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사실 지금까지 호영에게 무리한 주문을 해 왔던 쪽은 충구였다.
허영만과 달리 충구의 작전이나 계획은 다소 파격적인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충구는 결코 자신이 무리한다거나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파격적이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작전조차 충구에게는 이미 치밀한 검증이 완료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치밀한 구석이 있는 충구가 보기에 5만의 병력으로 규슈를 점령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모한 행동이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호영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5만으로 지금 당장 쳐들어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아, 본토의 병력을 더 데려오실 생각입니까?”
일본과 다르게 대한국은 여력이 상당하여 병력을 추가로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본국에서 5만에 달하는 병력을 새로 징집하여 훈련시키고 있었고 말이다.
신병과 정예병의 전투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큰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정예병이 맡고 있는 후방 보급이나 점령지의 치안 관리만 대신 해 주어도 작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충구의 물음에 호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경이 아까 말했잖아. 규슈는 지금 인세의 지옥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오시면?”
“제나라 용병들이나 규슈의 영주들이나 지금 당장이야 대한국이라는 공공의 적 때문에 정전협정을 맺었겠지만 식량이 부족해진다면 다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을 거야.”
“즉, 상대가 자멸하기를 기다리자는 것이군요.”
“이른바 고사 작전이라 할 수 있지.”
충구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마음에 들지 않나?”
“괜찮은 작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게 단점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항장 출신의 일본 유저들을 어찌 통제할지도 걱정이고 말입니다.”
“시간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항장들은 왜?”
“지금 그들이 사고를 치지 않고 지휘부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규슈에서 공을 세워 더 큰 영지를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규슈를 대한국의 군대만으로 점령한다면 그들은 공을 세울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군.”
확실히, 우습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투항한 일본군이 대한국의 통제에 적극적으로 따라 주고 있었지만 전쟁이 멈추는 순간 그들이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전국시대가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을 통일하였지만 조선을 침공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각각 수천에서 수만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항장들이다.
전쟁에서 그들의 힘이 소모되지 않는 한, 그들은 끝없이 야욕을 부릴 것이다.
호영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일단은 논공행상을 열어 영지와 작위를 정해 준다. 아군 장수들이든, 중간에 항복한 일본 장수들이든 그리고 동북부 연합군에 소속된 일본 유저들 간에 말이야.”
“분명 불만을 품은 자들이 존재할 겁니다.”
“안다. 그래서 영지와 작위를 정하고 난 이후에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려고 한다.”
“설마 대륙 진출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충구가 눈을 빛내며 그렇게 물었다.
전쟁이 사라져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면 해결 방법은 아주 간단하였다.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점령함으로써 남진이 완료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북진, 즉 대륙 진출밖에 없었다.
“대륙 진출?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주 정도면 지금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아직 규슈가 남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일본 정복은 거의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무려 50만의 군사력이 존재한다고 알려진 일본을 정복한 것이다.
그 말은 대한국이 50만의 군사력을 흡수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에 많은 군사들이 죽었고 규슈의 10만까지 제외하면 이제 30만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만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는 몇 개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인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닌 만주에서는 30만은커녕 10만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령성의 세 나라만이 각각 7~8만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륙은 아직 이르다.”
하지만 호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륙 진출을 반대하였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항장들을 믿고 대륙으로 진출하기에 대륙은 너무 광활하다.”
“그, 그렇군요.”
간단명료한 답변에 충구는 침음을 삼켰다.
대륙에 진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였던 충구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지만, 호영의 지적은 분명 타당성 있는 주장이었다.
일본 정복이 끝났다고 해도 일본인들이 곧바로 대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통제에 따라 주는 척을 해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의 말처럼 일본인들을 데리고 대륙으로 진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그렇습니까? 대륙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사할린입니까? 아니면 대만?”
“사할린도 아니고 대만도 아니다. 애초에 나는 이번 회 차에서 더 이상 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
“······그럼 어떻게 일본인들의 불만을 다스릴 생각입니까?”
“싸우고 싶어 미치겠다는 녀석들이니,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어야지.”
“예?”
충구가 그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호영의 답변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충구를 보며 호영이 말했다.
“영지전을 할 수 있게 만들 거다. 명분이 있고 우리의 말만 잘 따라 준다면 전쟁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거지.”
“하, 하지만 영지전을 허락하면 또다시 위협적인 세력가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일본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든 간에 위협적인 세력가는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영지전을 열어 저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게 나아.”
호영의 말에 충구는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그래서야 일본을 정복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피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영지와 사병을 거느리고 영지전으로 세력까지 키울 수 있다면 우리의 통제에 따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었다. 이래서야 적이었던 일본 세력이 우호적으로 바뀐 것밖에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영의 생각은 달랐다.
“왕의 등급이라는 스킬이 있으니 작위를 내림으로써 영주들을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겠지. 세금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일본이라는 대적을 제거했다는 게 가장 큰 이득이야. 어떻게 보면 이 때문에 일본을 점령했다고 볼 수 있지.”
“전하께서는 애초에 일본에 거는 기대가 크게 없으셨군요.”
“적어도 이번 회 차에서는 그렇다. 나는 일본이라는 맹수를 다스리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거든.”
“다음 회 차에서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그때쯤이면 그들도 알게 될 거니까, 나를 따르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그렇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는 한국의 유저들 대부분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인이라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라도, 사상도, 민족도 아닌 개인의 이익이니까.’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다
호영은 충구에게 논공행상 준비와 영지전의 규칙 수립을 주문하고는 준기를 찾았다.
오래간만에 접속하였으니 준기와 대련을 하여 몸을 풀 생각이었다.
‘경건해 보이는군.’
연무장에 도착하니 검을 든 거한이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왠지 경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수련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기가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눈에서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말 그대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경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호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지만 실력이 이 정도로 상승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이전에는 두 사람의 실력이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과연 실제로는 얼마나 차이 나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내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던 호영은 준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대련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바로 부탁하지.”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파바박!
‘빠르다!’
대련이 시작되기 무섭게 준기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른 보법이었다.
하지만 호영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 역시 ‘풍운보’를 극성으로 전개하여 신형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콰앙!
호영이 풍운보를 전개한 자리는 마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처참하게 터져 있었다.
‘오랜만인데도 정말 인정사정없구나. 뭐, 원래 그런 성격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누구보다 격식을 갖추는 준기지만 대련이 시작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바뀌어 버린다.
콰아앙!
지금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싸운다는 것이다.
호영은 연속으로 이어진 준기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뭐 상대가 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풍운보를 극성으로 전개하여 공격을 회피하는 것뿐.
물론 상대의 공격을 완전히 피해 낸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상대의 공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만 그래 봤자 수준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반격은커녕 창을 마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으니 말이다.
“그만하자.”
결국 호영은 10분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준기를 상대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련을 멈추었다.
마나를 전부 사용해 버렸기에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력이 늘어났군.”
“전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이라니?”
“전하의 아바타가 대련을 해 주어서 실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스텟이 늘어난 게 그 때문이었나.”
준기의 대답에 호영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이 굳어진 것은 여전하였다.
‘내 아바타가 대련해 주었다지만 그래 봐야 두 달이 안 지났는데······.’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재능이었다.
A+의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꾸준히 실력을 상승시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만 정체하고 있는 것 같군. 준기부터 김성근, 황보관, 순현까지 전부 성장하고 있는데 말이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열등감? 질투심? 자괴감?
정확하게 무엇이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가라앉히려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