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아군입니다.”
“아군이라면 정체를 밝혀라.”
“지금은 밝힐 수 없습니다.”
“고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아군이라면서 어찌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거야!”
고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복면 사내들이라지만 고환의 입장에서는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다.
이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치워 주신다면 저희의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허.”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지시하였다.
“모두 물러나라.”
“아니 되옵니다! 어찌 전하 혼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을 대면한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위험하옵니다!”
신하들의 반발에 고환이 소리 질렀다.
“경들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없다! 저들이 고를 죽이려 하였다면 이미 죽었을 터인데 무슨 걱정들이 그렇게 많은가!”
“······.”
따끔한 한마디에 신하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이 모두 멀찍이 물러나자 고환이 다시금 물었다.
“말해라. 너희들은 누구냐?”
고환이 물으니 다섯 명의 사내가 복면을 벗었다.
하지만 맨얼굴을 보아도 크게 의미는 없었다. 그가 아는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대한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대한국이라고?”
그 말에 고환이 당혹하였다. 갑자기 여기서 대한국이 왜 나온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왕이 되고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난데없이 반란이 일어난 것도 충격적이기 그지없는데 대한국의 무인들로부터 구원을 받다니.
대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에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고를 구한 이유가 뭐지?”
“우리 대한국은 동위국과의 동맹을 원합니다.”
“동맹하기 위해 고를 구했다고?”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차피 너희들 입장에서는 이계인들이나 우리나 큰 차이가 없지 않나? 아무런 관계가 아니니 말이야.”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동위국의 이계인들은 아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것이었어.”
“아국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중원에서 혹시 모를 침공이 있을 시 공동으로 막아 내는 것입니다.”
“군사동맹을 맺자는 거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고환은 이내 흔쾌히 대답하였다.
“좋다. 그런 동맹이라면 고라고 반대할 이유는 없지. 다만······ 역도들을 아직 진압하지 못했는데 힘을 보태 줄 수 있겠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음에도 고환은 개의치 않고 부탁하였다. 이미 한번 도움을 받았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전하께 힘을 보태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동맹이다.”
두 나라의 동맹은 그렇게 순식간에 성사되었다.
“각하.”
“이야기는 잘되었나?”
“예, 자세한 사항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지만 군사동맹은 순조롭게 성사되었습니다.”
동위국의 왕과 대화하였던 사내가 검은 복면 무리에서 수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말했다.
검은 복면 사내들의 수장, 홍준기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두 나라와도 동맹을 맺는다면 중국의 침공은 안심해도 되겠어.”
홍준기, 그는 몇 달 전 호영에게서 요령성의 국가들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계 국가들이 대한국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호영의 지시를 받은 준기는 곧바로 요령성에 위치한 세 개의 나라에 첩자를 보냈다.
또한 현실에서도 중국어 능력자들을 동원하여 중국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그렇게 센추리 시간으로 한두 달이 지나자 온갖 정보가 흘러들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준기는 중국 유저들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적이 NPC만 있다고 생각한 중국 유저들이 방심하고서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중국 유저들의 반란 소식을 접하게 된 준기는 곧장 호영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 호영으로부터 다시금 명령이 하달되었다. 중국 유저들의 반란을 저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준기는 호영의 명령에 따라 북방군의 최정예 무인들을 요령성에 있는 세 개의 나라로 파견시켰다.
본인은 직접 다롄 성으로 이동하여 동위국의 반란을 막아 냈고 말이다.
“두 나라의 동맹도 어렵지 않게 성사될 것입니다. 중국 유저들과 적대 관계를 형성한 두 나라로선 우리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요령성의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몽골계와 만주계 국가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대 관계라고 보는 게 맞았다.
몽골계든 만주계든 틈만 나면 한족의 영토를 침공하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중국 유저들과 새로이 적대 관계를 형성한 요령성의 국가들은 어떻게든 동맹 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주 인근의 세력 중에서 몽골계, 만주계를 제외하면 남은 세력은 북조선 왕국과 조선족이 세운 다섯 개의 부족, 그리고 대한국이었다.
물론 만주 중심부에 오크 왕국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최악의 상황이 아닌 이상 오크와의 동맹은 생각하기 힘들 터.
그러니 요령성의 세 나라는 대한국과의 동맹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족이 세운 다섯 개의 부족은 국력이 너무 약하고 북조선은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 말이다.
“요령성과 동맹을 맺는다면 만주에서 위협이 될 만한 곳은 크게 길림성과 흑룡강성 그리고 연해주인가?”
“예, 하지만 길림성이나 연해주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연해주는 알겠다. 그런데 길림성은 왜?”
아직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여력이 없는 연해주였다.
러시아 세력부터 중국, 만주, 원주민 등등 온갖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길림성 북부의 경우는 몽골계가 주류인데 현재 이들은 유저들이 장악한 세력과 NPC가 장악한 세력으로 나뉜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내전이 벌어진 셈인데, 워낙에 치열하여 내전이 끝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부는······.”
“오크 왕국?”
“그렇습니다. 길림성 중부를 장악한 오크 왕국은 사방이 적이라 대한국으로까지 원정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남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연해주와 비슷한 이유였다. 군사력이 비등비등한 온갖 세력들이 난립해 있다는 뜻이다.
물론 북조선의 경우 국력이 약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주변 상황에 의해 다른 곳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북조선의 북부가 바로 흑룡강성이었으니 말이다.
“흑룡강성은 아시다시피 만주계가 주류입니다. 대놓고 만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만주국부터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후금, 그리고 여러 민족이 합쳐진 북부여까지.”
“그중에서 한 곳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
“누구지?”
“후금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친다는 건가? 원한은 중국인들에게 있을 텐데.”
“물론 우리 대한국을 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갚는 것보다 세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한다면 남진할 가능성을 낮게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북조선을 병합하려 하겠군.”
“반대로 북조선과 동맹을 맺고 대한국을 나눠 가지려 할 수도 있습니다.”
준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든 게 가정이었지만 대한국을 위협한다면 단 1퍼센트도 경시할 수 없었다.
특히 후금의 군사력은 그의 의형인 호영조차 경계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궁기병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대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준기가 짧게 물었다.
“우리가 먼저 북조선과 손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한국과 북조선의 사이는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만주로 쫓아낸 장본인이 바로 대한국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교역 확대, 대사관 설치, 무공 사범 파견, 그리고······ 정략결혼입니다.”
“대상은?”
“왕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작도 괜찮을 것입니다.”
3회 차까지는 남작 위가 최고였지만 4회 차가 되면서 자작 위를 하사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직은 고작해야 두 명밖에 하사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자작 위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형님께 말해 봐야겠군.’
국가의 중대사를 그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준기는 질문을 끝마치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북방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해라.”
“수도로 돌아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북방군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전하께 말씀드리면 귀환을 허해 주실 것이다.”
북방군에서 많은 일을 한 준기였다.
이제 준기가 없어도 북방군에 문제 생길 일은 없을 터.
그러니 준기는 하루빨리 수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S랭크의 무공을 만들 수 있다. 형님을 위해서 어떻게든 이번 회 차가 끝나기 전에 S랭크의 무공을 만들어야 해!’
* * *
“요령성과의 동맹이 성사되었다. 북조선과도 거의 성사되기 직전이고. 이 모두가 홍 이사가 수고해 준 덕분이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준기가 북방에서 세운 공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마 센추리 안에서 족히 수백 년 동안은 회자될 정도의 공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준기는 겸양했다.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는 그저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호영은 그런 준기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성격이 제법 바뀌었지만 본성은 그대로인 것 같군.’
센추리에서 살아간 세월만 십수 년. 성격이 바뀌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그대로라는 사실이 호영을 흡족케 하였다.
“그런데 이제 수도로 복귀하겠다고?”
“정확히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준기의 말에 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홍 이사가 세운 공이라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중국 유저들의 반란을 막아 내고 요령성의 세 나라와 동맹을 성사시켰다. 또한 북조선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영이 가장 먼저 내린 명령, 즉 북방군을 안정시킨 것만으로도 결코 작은 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명령이라 생각될 수 있었다.
센추리에서 수십 년을 무장으로서 살아온 그가 조금 사나운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야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북방군은 그저 그런 군대가 아니었다. 대한국 최고의 군대였다. 병사의 수가 5만이 넘었고 이 중에 기병은 1만 5천에 달했다.
더군다나 병사 모두가 기초적인 무공을 익혔으며 장교들은 최대 D급까지 성장할 수 있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군대였으니 북방군을 휘어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북방군이 반란에 가담하였다면 외세의 침공보다 훨씬 위험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북방군을 안정시킨 준기의 공은 결코 작다고 볼 수 없었다.
준기의 공을 나열하자면 자작 위는 물론이요, 국방부를 신설하여 장관의 자리를 줘도 부족할 정도였다.
“저는 권력을 얻기 위해 공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충직하기 그지없는 준기의 대답에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충성심이 강하다지만 권력조차 마다하다니, 호영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