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중요한 만남이 있을 거라는 호영의 말에 충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드디어 대통령을 만나는 겁니까?”
그는 현재 원재처럼 오직 센추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사정에 대해 어두운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이 긴장한 얼굴로 양복을 입는 모습을 보고서 대뜸 ‘대통령’을 거론하였다.
충구의 입장에서 호영이 긴장할 일은 대통령을 만나는 것 외에는 없었던 까닭이었다.
‘대통령은 무슨. 이제 막 정보 부처들이 접촉해 오는 상황인데.’
호영은 그런 충구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보러 간다.”
“······예?”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보러 간다고.”
“······”
평소, 두뇌 회전이 빠른 모습을 곧잘 보여 주었던 충구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둔하게만 느껴졌다.
동네 바보 형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5초 정도 지나자 마침내 호영의 말을 깨달았는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미래의 장인어른을 보러 가시는 것이군요!”
“글쎄, 아직은 장인어른이라 부르기는 이르지. 경선과 결혼하게 될지도 아직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이야.”
호들갑을 떠는 충구를 보며 호영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호영이라고 이런 일에까지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충구가 느낀 것처럼 그는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저는 응원하겠습니다. 미래의 장인어른에게 잘 보여서 결혼까지 그대로 골인하십시오!”
주먹까지 쥐며 응원하는 충구의 모습을 보며 호영은 어색함을 느꼈다.
허영만처럼 재벌들과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외국의 명문가와 혼인하기를 바랐던 것이 충구였다.
충구 역시 지도자의 혼인은 정략의 도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경선은 나름 부유한 편이기는 하나, 그래 봤자 ‘은수저’에 불과하였다.
한마디로 충구가 만족할 만한 대상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와 경선의 결혼을 응원하는 거야? 원래는 미국의 대기업이나 중국의 권력자들을 노렸잖아?”
“사장님이 하루빨리 애를 낳기를 원해서입니다.”
“애를 낳으라고?”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이 세우신 제국을 든든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
당연하다는 듯, 하루빨리 후계자를 생산해 내라고 종용하는 충구를 보며 호영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언가 상식이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요즘 장어, 굴, 구기자 같은 음식이 자주 나오던데, 설마 그것도······?’
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지금이 중세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흠흠, 아무튼 나는 지금 가 봐야 하니 센추리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지금은 뭐 그게 더 중요하니 제가 양해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좋은 결과를 얻고 오셔야 합니다.”
“네가 시어머니냐?”
“대한국에서는 거의 안주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흐흐.”
짓궂게 웃는 충구를 보며 호영은 피식 웃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골인에 성공하십시오!”
충구의 응원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니,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 직원들이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여직원들은 뭔가 아쉬운 눈으로, 남직원들은 주먹을 쥐며 ‘파이팅!’ 하고 응원하는 눈으로 호영을 바라보았다.
‘설마, 단체 메시지라도 보낸 건가?’
직원들의 눈빛을 보니 충구의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왠지, 충구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전 직원에게 알린 것 같았다.
호영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다급히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사장님도 드디어 결혼을 하시는구나.”
“아쉽다. 나, 사장님 노리고 있었는데.”
“너만 노렸어? 아마 여직원들은 전부 사장님을 노렸을걸. 워낙 카리스마가 강하셔서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데 여자 친구는 누구래?”
“몰라. 센추리에서 만났다는데······.”
뒤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여직원들의 목소리에 호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작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일인데 지나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이러다가 언론에까지 알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설마 그러려고.’
호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애마를 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 사장님! 송 사장님! 이제 곧 결혼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저 양반이 여기는 어떻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경오 신문사의 편집장, 차한열이었다.
“상대는 누구입니까! 부디 저에게만 알려 주십시오! 송 사장님! 아니, 국왕 전하!”
“죄송하지만 사생활인지라······.”
“사장님! 국민들에게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사장님!”
“······.”
자신의 사생활과 국민들의 알 권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쾅!
호영은 단호하게 차한열을 무시하고는 그대로 차 문을 닫았다.
비록 호영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언론인이었지만 자신의 사생활까지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 * *
“긴장하시는 거예요?”
경선의 물음에 호영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전혀 긴장 안 했는데?”
“에이. 한눈에 봐도 긴장하셨는데요, 뭘.”
“······.”
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인어른이 될 수도 있는 사람과 처음 만나는 것인데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경선은 그냥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결혼을 할 수도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그냥 호기심에서 부른 거라고. 아버지가 진짜 유난스러울 정도로 무술을 좋아하시거든요.”
“······단순히 호기심에서 부른 거라고?”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호영은 그녀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지는 경선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상견례 같은 거였다면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겠어요?”
“······그렇기는 하네.”
확실히, 상견례였으면 점잖은 분위기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식당이 아니라면 아예 저택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호영이 있는 곳은 식당이 아니었다.
물론 저택도 아니었다.
도장.
사내들의 땀내로 가득한 무술 도장이었다.
“저기 아빠, 아니 아버지 오시네요.”
저벅저벅.
경선의 말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 건장한 체격의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왠지 모르게 낯익게 느껴지는 중년 사내를 보며 호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굽히며 큰 목소리로 인사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송호영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박선후입니다.”
박선후가 손을 건네자 호영은 다급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음?’
그런데 악수를 하던 중 박선후가 돌연 힘을 주었다.
갑자기 상대가 힘을 주니 호영도 얼떨결에 힘을 주었다. 어쩌다 보니 초면부터 힘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는 힘을 풀었다.
장인어른이 될 수 있는 사람과 힘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아쉽군.”
“네?”
“아니에요. 이름이 송호영이라고 하셨죠?”
“말을 놓으십시오.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의외로 경선의 부친, 박선후는 호영을 상대로 예의를 갖추었다.
경상도 출신에 무술 하는 사람이라 첫 만남부터 반말할 것이라 예상하였는데 말이다.
“초면부터 반말을 찍찍 할 수는 없지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하고 왔어요?”
“······네?”
“대련하려면 간편한 복장을 입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박선후의 갑작스러운 말에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옆에 있던 경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빠! 정말 대련할 생각이었어?”
“왜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
“아니, 첫 만남부터 대련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잖아. 예의도 아니고.”
호영은 그제야 박선후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라는 뜻이었다.
‘허, 무술을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딸의 남자 친구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대련을 신청하다니.’
그로선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황당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딸 도둑이라며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게 보다 현실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계속 말싸움을 하였다.
“애초에 도장으로 부른 이유가 대련하려는 건데 예의가 아니라고?”
“그냥 무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자는 건 줄 알았지, 나는.”
“도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느냐?”
“애초에 첫 만남을 도장에서 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니까. 하아.”
한숨을 내쉬는 경선을 보며 호영이 앞으로 나섰다.
“대련이라면 어떤 대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창술을 익히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격투는 할 줄 아세요?”
“창보다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할 줄 압니다.”
“그럼 격투로 겨뤄 봅시다. 여기서 창술을 겨룰 수는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련을 요청하는 박선후.
호영은 잠시 고민하였지만 이내 결정을 내렸다, 대련에 응하기로.
“알겠습니다. 대련에 응하겠습니다.”
“도복은 저기 샤워장 옆에 있어요. 아무거나 쓰세요.”
“예, 지금 바로 갈아입으러 가겠습니다.”
호영이 도복을 찾으러 가니 경선이 그를 따라와서는 다급히 말했다.
“진짜 대련을 할 생각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하아, 누가 남자들 아니랄까 봐.”
호영 못지않게 그녀도 황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난데없이 남자 친구와 아버지가 싸우게 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선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링 위를 바라보았다.
* * *
“분명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박선후의 얼굴을 보고 난 이후로 호영은 계속해서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박선후의 얼굴이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귀 전에는 경선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그가 박선후의 얼굴을 아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호영은 애써 찝찝함을 털어 내며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자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그대로 나왔다.
“이리로 오세요.”
그가 도복을 갈아입자 박선후가 기다렸다는 듯 링 위로 불렀다.
대련을 하자는 뜻이었다.
“예.”
“크게 부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몸을 푸시고. 파울 컵도 착용하였죠?”
“······예.”
호영은 순간 ‘부상이 걱정되면 센추리에서 대련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재벌 회장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조차도 미래의 장인어른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 되었습니까?”
링 위에서 간단하게 몸을 풀고 있는데 박선후가 물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럼 시작합시다.”
“예.”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자 호영은 긴장하는 얼굴로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