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그때 적의 기지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것인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설마 함정인가?’
황보관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함정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온 적도 있었고 지반이 푹 꺼지며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황보관을 비롯하여 대원들은 압도적인 무공의 힘으로 일본인이 만든 함정들을 돌파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 적지 않은 대원들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피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장인 순현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
“적이 알아차린 것 같다. 시간 끌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돌격해라.”
순현의 돌격 명령에 대원들은 곧바로 적진을 향해 움직였다.
휘휘휙!
적진으로 다가가니 엄청난 수의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고수들답게 화살 공격을 쉽게 피해 내고는 전진하였다.
그들이 목책에 당도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숫자가 많아 보이는데?”
“최소 5천은 되어 보여.”
대원들은 작게 대화를 나누며 적군의 수효를 파악하였다.
보급기지를 지키는 일본군은 최대 2천 정도로 추산하였는데 막상 전투에 돌입할 때가 되니 5천으로 늘어나 있었다.
일본이 또다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땅굴에 숨어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왕실 정보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순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대원들 역시 거리낌 없이 순현의 뒤를 따라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진짜 무모하다니까.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다니. 뭐, 오늘만 이런 것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무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순현과 대원들은 지금까지 무모한 전투를 수도 없이 겪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야말로 죽음을 불사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황보관은 혀를 차면서도 순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애국심은 없었지만 그 역시 대한국의 승리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휴가나 왕창 받아야겠다. 아예 미국에 놀러 가 볼까?”
* * *
미와 미사요시는 열기구에 탄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개미 떼 같군.’
동일본 왕국의 수도, 하치노헤가 야마토 제국의 군대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되었다. 열기구를 통해 보이는 적군의 숫자만 무려 5만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하치노헤에 주둔한 동북부 연합군의 숫자는 고작 1만 5천에 불과하였다. 무려 3배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곳도 센다이 왕국처럼 멸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미사요시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한국의 편에 서서 센다이 왕국의 정권을 교체시켰지만 그는 센다이 왕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자신을 버린 나라였지만 어찌 되었건 자신이 만든 나라였으니 애정이라는 게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센다이 왕국도 이제는 멸망하였다.
영토는 야마토 제국에게 빼앗겼고 정통성을 가진 왕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것은 야마토 제국에게 투항한 배신자들과 미사요시처럼 패잔병을 이끌고 도주한 일부 장수들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살아남은 일부 장수들의 목숨도 경각에 이르렀다.
며칠째 이어지는 공성전.
연합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치노헤가 함락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대한국의 손을 잡은 게 실수였는지도 모르겠군.’
미사요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한국과 손잡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사요시가 대한국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대한국이 동북부 연합을 지레 포기했다면 비난할 수밖에 없겠지만 대한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탑승하고 있는 열기구도 대한국이 미국에서 얻어온 귀중한 전략 병기였고, 북해도에서 수만 명의 지원군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동북부 연합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일본 군주 동맹의 뒤를 흔들어 주는 대한국의 유격 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 고수들로 이루어진 천 명의 유격 부대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기에 미사요시나 다른 친한파들을 대한국을 비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나니 저도 모르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한국의 손을 잡지만 않았다면 어찌 되었건 센다이 왕국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공격하라!”
“우와아아아아!”
미사요시가 쓴웃음을 지으며 비관적인 생각을 할 때, 마침내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5만의 적군 중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열기구가 그래도 지금까지는 쓸모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겠어.”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적군이 어떤 병법을 사용할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군이 지금처럼 정공법을 펼치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열기구가 아니어도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열기구를 하강시키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안 그래도 불리한 전투, 그가 나서서 손을 보태기 위함이었다.
콰아앙!
“서, 성벽이 부서졌다!”
“모두 도망쳐!”
하지만 그가 성벽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성벽이 갈라졌다.
마법사의 힘인지 아니면 투석기인지 몰라도 어떤 가공할 힘에 의해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이다.
‘끝났다.’
그 모습을 보고 미사요시가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패배를 직감한 것이다.
물론 성벽이 갈라졌다고 무조건 성이 함락되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째 공성전을 이어 가는 동안 성문이 열린 적도 있었고, 성벽의 일부가 빼앗긴 적도 있었다.
공성전에서 그러한 일들은 무척이나 흔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합군이 계속된 전투로 피해가 누적될 대로 누적되었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예비 병력도 없었고 사기 또한 없었다.
일군을 지휘하는 미사요시조차 희망을 잃고 절망할 정도로 전황은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벽이 부서졌으니 패배를 직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돌격하라! 조선을 따르는 재일 놈들을 처단하라!”
“처단하자! 처단하자!”
“우와아아아아!”
갈라진 성벽에서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군을 막아야 할 아군은 고작해야 수백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는 아직 성벽 위에 있거나 도망친 것이다.
“젠장, 이렇게 죽는 건가.”
미사요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적군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반면 아군의 얼굴은 미사요시와 마찬가지로 절망하거나 낙담하고 있었으니 패배는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끼아아아악!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너 나 할 것 없이 싸움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괴상한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사요시도 멍청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한 하늘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어? 저건 뭐야?”
“독수린가?”
“아니, 독수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것 같은데······ 헉!”
멀리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점으로 보이던 그것이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형체가 뚜렷해졌는데 얼핏 보기엔 독수리나 다른 조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욱 근접해지자 사람들은 경악을 토해 냈다.
괴물. 그것은 괴물이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 마물이었던 것이다.
‘그리핀!’
모두가 경악하고 당황하였지만 미사요시는 달랐다. 그는 이미 저 마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물은 바로 그리핀.
미국에서 넘어온 공중형 마물이었다.
“설마 지원군인가!”
그리핀이라는 마물은 대한국이 미국과 교역하면서 부리기 시작한 마물이었다.
당연히 그리핀의 등장은 지원군이 등장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리핀에 사람이 타고 있다고 해 봤자, 두세 명 정도뿐이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던 미사요시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에서 고작 두세 명이 증원했다고 바뀔 리가 없었다. 엄청난 고수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그리핀의 등장으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람이다! 괴물의 등에 사람이 타고 있어!”
마물은 비행기가 하강하듯 급속도로 하강하였는데, 가까워지자 마물의 등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훌쩍.
그리핀에 타고 있던 거한은 10미터 정도 높이의 상공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적이고 아군이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연합군을 지휘하는 유저 중 한 명이 갑자기 외쳤다.
“지원이 왔다! 대한국에서 지원을 보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기합을 지르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아군이다! 모두 힘을 내라!”
“싸우자!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와아아아아아!”
고작해야 한 명뿐인 지원군.
하지만 어쨌든 지원군은 지원군이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내며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사기가 회복된 상태에서 재차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미사요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한 명이 증원되었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리핀이라는 마물도 있었지만 그리핀은 일반 병사들에게나 위협적이지 무공을 익힌 고수들에게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적군에는 마법사도 있었으니 전장에서 날뛰려는 순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그만큼 어그로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 그 사내는 어디 갔지?”
미사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을 훑어보는 사이, 그리핀에서 뛰어내린 사내가 종적을 감추었다.
존재감이 대단했던 사내였는데 잠깐 사이에 모습을 감춘 것이다.
“뭐, 뭐야! 이놈은!”
“크억. 괴, 괴물이다!”
갑자기 적군이 비명을 내질렀다. 갈라진 성벽에서 물밀듯이 들어오던 적군의 비명이었다.
미사요시가 고개를 돌려 성벽을 바라보니 그리핀에서 뛰어내렸던 거한이 그곳에서 적군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저기까지 갔다고? 아니, 그보다 어느 정도의 고수이기에 저런 실력을 보이는 거지?’
잠깐 사이에 성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수십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무공 실력도 무척이나 놀라웠다.
저 정도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B급? B+급? 말로만 듣던 A급?
“내 이놈! 감히 나의 병사들을 죽이다니! 야마토 제국의 무신으로 불리고 있는 나 다카다 마코토가 용서하지 않으리······ 크헉!”
하지만 적장의 죽음을 통해 실력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말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단숨에 죽음을 맞이한 적장은 무려 B+급 실력자로 알려진 다카다 마코토였기 때문이다.
‘저건 A, 아니 A+급이다!’
B+급 실력자를 단숨에 죽였으니 당연히 A급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사요시로서는 쉬이 믿기 어려웠다. 세상에 A+급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