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17화 (217/345)

# 217

“총사령관이라면 총사령관답게 행동해라. 자리를 지키란 말이다.”

“지랄. 총사령관이라고 다 네놈처럼 엉덩이가 무겁지는 않아.”

“엉덩이가 무거운 게 아니고 체면을 유지하려는 거다.”

“그냥 겁이 많은 거겠지.”

“······.”

빠드득.

도시아키의 뒷모습을 보고 모토나리는 이를 갈았지만 애써 화를 억눌렀다. 지금은 도시아키와 말다툼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적군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막아 내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당황하지 마라! 적군이라고 해 봤자 천 명도 안 되는 게릴라 부대다!”

“하이!”

“나가노군이 적군을 상대하러 갔으니 동영군은 자리를 지켜라! 지금 지원을 가 봤자 혼란만 더 해질 뿐이다!”

“알겠습니다!”

지휘부를 지킨 채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니 어느덧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래도 제법 피해를 보았을 것 같군. 아무래도 게릴라 부대의 무공 실력이 상당한 편이니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모토나리지만 크게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지휘부의 위치가 워낙 좌측에 쏠려 있어 산에서 시작된 기습을 소란스럽게 느낀 것이지, 부대 전체로 따지면 피해는 빙산의 일각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군 규모가 무려 5만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아마 이번 기습에서 입은 피해라고 해 봤자 많아 봐야 1천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가, 각하! 적의 공격입니다!”

“여기서 적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게 아니라 새로운 적입니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모토나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근처까지 다가왔다고? 어떻게?”

설마 한 곳이 뚫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군이 기습을 받고 혼란에 빠질 때 소수의 고수가 잠입한 것 같습니다!”

“소수라면 몇 명이라는 것이냐?”

“다섯 명입니다!”

“······다섯 명이라고?”

“예, 하지만 엄청난 고수들입니다! 지금 지휘부를 노리고 달려오고 있으니 각하께서는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시아키였다면 ‘고작 다섯 명을 두려워 도망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화를 냈겠지만 모토나리는 달랐다.

‘조선 놈들이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는 거구나.’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서 빠르게 지휘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토나리가 지휘부를 벗어나려던 그 순간,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모토나리는 침음을 삼켰다.

조금 방심하기는 했지만 설마 일이 이 지경으로 흘러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천 명도 안 되는 게릴라 부대에게 지휘부가 공격당하다니?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일본의 전쟁사에서도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죽어라.”

정체불명의 사내들, 아니 대한국의 무인들은 어눌한 일본어로 그 같은 선언을 하였다.

서걱! 서걱!

순식간에 참모 수십이 죽임을 당하였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것이다.

‘엄청난 실력이다, 최소 B급을 넘어서는!’

모토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의 실력을 보고서 도망칠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였다.

무력보다는 지력이 출중하여 총사령관이 된 그로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도주할 생각을 포기했을 뿐이지,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4회 차까지 센추리를 플레이 하면서 꽤나 많은 죽음을 겪었다.

새삼스레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다만 모토나리는 깊은 의문을 느꼈다.

“이런 고수들이 어째서 지휘부를 노리는 거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절반 이상은 죽을 수밖에 없을 텐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두터운 진열을 갖춘 채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B급 이상의 초고수를 상대할 때 흔히 사용하는 포위 섬멸진이었다.

대한국의 고수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저 포위 섬멸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다섯 명 중에서 두 명 정도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정도의 고수들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죽이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뭐라고? 국왕 전하라면 모를까, 나 같은 장수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단이 있다. 이 정도의 고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잡을 가치는 없어······. 그런데 어째서 나를 노리는 거지?’

대한국보다 인구가 더 많은 일본에서도 B급 이상의 초고수는 흔치 않았다. 한 나라에 많아 봐야 두세 명 정도 있을 것이다.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B+급의 초고수는 더욱 희귀하였다.

얼마나 희귀하냐면, 이들의 가치는 모토나리 같은 나라를 대표하는 무장보다 훨씬 귀중하게 취급될 정도였다.

지금 상황이 어색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치가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는 초고수들이 모토나리 하나를 잡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서, 설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토나리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섬찟 놀랐다.

‘이놈들, 머리를 제거하여 판단력을 잃게 하려는 거다! 엄청난 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거야!’

단순히 총사령관을 죽여 사기를 잃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목적이었다면 모두가 잠에 빠질 때쯤 조용하게 잠입하여 암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터.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기습하여 지휘부만 집요하게 노리는 것은 지휘부의 통제 능력을 차단하는 동시에 도발하려는 목적임을 의미하였다.

즉, 적군은 일본군을 유인하려는 것이다.

“무카이에게 알려야 한다, 절대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상대의 목적을 깨달은 모토나리는 급하게 전령을 불렀다.

자신의 생각을 도시아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모토나리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푹!

“크헉!”

무언가가 번쩍하는 순간 모토나리는 피를 토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창이 그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적장을 죽였다.”

모토나리의 가슴에 창을 꽂은 사내는 무덤덤하게 그리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내가 죽고 하필······ 무식한 무카이가 살아남다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가슴을 부여잡은 채 뒤로 쓰러진 모토나리는 위기를 직감하였다.

두 나라의 군대는 자신의 죽음을 기점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지리라.

그리고 이 같은 모토나리의 직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 * *

도시아키는 적의 형체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콧김을 뿜어내며 외쳤다.

“뛰어라! 놈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흥분한 도시아키에게 부관이 외쳤다.

“각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시끄럽다! 어떤 나라가 초절정 고수들을 희생시켜서 함정을 판다는 것이냐! 잔말 말고, 놈들을 잡는 것에 집중해라! 초절정 고수를 잡을 기회는 이번뿐이다!”

자신의 최대 적수이자 라이벌이었던 모토나리의 죽음에 도시아키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 손에 죽었어야 할 놈이 이렇게 죽다니.’

그는 분노를 느끼며 곧바로 추격 명령을 내렸다.

전 부대로 하여금 대한국의 유격 부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도시아키의 명령에 나가노군은 물론이요, 동영군도 발 빠르게 추격에 나섰다.

모리 모토나리.

그는 동영군에서 명망을 떨치던 지장이었다.

유저들은 물론이요, NPC까지 모리 모토나리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모토나리의 죽음에 동영군은 그야말로 광분하였다.

도시아키의 명령에 찬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적이 강을 건너고 있다! 모두 놓치지 마라!”

마침내 추격군은 적의 뒤꽁무니를 잡았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강만 건너면 적을 잡을 수 있으리라!

“우와아아아아!”

지쳐 있던 나가노군과 동영군도 적이 눈앞에 보이자 힘찬 함성을 내지르며 강에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2만이 넘는 병사들이 강에 몸을 담고 적을 추격할 때 부관이 도시아키에게 다급히 말했다.

“가, 각하! 이곳은 모가미강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모가미강은 수심이 깊고 폭이 넓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

도시아키는 그 말에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콰앙!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측에서 물이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크롸롸! 크롸롸!

“수, 수공이다!”

“모두 도망쳐!”

난데없이 강에서 수해가 일어났다.

며칠째 비 한번 내린 적이 없었으니 자연재해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수공이 분명하였다.

적이 함정을 파고 이 자리로 자신들을 유인한 것이다.

“갑옷을 벗어라!”

도시아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렇게 외쳤지만 군은 이미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서로 밀치고 넘어지며 우왕좌왕하였다.

나가노군과 동영군은 정예군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거대한 수해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자들도 공포에 질린 것은 마찬가지.

오히려 경공을 사용하며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그들 때문에 군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빌어먹을!’

이를 강하게 물었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는 그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였다.

수만이 넘는 병사들이 강물에 수장될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일본군이 수해에 쓸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친위대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저 정도면 나였어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최소 1만 이상은 수장되었겠다. 엄청나네, 진짜.”

“수공이 무섭긴 무섭구나.”

호영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보관이 세운 작전이었고 자신이 보기에도 나름대로 가능성 있을 것처럼 보여 작전을 지시하였지만 이 정도로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에 보이는 일본군의 피해만 20퍼센트 이상이었다.

5만의 병사들 중 최소 1만 이상이 물속에 잠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피해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신들끼리 밟고 밟히면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가 압사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소 2만, 어쩌면 3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지 몰랐다.

호영은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황보관의 말대로 되었군.”

“쳇. 짱개 놈이 운은 무지하게 좋은 것 같습니다.”

김성근의 반응에 호영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제자가 공을 세웠다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제, 제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녀석과 저는 어떠한 사이도 아닙니다.”

퉁명스러운 대꾸에 호영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황보관을 아끼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니 그냥 우습기만 하였다.

‘무공 실력이야 비슷하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사제 관계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처음 황보관이 텃세를 당할 때에도 김성근이 나서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황보관이 대한국에 나름대로 잘 적응한 것은 김성근 덕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창을 손에 쥐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겠어.”

그는 일본군이 수공에 당하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도야마에서 모나미 강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김성근과 친위대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수공에 당하고 있는 일본군에 확실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친위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끄덕.

김성근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성근이 말에 올라탄 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쪽바리 새끼들이 비 맞은 쥐새끼 꼴을 하며 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금이 바로 쪽바리 새끼들을 말살할 기회다! 모두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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