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34화 (234/345)

# 234

제나라 용병들이나 규슈 영주들이나 하나같이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애초에 규슈만으로 20만이라는 대군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실 20만은커녕 10만도 유지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는데, 20만이 서로 전쟁까지 치러 가며 긴 시간 동안 동원되니 식량이 남아돌 리가 없었다.

“대장님!”

“또 뭐냐?”

“영포 대장의 사신이 왔는데······ 식량 좀 빌려 달라고 합니다.”

진화는 답답한 듯 얼굴을 감싸 쥐다가 힘겹게 말문을 뗐다.

“우리도 식량이 없는데 빌려줄 식량이 어디 있겠느냐? 그보다 두 달 전에 빌려주었던 식량이나 갚으라고 전해라.”

가능하면 그 역시 동료를 도와주고 싶었다. 대한국이라는 공공의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동맹의 힘이 약화되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제 앞가림 하기도 바쁜 판국에 동맹을 도와주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안 주면 공격하겠답니다.”

“뭐라고? 이 멍청한 멧돼지가 뭐 하자는 거야!”

부하의 말에 진화는 분노하였다.

가장 우호적이었던 동맹까지 자신을 도발하는 상황이 오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노한 것도 잠시, 진화는 끓어오르던 분노를 삭이고는 탄식하였다.

‘틀렸다. 완전히 당해 버렸어. 대한국은 손도 안 쓰고 우리를 처리하고 있어.’

용병대장, 영포가 제아무리 단순 무식한 성격이라 해도 아군을 공격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란 식량뿐이었다.

즉, 싸우지 않으면 고사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대한국에 투항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규슈를 통일해 버리는 것.”

진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하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말라 죽을 게 분명하니 둘 중 한 가지는 선택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한국에 투항하고 싶은데······ 문제는 그들이 나의 투항을 받아 줄 것이냐다.’

대한국이 항장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한 나라라는 사실은 진화도 알고 있었다.

작위를 하사받은 항장들의 숫자만 열 명이 넘었고, 이들 중에는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세력보다 작위가 된 이후에 거느리게 된 세력이 더 커진 경우도 존재하였다.

만약 진화가 일본군 장수였다면 그 역시 작위를 받거나 아니면 금전적인 포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나라 용병으로서 대한국을 배신한 전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항장에게 관대하다지만 배신자에게까지 관대할 수는 없을 터.

결국 진화는 대한국에 투항하는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한국에 항복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규슈를 통일하는 것.’

진화는 내키지 않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규슈를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규슈를 그가 통일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 제기되는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식량의 경우 규슈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적을 죽이고 적의 것을 약탈하다 보면 어떻게든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한국의 위협 또한 규슈를 통일하기만 한다면 막아 내는 게 가능해진다.

‘통일 과정에서 최대 10만이 죽는다고 해도 남은 군사 수가 10만이다. 이 정도면 영지전 때문에 귀족들을 동원할 수 없는 대한국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어.’

사실 규슈 세력가들은 전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한국은 마치 규슈를 포기할 것처럼 귀족들의 사병을 전부 해산시켰는데, 남아 있는 군사 수는 고작해야 5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조차 규슈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 인근에 주둔해 있었고 말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규슈 세력가들은 대한국의 공세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서로 전쟁을 일삼고 있었다.

세력가 중에서 진화만이 대한국의 ‘고사 작전’임을 눈치챘는데 그 역시 규슈를 통일하기만 한다면 대한국을 막아 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규슈의 저력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영포와 싸우는 겁니까?”

“그래. 은인을 겁박하는데 봐줄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병사들에게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화는 그렇게 규슈의 다른 세력가들처럼 정전협정을 모조리 파기하고 동맹이었던 아군 세력을 공격하였다.

‘최대한 빨리 규슈를 통일하여 대한국을 막아 내리라.’

#전쟁을 끝내다

호영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규슈 전역이 산지옥이 되어 버렸군.”

“전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은 괜찮은가?”

“어떤 게 말입니까?”

“영주들의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어. 그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죽인 것과 다름없지. 경은 백성들이 피해 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텐데?”

그 말에 충구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답했다.

“아직 우리의 백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백성이 되기는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피해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렇군.”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답변일 수 있었다.

자국의 백성이 아니라면 피해가 얼마나 되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는 이제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대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머리를 담당하는 이였다.

야만의 시대에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냉철한 심장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제국주의자들과 크게 다를 게 없지.’

호영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때 충구가 말했다.

“물론 더 이상의 피해는 막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지금이 출정해야 할 때라는 건가?”

“소신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기다릴수록 적들의 힘이 약해질 텐데?”

서로 죽고 죽이며 치열한 내전을 이어 가고 있는 규슈였다.

계속된 내전으로 불과 몇 개월 사이에 20만에 달했던 대군이 12만으로 확 줄어들었다.

거의 절반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피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즉, 대한국은 가만히만 있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충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전후 수습이 너무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규슈의 인구가 벌써 10퍼센트 가까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하긴, 전후 수습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규슈 정복을 끝내는 게 좋기는 하겠지.”

결국에는 대한국의 땅이 될 규슈였다.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규슈라는 땅을 온전히 가지려면 이제 슬슬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규슈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규슈를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게 좋을까?”

“우선은 간몬해협을 건너 기타큐슈로 상륙해야겠죠. 물론 규슈의 영주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라는 것은 그들이 뭉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거겠지?”

“예, 규슈의 군세가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우리 군보다 2배 이상 많으니 최대한 각개격파를 노리는 게 좋습니다.”

호영은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도적인 군세를 가졌다면야 대회전으로 한 번에 쓸어 내는 것이 좋았겠지만 그가 동원할 군세는 고작해야 5만에 불과하였다.

5만으로 10만 이상의 적군을 한 번에 상대하느니 충구의 의견처럼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게 훨씬 나았다.

“후쿠오카를 장악한 것이 소마군이었다고 했던가? 그들의 군세가 어느 정도라고 했지?”

“소마군의 총병력은 2만 명 정도로, 대부분이 제나라 용병 출신입니다.”

“2만 명이라면 빠르게 섬멸할 수 있겠군. 그렇다면 소마군을 섬멸한 이후에는 어디를 노리는 게 좋을까?”

“서진하여 진화군을 노려야 합니다.”

진화군은 사가, 나가사키, 후쿠오카 일부를 점유한 세력으로 보유하고 있는 군사 수는 무려 3만에 달했다.

“제나라 용병 부대들만 먼저 노리는 이유가 따로 있나?”

“용병들은 자신들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알기에 전황이 악화되어도 투항하지 않겠지만 일본 영주들은 전황이 악화되면 곧장 투항할 것입니다. 대한국은 항장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투항을 받아 줄 생각이 없다.”

“예?”

“규슈의 영주들이 항복한다고 해도 나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혼슈와 달리 규슈는 온전한 대한국의 땅이 될 것이다. 즉, 직할령으로 둘 것이라는 뜻이지. 영주들이 항복해도 그들의 땅을 보존해 줄 수가 없으니 투항을 받아 줄 수도 없다.”

호영은 혼슈 주변의 섬을 전부 대한국의 직할령으로 두고자 하였다.

머나먼 미래에 영지전으로 세력을 크게 키운 이가 나타나도 혼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혼슈를 가두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규슈 역시 홋카이도, 시코쿠처럼 직할령이 되어야 했다.

“그런 문제라면 혼슈에 있는 영지로 바꿔 주면 되지 않습니까? 동북부에 빈 영지가 많으니 그들에게 하사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귀족들에게 영지를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 주었는지는 경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규슈 영주들에게 추가로 영토를 하사한다면 균형추가 무너지게 될 거야.”

귀족들에게 하사된 영지들은 힘의 균형이 맞추어지게끔 정확하게 삼분할 된 상태였다.

즉, 세 개의 세력이 똑같은 크기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한쪽에게 새로운 영지를 하사하면 균형의 추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만 4회 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균형을 유지해야 해. 그래야 변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추어지고 있었다.

일본 군주였던 이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하였지만 동북부 연합군 출신의 귀족과 중앙군 장수 출신의 귀족이 적절하게 협력하여 잘 막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이가 존재한다 해도 1년 안에 균형의 추를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할 터.

하지만 규슈 출신의 영주들이 이 판에 새로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항장 출신들이 세를 떨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규슈 영주들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규슈의 영주들은 투항을 한 번 거절한 전적이 있는 자들이다. 우리 군의 원칙은, 한 번 투항을 거부한 자들은 절대 대우해 주지 않는다는 거야. 즉, 규슈의 영주들이 투항한다면 영지는커녕 돈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지.”

대한국은 작년에 혼슈와 시코쿠 정복이 끝난 이후, 규슈의 영주들로 하여금 항복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규슈의 영주들은 단호하게 투항을 거부하였고 지금까지 계속 결사 항전을 고집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한국이 귀순자들에게 관대하다고 해도 투항을 거부한 자들에게까지 관대하지는 않았다.

투항한 자들을 굳이 죽이지는 않겠지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투항하는 자들이나 이미 한 번 투항을 거부했던 자들의 경우는 다른 나라들이 포로를 대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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