 모습을 연기하였던 김성근이지만 흥분하니 본래의 모습이 나왔다.

역시나 전쟁광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호영은 픽 웃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때는 교역지로서 제법 번창한 곳이라 들었는데 지금은 마치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규슈 전역이 이곳과 크게 다를 게 없겠지.’

만약 호영이 도덕적이고 이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씁쓸함을 넘어 비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규슈가 산지옥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호영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기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아니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연민, 안타까움, 비통함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말에 올라탔다.

김성근은 그런 호영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호영을 따라 말에 올라타고는 대원들에게 외쳤다.

“집합!”

집합을 외치기 무섭게 사방에 흩어져 있던 친위대 대원들이 열을 갖춘 채 집결하기 시작했다.

친위대가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다 모였나?”

“예!”

“그럼 가자.”

호영은 그대로 출정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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